은혜가 이긴다(2)
구원은 은혜의 선물이다
에베소서 2:6~9
서론
지금 한국교회가 말라가고 있습니다. 기쁨도 마르고 웃음도 마르고 예배도 마르고… 모든 것이 말라갑니다. 말라가면 죽어가는 것입니다. 논에 물이 마르면 벼가 죽어가고 저수지에 물이 마르면 고기들이 죽어갑니다. 사람도 수분이 빠지고 말라가면 늙어가는 것이고 죽으면 아예 마른 뼈가 되고 맙니다.
교회가 코로나19로 인해 마스크를 쓰면서 예배가 정상적이지 못하면서 예배당 안에 기쁨도 마르고 웃음도 마르고 예배도 마르니 자연히 은혜가 말라버립니다. 은혜가 말라가면 노쇠해 가는 교회이고 죽어가는 교회입니다.
지난 주일에 기독교를 대표하는 브랜드(brand)대표 단어가 ‘은혜’라고 전했습니다. ‘은혜’라는
사전적 의미는 ‘고맙게 베풀어 주는 신세나 혜택’입니다. 부모님에게서 받은 은혜는 가장 큰 은혜입니다. 부모님에게 신세를 많이 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부모님의 은혜가 온전한 은혜는 아닙니다. 부모님들의 은혜에는 나름대로 조건부가 있고 투자개념도 있습니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주었으니 받고 싶은 것이지요.
정부로부터 받는 혜택도 일종의 은혜입니다. 정부는 무상급식을 해주고 코로나로 인해 재난지원금을 100만원도 주고 50만원도 주고 25만원도 주고… 무상으로 줍니다. 은혜이지요. 그러나 그거 은혜가 아닙니다. 그 돈들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대통령이 당신의 땅을 팔아 보탰습니까, 집을 팔아서 보탰습니까? 도지사나 정치가들이 자기들의 돈은 한 푼도 쓰지 않고 국민들 세금으로 생색을 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내년도 나라빚이 1000조(兆)가 넘었습니다.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이 고등학생이 되면 1인당 1억 5천만 원의 국가적 빚을 지고 삽니다. 결국 우리는 이것 받고 저것 받아 좋아라 했는데 우리 자손들은 부모들이 남기고 간 빚덩이로 허덕일 것입니다. 그러니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의 은혜가 아닙니다.
성경적으로 은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은총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무상으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어떤 조건도 책임도 의무감도 요구하지 않고 무상으로 한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영어로는 ‘그레이스’(Grace)보다는 ‘페이버’(favor)가 더 적절합니다. 페이버는 한국말 번역이 애매하지만 호의(好意)입니다. 호의는 친절한 마음씨, 좋게 생각해 주는 마음, 선의(善意)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런 조건이 없이 무상으로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구약에서의 은혜는 ‘언약에 기초한 은혜’로서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민(選民)이지만 성민(聖民)으로 살지 못했습니다. 백성들이 죄를 지면 하나님이 찾아가셔서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시고 축복하시고… 다시 죄를 짓고 다시 하나님이 찾아가셔서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시고 축복하시고…. 하나님께서 열이면 열 번, 백이면 백 번을 한없이 용서하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자기 백성들을 대해주신 것입니다.
은혜에 관한 여러 내용들을 종합하면 은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태도나 호의, 곧 창조 사업에서 영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하신 모든 사랑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최고봉은 독생자를 인간에게 선물로 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는 1차적 목적은 ‘구원’입니다. 교회 다니면서 마음의 평안, 치료, 가정의 화목… 사회구원… 등등의 목적이 있지만 이 모든 것들은 기독교가 아니어도 얻을 수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믿음의 1차 목적은 영혼과 육신의 구원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 예수님을 믿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나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성육신, 십자가에서의 죽음, 부활, 승천, 천국에서의 영생! 구원을 얻으려면 우리에게 주신 이런 내용들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었습니다. 성육신, 십자가에서의 죽음, 부활, 승천, 천국에서의 영생! 누가 믿었는가? 내가 믿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믿어서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내가 믿었기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들이 총회장이라고 아들 총회장의 믿음으로 그 아버지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어서 천국에 간 것입니다. 내 믿음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8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가 구원을 받은 믿음은 누구의 선물이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육신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부활, 승천, 천국에서의 영생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에게는 그 내용들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이 없기에 죽었다 깨어나도 믿어지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서 구원의 도리를 믿었고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8절, 우리가 받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보통 집안의 아가씨가 회사에서 사내연애를 했습니다. 알고 보니 연애 상대자가 그 재벌회사 회장의 아들입니다. 저들끼리 연애야 되겠지만 결혼까지 가겠습니까? 결혼은 비슷한 사람들끼리, 비슷한 사돈들이 만나야 하는데 한 쪽이 너무 기울어지면 행복한 결혼생활이 쉽지 않지요! 결혼 문턱까지 갔다가 혼수품으로 깨어질 수도 있고 모욕을 받아 수치심으로 결혼생활을 시작한다면 열에 아홉은 비극으로 끝날 것입니다.
그런데 사내 커플은 결혼까지 가게 되었지만 예비신부와 부모님의 마음은 편치가 않습니다. 그즈음에 시아버지가 될 회장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결혼을 반대하려나, 혼수품을 어느 정도 마련하는지를 물어보려나… 마음이 초조합니다. 며느리감을 대한 재벌 회장님이 봉투를 하나 내놓으면서 이리 말합니다.
“혼수감으로 마음고생이 많지? 이거 10억이다. 이걸로 네 마음껏 혼수품을 장만하거라! 이 돈은 너하고 나만 안다! 네 시어미가 될 이도 모르고 네 남편도, 그 누구도 모른다. 너하고 나하고 죽을 때까지 비밀이다!”
예비신부는 그 돈으로 원없이 혼수품을 장만했습니다. 모두에게 떳떳했고 당당했습니다. 시아버지는 당신이 몰래 돈으로 장만해 온 혼수에 너무 마음에 든다고 좋아하시며 동네방네 일가친척에게 자랑을 했습니다. 시아버지는 당신이 돈을 주고서도 며느리가 해온 혼수품에 기특해 하시면 너무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며느리가 얼마나 큰 은혜의 선물을 받은 것입니까? 돈 선물도 엄청나지만 그 마음씨는 돈으로 다 환산할 수 없는, 다 갚을 수도 없는 큰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받은 믿음의 선물로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주신 것들을 믿었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당신이 믿음을 주셔놓고 그 믿음으로 믿을 때 그 믿음을 나의 믿음으로 인정하시고 구원을 일으켜 세우신 것입니다.
은혜라는 말을 구약에서는 ‘헤세드’라고 합니다. 이 단어의 뜻이 독특합니다. 헤세드는 “강자가 약자에게 보여주는 자발적인 충성, 사랑”입니다. 충성은 약자가 강자에게, 하수가 상수에게, 계급이 낮은 사람이 계급이 높은 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는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연약한 지들, 아직도 원수 상태가 되어 있는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믿음들이 역사하도록 우리에게 충성을 다하십니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구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게 된 것을 보면 더 명쾌하게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창3:15)을 예고하신 후에 사단도 이를 들었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아브라함의 혈통을 통해 들어오지 못하게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얻게 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히브리혈통의 사내아이들은 출생 직후 모두 죽게 했습니다. 예수님 탄생 시에는 두 살 미만의 사내아이들은 모두 죽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때마다 더 큰 은혜로 아브라함의 혈통을 보호하셨습니다. 여기를 막으면 저기를 뚫고 저기가 막히면 이곳을 뚫고… 그렇게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이르도록 했습니다. 이를 이사야 선지자는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으로 표현합니다.(사9:7, 37:32).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의 선물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 은혜는 하나님의 열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세상적인 성공과 출세는 ‘자수성가’가 가능합니다. 우리야 성공과 업적을 ‘신수성가’ 하나님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어디 그래요? 그 사람들은 자수성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구원 문제만큼은 자수성가가 안 됩니다. 모든 종교도 구원의 걸림돌을 죄라 합니다. 인생에 죄가 있어 윤회를 거듭하고 죄가 있어 업보에 또 업보를 이어가고 인생에 죄가 있어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를 없애고 자신을 선량한 사람-선인(善人), 의인으로 만들어 자력구원을 해내고자 합니다. 자력구원을 돕는 것이 바로 종교의 계율이고 계명입니다.
그런데 죄를 없애는 것이 쉽겠습니까? 아무리 때를 씻어내도 어디엔가는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방팔방이 죄에 노출되어 있는데 어찌 죄와 무관한 상태를 만들어 내겠습니까?
기독교의 인간관은 원죄를 말합니다. 태어나면서 아예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 2장 1,5절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너희를…’이라고 규정합니다. 죄들이 밖에서 들어온 자범죄가 있는가 하면 아예 처음부터 혈액형처럼, DNA처럼 박혀있는 죄가 있습니다. 내 힘으로 씻어낼 수가 없습니다. 손과 발목…상처야 어떻게 해보겠지만 뇌(腦) 속에 있는 병은 속수무책입니다.
죄가 그런 것입니다. 죄는 아예 내 본성에 새겨져 있습니다. 타고난 선한 성품으로, 교육과 환경에 의해 어느 정도 죄의 성향을 줄일 수 있고 누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습니다. 타고난 죄인이라는 한계 안에서 선을 수행하고 인격을 수양함으로, 종교적 계명을 지킴으로 어느 정도의 선(善)은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으로는 인간의 한계를 넘을 수 없고 죄인의 모양을 벗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존과 요구를 충족할 수 없습니다. 흑인이 아무리 희게 포장해도 백인들의 눈에는 흑인이고 백인들이 아무리 검게 한다고 해도 흑인들의 눈에는 백인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정도의 차이는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백인을 100% 흑인으로, 흑인을 100% 백인으로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행위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암만 노력하고 자신을 선한 사람으로 만든다 해도 하나님의 수준에는 미달입니다. 행위로는 100% 순결한 천국 시민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자기 손으로 의를 이루어 내려는 사람은 마치 흙 묻은 손으로 흰 셔츠를 빠는 사람과 같습니다.(브라이언 채플). 빨아도, 빨아도 흙 묻은 손으로 빠는 셔츠는 흰 셔츠의 원상태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행위가 그런 것입니다. 구원은 자력(自力)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구속으로 얻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중생하게 하시고 믿음을 주시고 회개하게 하시며 십자가의 보혈이 믿어지며 죄사함의 은총과 함께 구원을 받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에 필요한 이 모든 것들이 내게 올 수 없고 아무리 하나님에 대해 들어도 이해가 안 되고 일부러 어깃장을 부리는 것도 아닌데 믿음도 생기지 않고 예수님의 탄생, 십자가 속죄사역, 부활, 승천, 재림…이 종교적 교리에 불과할 뿐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이 모든 사항들이 믿어집니다. 믿을 수 있는 믿음, 수용할 수 있는 믿음을 하나님께서 같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8절 하반절은…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선물은, 고마워서 하는 선물이 있고 뭔가를 바라서 선물 포장지에 담아 전하는 뇌물도 있고 어떤 관계로 받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선물은 ‘그냥’, ‘조건 없이’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사과 한 짝을 선물 받아도 큰 은혜인데 어마어마한 영혼 구원, 육신 구원을 통째로 받았으니 얼마나 굉장한 은혜의 선물입니까? 그래서 필립 얀시는 구원의 은혜를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7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내었다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구원이나 구원 이후에 이루어지는 거룩은 자수성가의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 가시는 신수성가입니다. 이런 은혜를 우리가 받았는데 하나님의 크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다(고전15:10)고 고백합니다.
결론
옛날 한 왕이 있었습니다. 왕이 궁전 창밖으로 보니 어린 왕자가 들판에서 꽃을 꺾어 바구니를 채우는 사랑스런 모습이 보였습니다. 바구니에 화려한 리본이 달려있는 것으로 보아 왕에게 바칠 선물입니다. 왕자는 아름다운 꽃만 꺾는 것이 아니라 꺾다보니 들판의 잡초도 담고 담쟁이와 웅덩이에 있는 엉겅퀴도 꺾어 담았습니다. 애쓰는 모습이 안타까워 왕은 오른 편에 앉아있던 맏아들에게 한 가지 임무를 주었습니다.
“내 정원으로 가서 거기 자라는 꽃들을 꺾어 오렴. 그리고 동생이 돌아오거든 아이의 꽃바구니에서 내 궁전에 적합하지 않는 것을 모두 빼 내거라. 대신 내가 기른 꽃들을 채워 꽃바구니가 제대로 꾸며지게 하려무나.”
맏아들은 아버지가 지시한 대로 했습니다. 어린 동생이 왕궁으로 돌아왔을 때 형은 잡초와 담쟁이, 엉겅퀴를 제거하고 왕의 정원에서 가져온 꽃들로 대신 채웠습니다. 그런 다음 왕실용 리본으로 꽃바구니를 다시 묶어서 동생이 왕에게 선물로 드리도록 했습니다. 어린 왕자는 왕궁으로 들어가 꽃바구니 선물을 드리며 말했습니다.
“아버지, 여기 제가 아버지를 위해 준비한 아름다운 꽃바구니를 드립니다.”
왕은 기쁘게 받으면 매우 흡족해 했습니다. 아이는 나중에야 그 선물이 아버지와의 은혜로운 준비로 받을 만한 선물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값으로 우리를 구속하고 자녀로 삼아주셨다 해도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 일생의 꽃바구니는 예쁜 꽃도 있지만 잡초, 담쟁이, 엉겅퀴도 있을 것입니다. 내 인생의 오점들입니다. 그걸 부끄러워할 때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 인생의 실수와 죄의 엉겅퀴, 잡초, 담쟁이는 모두 걷어내시고 십자가의 피묻은 아름다운 꽃바구니를 만드셔서 받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 아버지의 은혜입니다. 은혜는 죄를 이겨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기 위해 오늘 여기에서 살아가고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성도님들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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