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가 이긴다!(1)
교회에 은혜가 마르고 있다!
고린도전서 15:9~11
서론
영국에서 열린 비교종교학 회의에서 세계 각국 전문가들이 기독교신앙의 독특성을 토론했습니다. 답이 될 만한 단어를 올려놓고 정답이 아니면 하나씩 지워나가는 일을 했습니다.
우선 ‘사랑’이라는 단어를 올렸습니다. 그건 다른 종교에도 있다는 말에 지웠습니다.
‘성육신’이라는 단어를 올렸지만, 신이 인간으로 환생한 이야기는 다른 종교에도 있습니다(단군신화 등).
‘부활’을 올렸더니, 그리스-로마신화의 신들은 죽었다 살아나기를 마음대로 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대표하는 단어에 대한 합일점을 얻지 못하고 있을 때, 영국태생의 기독교 변증가이며 소설가인 C.S. 루이스가 방(房)을 잘못 찾아들어왔습니다. 판타지 고전 ‘나니아 연대기’를 쓴 유명 작가이기도 합니다. 절친이 ‘반지의 제왕’ 톨킨입니다. 톨킨은 루이스의 격려에 힘입어 ‘반지의 제왕’을 썼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어떻든, 루이스가 물었습니다.
“무얼 토론하고들 계십니까?”
“기독교만의 독특성을 논하는데 결론이 모아지지 않습니다.”
루이스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습니다.
“그거야 쉽죠! 은혜 아닙니까?”
루이스는 기독교를 대표하는 단어를 ‘사랑’도 ‘부활’도 ‘십자가’도 아니고 은혜라로 정리합니다. 그래요! 흔히 기독교를 상징하는 브랜드(brand)단어를 ‘사랑’ ‘구속’ ‘십자가’… 봅니다. 이런 단어들이 기독교의 핵심 가치들인 것은 맞아요! 이런 단어들을 빼면 기독교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사랑’만 해도 성경에 557회가 나오니 ‘사랑’은 기독교를 대표할만한 단어입니다.
그런데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흘러오고 그 사랑으로 우리가 구속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원인과 과정에는 은혜라는 해류(海流)가 흐르고 있습니다. 은혜가 없으면 하나님의 사랑도 값없이, 조건 없이 우리에게 올 수가 없고 믿음으로만 이루어지는 ‘이신칭의’ 구원도 없고 오늘의 나됨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은혜’라는 단어가 291번이나 나옵니다.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 구원을 제시합니다. 구원의 방법은 그 주체가 ‘나’입니다. 그러다보니 불교는 고행, 힌두교는 업보(業報), 유대교는 언약(言約), 이슬람교는 법전(法典)을 말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개인의 노력으로 구원을 받는 길을 제시합니다. 종교는 구원을 이루려면 조건을 취득해야 한다, 가르칩니다. 구원 받을 자격이 구원 받고, 사랑 받을 자격이 사랑 받고, 용서 받을 자격이 있어야 용서 받는다! 인간 본성인 권선징악의 심리에 부합하는 구원관입니다.
기독교는 구원을 인간 자신에게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가 구원을 받았다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랑을 나는 어떻게 해서 받았나, 하는 것입니다. 사랑도 받을 뭔가 있어야하지 않겠어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그냥~입니다. 말은 ‘그냥’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무조건적으로 만들어 조건 없이 내게 흘러오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동인(動因)이 없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입니다(롬5:8, 10).
바울이 이런 원리를 깨닫고 평생 은혜의 사람이 됩니다. 그는 은혜를 알았고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행13:43), 은혜를 전했고, 은혜 안에서 살았습니다. 10절의 고백이 그런 것입니다.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은혜가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내가 오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얼마나 못된 사람입니까? 교인들을 잡아가두고 핍박하는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랬던 자신이 이제는 복음을 알게 되고 교회를 위해 핍박을 받는 사람이 되었으니 이렇게 주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180도 돌아서게 되었으니, 과분하게도 사도의 신분이 되었으니 얼마나 큰 은혜냐는 것입니다.
“내가 한 일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바울이 얼마나 많은 일을 했습니까? 선교사로, 성경 저작자로, 교회 개척자로, 사람들을 세우는 교사로… 대단한 업적입니다. 유대교에 있었다면 율법의 1인자는 될 수 있어도 이렇게 엄청난 사역자가 될 수는 없었겠지요. 그러니 얼마나 큰 축복이며 은혜냐는 것입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어도 그 은혜를 우습게 알고 소비해 버렸다면 어리석은 행동 아닙니까? 그래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큰 은혜인가, 바울은 이렇게 입만 열면 은혜를 말하는 ‘은혜’ 예찬자입니다. 효자효녀들이 부모님이 은혜라 늘 말하듯이 신자들도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믿게 되면 저절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 입에 붙고 살 것입니다. 그만큼 은혜는 기독교 최고의 단어이면서 기독교의 브랜드입니다.
필립 얀시도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서 은혜를 ‘마지막 최고의 단어’라 합니다. 단어들도 오래되다보면 고기가 상하듯이 변질됩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도 변질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 사랑의 변질 아닐까요? 스토킹, 불륜도 사랑이고 동성애도 사랑입니다. 상해버린 사랑입니다.
용서는 어떤가요? 용서도 그만한 대가를 치를 때, 우리 편일 때 그 용서는 쉽습니다. 그러니 용서라는 단어도 변질됩니다. 평화라는 단어는 어떻습니까? 세계 경찰이라 자임하는 미국도 아프간에서 평화를 말하고 탈레반도 평화를 위한다고 합니다. 평화라는 단어가 상대방에게는 파괴와 살육이라면 그게 어떻게 상한 단어가 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은혜’는 다릅니다. 은혜는 조건이 없습니다. 대상을 따지지 않습니다. 살인자이든 사형수이든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갑니다. 죄인 괴수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내려가도록 하는 원동력이 은혜입니다. 은혜는 자격 없는 자들에게 값없이 거저 옵니다. 회개하고 몸부림 쳐야 마지못해 은혜를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먼저 찾아오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며 사랑으로 모든 것을 품으십니다. 은혜의 힘입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숨었습니다. 그들은 선행으로 나오지도 않고 용서해 달라고 애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두려움으로 숨어버린 것입니다. 사랑을 받을 대상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그들은 일종의 반역자들입니다. 당연히 처단만 있습니다. 원수와 같은 상태에 있는 죄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냥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여자의 후손에 관한 예언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실패했지만 그들 자손이 그들을 회복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들에 대한 용서와 자손을 통한 구원과 에덴 복귀-이것이 은혜입니다. 값없이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냥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있어 찾아오심도 용서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의 시혜(施惠-은혜를 베품), 호의(好意. 친절한 마음. 좋게 생각해주는 마음씨)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현장에서 범죄사실이 드러난 여인이 용서를 받았습니다. 삭개오가 주님의 은혜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비유이지만,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은혜를 입어 다시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지만 은혜를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나온 모든 이야기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은혜의 책’이고 성경을 기반으로 하는 기독교는 당연히 은혜의 기독교입니다. 루이스는 그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교회는 왜 있는 것입니까? 바울이 말합니다.
사도행전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도록 세움을 받은 기관입니다. 필립 얀시는 말합니다.
“웬만한 일에는 세상도 교회 못지않게 교회보다 낫다. 집을 지어주고 가난한 자를 먹여주고 아픈 사람을 고쳐주는 일은 굳이 교인이 아니어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이 못하는 일이 하나 있다. 세상은 은혜를 베풀 수 없다.”
오직 교회만이 은혜를 보관하고 있고 그 은혜를 전해주는 기관이라는 것입니다. 은혜의 기관이라면 다른 것은 조금 모자라도 은혜만큼은 교회가 가득 저장해 두어야 합니다. 주유소의 기름은 주유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하의 기름저장소에 있습니다. 지하저장소에 기름이 들어있지 않다면 말만 주유소이지 자동차에 에너지를 공급해 줄 수 없습니다. 주유소를 대표하는 것은 기름, 좋은 기름, 풍성한 기름이지 건물도 아니고 서비스로 주는 답례품도 아닙니다.
교회는 이처럼 다른 어떤 것보다 은혜가 잔득 보관해 있어야 합니다. 은혜가 부족하면 세상이 은혜를 받을 곳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은혜라는 단어는 ‘카리스’로 ‘기쁘다’ ‘즐겁다’라는 의미입니다. 받으니 너무 기쁘고 누리니 너무 즐거운 것이 은혜의 신분이요 은혜의 삶입니다. 은혜의 기관 교회! 하면 누구나 기쁘고 행복하고 즐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은혜라는 단어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기쁨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근엄함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교회란 잘못을 청산한 후에 가는 곳이지 있는 모습 그대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은혜보다 도덕이 먼저이고 반듯함이 먼저입니다. 그래야 은혜를 받는다 생각합니다.
얼마나 잘못된 생각입니까? 병원은 병을 고치기 위해 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영혼치료, 영혼구원이 있다면 병원에는 마음치료, 육신치료가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환자가 치료를 받고 병원에 가겠다고 하면 앞뒤가 안 맞는 것입니다. 병원에 깔끔한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만 있으면 되겠습니까? 건강한 행정팀만 있으면 되겠습니까? 환자가 왔다고 해서 얼굴을 찌푸리고 어떤 병에 걸렸다고 수군거리면 되겠습니까? 당연히 안 됩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런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은혜 저장 통에 은혜가 간당간당합니다. 예배에 은혜가 마르고 있습니다. 예배에서 은혜를 받지 못하니 성도들은 은혜 안에 거하지 못하고 보이는 그대로 선택하고 물들어 버리고 공격적입니다.
이런 교회를 가리켜 비(非)은혜의 교회라 합니다. 마음에도 은혜가 없고 눈에도 은혜가 없고 그래서 종교집단화 된 교회!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라 하지 않고 자격을 갖춘 후에 나오라 합니다. 그러면서 과거의 행적들을 조금도 묻어주거나 품어주려 하지 않습니다. 요즘 정치가들이 하는 못난 짓들을 교회에서는 종교윤리로 그런 은혜스럽지 못한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들은 잘못된 교리를 따릅니다. 은혜 안에 거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고 더욱 더 일과 봉사와 선행에 매달립니다. 이것이 해로운 종교 중독입니다.
교회개혁을 말할 때 그 어떤 것보다 교회 안에 있는 비은혜들을 뽑아내야 합니다. 비은혜의 믿음, 비은혜의 신학, 비은혜의 마음, 비은혜의 시선, 비은혜의 율법… 이런 것들을 교회 안에서 개혁해서 은혜의 교회로 만들어 내야합니다.
은퇴하신 목사님들의 공통적인 은퇴 소감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입니다. 그래요! 저도 갈수록 은혜라는 단어가 좋습니다. 많이 살다보니 옛날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좋았는데 이제는 은혜라는 단어가 너무 좋습니다. 돌아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도 좋지만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여러분들을 만나게 된 것! 우리 늘빛교회가 이만큼 성장하게 된 것! 좋은 분들과 분란 없이 오늘에 이르게 된 것! 결혼해서 두 아들을 얻게 되고 그 가정을 얻게 되고 손자들을 얻게 된 것! 많은 책을 집필하게 된 것~ 노회에서 사랑을 받으면서 목사님들과 장로님들과 친교를 나누게 된 것들!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표현도 좋지만 하나님의 은혜라는 표현이 참 좋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면 기뻐서 웃음이 나오고 ‘하나님의 은혜’하면, 고마워서 눈물이 나옵니다. 그만큼 은혜가 주는 단어는 황송과 감사와 고마움입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찬301장). 그래서 이런 복음송 가사가 참 좋습니다. (설교자가 부르거나 찬송 영상 보여준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호흡마저도 다 주의 것이니
세상 평안과 위로 내게 없어도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크신 계획 다 볼 수도 없고 작은 고난에 지쳐도
주께 묶인 나의 모든 삶 버티고 견디게 하시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나의 모든 것 다 주께 맡기니
참된 평안과 위로 내게 주신 주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결론
구약의 요엘 선지자는 성전에서 기쁨과 즐거움이 끊어졌다(욜1:16), 그래서 사람들의 즐거움이 말라버렸다(12절) 탄식합니다. 필립 얀시는 ‘하나님, 은혜가 사라졌어요’라는 책을 쓰고 은혜가 말라버린 교회, 은혜 안에 거하지 못하는 신자들을 겨냥합니다. 코로나시대에 사라진 것은 웃음과 교회 밥만 아니라 우리 마음에 그윽했던 하나님의 은혜, 그 은혜들을 서로에게 공급하던 은혜의 풍성함들입니다.
지금 운영을 그만 둔 주유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 때는 잘 나가던 주유소들입니다. 겉으로는 주유소이지만 그건 모양일 뿐입니다. 교회에 은혜가 말라버리면 더 이상 은혜의 기관이 아닙니다. 내 안에 은혜가 사라졌다면 은혜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코로나시대에 은혜를 교회 안에 채우는 사역들을 시작합시다. 그래서 은혜의 기관으로 바로 세웁시다! 첫 시작이 내 안에 은혜를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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