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가 이긴다(4)
비(非)은혜에 노출되다
창세기 6:5~8
서론
(2021년 9월 설교)
설교 때마다 징글징글한(?) ‘코로나’ 단어를 말하지 않으려 하지만 지금이 코로나터널을 지나는 중이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앞으로 인류는 코로나 이전 시대와 이후 시대로 나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의 탄생을 중심으로 탄생 이전 기원전, 탄생 이후 기원후로 나누었잖아요? 기원전 기원후 연대야 앞으로도 계속 가겠지만 인류의 혁명적인 변화는 코로나를 기준으로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코로나 이후, 세상은 변하고 인류의 삶도 전혀 다른 양식으로 변할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 이전의 우리 신앙이 코로나 이후에도 연속성이 있을까요? 코로나 이전의 신앙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돌아가는 게 쉽지 않고 대부분 식어있는 ‘왕년의’ 신앙으로 존재할 겁니다. 그러니까 알맹이는 사라진 채 껍데기로 남는 교회생활 예배생활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보수신앙을 꽉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보수신앙이 무언가요? 복음적이고 성경적인 신앙입니다. 성경 말씀 그대로 믿는 신앙입니다. 권장명령에는 적극 따르고 금지명령에는 넘어서지 않으면서 굳게 성경 중심의 믿음생활을 하는 신본주의가 보수신앙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이런 신앙을 뼈대처럼 간직하며 살아가시기를 부탁합니다.
본문도 코로나처럼 새로운 무대가 오르는 장면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창세기 6장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는지 함께 살펴봅니다.
본문은 대홍수 내용입니다. 인간의 죄가 관영하자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물청소하리라 작정하셨습니다. 인류 멸종 프로젝트인 셈입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에 직면하는가, 에덴에서 체결되었던 하나님의 은혜언약이 파기됩니다. 창세기 3:15 ‘여자의 후손’을 통한 구원의 약속은 은혜계약의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한 입으로 두 말씀을 못하십니다. 그런데 지금 인간세계의 상황은 손을 대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로 심각합니다. 죄의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5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죄의 가속화, 죄의 광역화, 죄의 과격성을 보여줍니다. 어느 한 군데 손을 보고 한 두 곳 수리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가장 심각한 것이…
5절,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인간이 어쩌다 악(惡)한 것이 아니라 ‘항상’ 악했습니다. 조직신학에서 말하는 ‘전적 부패’ ‘전적 무능력‘ 상태입니다. 음식이 쉬었는데 양념 넣어 새로 요리한다고 새 양식이 되나요? 사람이 죽었는데 화장하고 비싼 양복 입힌다고 사람 노릇할 수 있나요? 중국에 황허강, 황하(黃河) 강이 있습니다. 황토 같은 흙이 많아서 물의 색깔이 흙탕물처럼 흐립니다. 마시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목욕도 빨래도 못합니다. 수원지가 황토물인데 약품 뿌린다고 깨끗한 물이 나오나요? 안 되는 것입니다. 수도 없이 황토색 물이 나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항상 악한데 언제 선(善)이 나오겠으며 그 선으로 세상이 새로워집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예 물청소로 인류를 멸종시킬 생각입니다.
그러려니 딜레마가 생깁니다. 인간과 맺은 은혜언약은 사람이 원해서 체결된 것이 아닙니다. 심판의 처지에 있는 아담을 먼저 찾아오셔서 어떤 경우에도 죄로 다스리지 않고 은혜로 대해주겠다며 여자의 후손을 중매로 은혜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만약 인류를 대홍수로 멸종시킨다면 하나님 쪽에서 계약을 어기는 것이고 은혜언약이고 뭐고 없습니다. 계약은 쌍방 간에 체결되는 것입니다. 한쪽이 사망하면 계약도 파기되는 것이지요. 사람이 다 멸종해 버리면 행위계약이나 은혜계약이 모두 휴지조각입니다. 그렇다고 은혜언약대로 가면 세상이 악해져서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들어올 혈통이 막히고 맙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발동하는데 인간세상을 리셋~ 하는 것입니다. 리셋(reset)은 컴퓨터 시스템의 일부가 과열 현상을 일으켜 동작이 이상하게 되었을 때 누름으로 초기화 상태로 되돌려 놓는 장치입니다. 인간세상의 초기화 상태는 은혜언약을 맺을 때의 그 상태입니다. 그 상태로 돌아가 은혜언약의 내용은 유지하되 사람을 바꾸는 것입니다. 은혜언약의 갱신인 셈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언약을 유지할 대상을 찾았습니다. 노아입니다. 노아의 어떤 점이 계약당사자가 되게 했을까요?
9절,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의인이요…’. 히브리어로 ‘차디크’라 하는데 ‘의로운’, ‘공정한’ ‘곧다’, ‘올바르게 행하다’로, 그렇다고 전혀 무죄하거나 흠이 없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시대적 상황에서 그래도 경건하고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전 7:20).
그 노아의 의가 ‘당대에 완전한 자라…’ 하나님 앞에서의 완전이 아니라 ‘당대에’ ‘그의 동시대 사람들 가운데’ 비교적 완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절대적 의가 아니라 사람들과 비교에서 우월한 상대적 완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하나님이 의(義)의 수준에 맞추려 계속 하나님을 따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아의 의로움, 완전함은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말씀과 더불어 동행하는 곧고 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하나님이 눈에 완전한 의인이 된 것은, 바로 8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하나님의 특별한 관리대상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에 타락한 세상에서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 하나님과 동행…” 할 수 있었습니다. 노아가 대단한 사람입니까?
여기 문장을 다시 봅시다.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면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노아에게 은혜를 입혀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옷을 입혀놓으시고 은혜로 보니 노아는 의인이요 안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 보인 것입니다. 노아의 죄들은 간과(看過)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의 눈은 노아를 의인으로 간주(看做) 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 은혜계약을 맺을 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바로 그런 것이었잖아요?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의 죄를 짓고 두려워 나무 밑에 숨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찾아가셔서 가죽옷을 지어 입힙니다(창3:21). 가죽 옷을 입으니 수치스럽다 생각한 부분이 감춰졌으며 그 가죽 옷은 짐승을 죽인 산물이기에 하나님께서 그 피를 보시고 죄가 있음에도 죄가 없는 것으로 간주(看做)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언약의 축복입니다.
동일하게, 노아에게도 은혜언약이 재갱신을 맺으면서 은혜를 입혀주셨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눈에는 은혜의 옷만이 보입니다. 은혜언약의 옷으로 노아의 모든 죄들이 가리워졌습니다. 그래서 노아를 볼 때 사랑스러워졌습니다.
노아가 은혜를 입었을 때, 노아에게도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의역하면, “노아는 하나님의 눈에서 사랑을 발견하였더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겠다, 하십니다. 얼마나 무서운 눈입니까? 진노의 눈이요 노를 품고 있는 눈이요 모든 생물을 쓰러버리겠다는 심판의 눈입니다. 살인자가 재판정에서 판사의 눈이 얼마나 무섭겠어요? 판사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로 사형인가, 무기징역인가? 결정납니다. 죽느냐 사느냐? 숨 막히는 순간입니다. 죄수의 가족들, 변호사마저 재판관의 눈에서 무서운 심판과 진노를 보는데 살인자는 죄가 큼에도 재판관의 눈에서 사랑을 보았습니다.
“네가 어쩌다가 그런 죄를 지었느냐?”
재판관의 눈에서 사랑을 발견하는 순간 살인자의 마음에는 ‘아, 이제 살았구나. 내 목숨은 연장되겠구나...’ 그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재판관의 눈에서 사랑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입은 노아는 하나님이 명령에 순종하여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습니다. 얼마나 무모한 짓입니까? 뭐한 말로, 하나님께서 개고생 시키는 것 아닙니까? 얼마나 무모한 일입니까? 그러나 남들이 뭐라던 노아는 묵묵히 방주를 만들며 대홍수 심판을 전하며 잘 감당했습니다. 은혜를 입었기에 그리 행할 수 있었습니다.
방주 안에서도 1년 이상을 견디었습니다. 대홍수로 세상은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짐승들은 소리 지르지… 스트레스도 이런 스트레스가 없습니다. 그래도 가족들끼리 화목하게 잘 견디어 냈습니다. 은혜를 입었기에 그리 행할 수 있었습니다. 은혜의 힘은 이렇게도 큰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이 은혜에서 벗어나면 인간 본성이 나옵니다.
노아의 노년이 실수는 은혜 밖으로 나갔을 때 의인이었던 사람이 어떻게 되나, 보여줍니다.
9장 20절, 노아가 농사를 지었더니… 포도를 수확하고 그걸 마시고 취하였습니다. 만취입니다. 얼굴과 몸이 화끈거려 옷을 벗어버렸습니다. 벌거벗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옷을 벗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술이 만취는 지성과 이성과 경건성은 없이 100% 인간성의 지배를 받게됩니다. 은혜 밖으로 나가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사달이 일어납니다. 함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구경거리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를 알게 된 노아는 함에게 저주를 퍼붓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걸 없애려고 물청소 하시고 노아가족을 선별하여 구원했는데 한 세대도 지나지 못하고 죄의 웅덩이가 고인 것입니다. 은혜로웠던 가족들은 이처럼 비은혜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계약을 체결합니다. 인간세상이 어떠한 죄에도 물로는 두 번 다시 심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증표로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노아와 맺은 언약의 재갱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죄에도 멸망으로 심판하지 않고 은혜로 대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계약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한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결론
바울과 바나바는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초신자들에게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행13:43) 권합니다. 은혜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가 되었습니다. 120년 방주를 잘 건축했습니다. 1년 이상 방주 안에서 잘 견디어 냈습니다. 은혜 안에서 이렇게 살다 갔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술에 취해 은혜의 옷을 벗어버렸고 은혜의 안전핀을 빼버렸습니다. 은혜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그는 사랑스런 자식을 저주하는 비(非)은혜의 아버지가 되고 만 것입니다.
사람은 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자기본성이 드러나고 자기중심의 악한 계획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은혜 안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로 순간, 순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함께 찬양합시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호흡마저도 다 주의 것이니 세상 평안과 위로 내게 없어도 오직 예수뿐이네. …”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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