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십자가를 자랑한다!
갈라디아서 6:11~14
서론
사람마다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돈 자랑, 명예자랑, 자식 자랑, 상(賞) 자랑, 얼굴 자랑… 등등입니다. 교회에 와서만큼은 이런 자랑질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자랑질은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 들어온 유대인들이 아직도 율법행위를 자랑합니다. 할례(모태신앙?), 1주일에 2회 금식, 하루 3차 기도, 자선 행위… 등등, 바울은 이와 같은 율법종교에 맞서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물론 바울은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입니다.
혈통-순혈(純血) 유대인입니다. 신라시대의 성골 진골에서 성골입니다.
학식-당대의 석학 가말리엘 문하생입니다. 최고의 엘리트 계층입니다.
당파(黨派)-바리새인입니다. 6천 명 정도가 되는데 최상류층의 유대 패밀리(family)입니다.
로마시민권-온갖 특권을 보장해주는 멤버십 카드입니다.
유대사회에서 4개의 특권을 동시에 지녔으면 금수저 중의 금수저, 최고의 특권층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3:8에서 이 모든 특권을 모두 소유했었지만 이 모든 특권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합니다. ‘배설물’의 헬라어 뜻은 개에게 던지는 ‘음식 찌꺼기’이지만 사실 ‘똥’입니다. 자랑거리가 되던 모든 것을 똥으로 취급한다! 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에.
이는, 반딧불이 희미한 자기 빛이 최고인 줄 알고 야밤에 뽐내다가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니 그게 너무 강렬해서 나뭇잎 속에 숨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장난감 악기를 갖고 놀다 진짜 악기를 만났을 때 애지중지하던 장난감 악기를 미련 두지 않고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큰 빛이 오니 작은 빛은 아무 것도 아니요 진짜 악기를 만나니 장난감 악기는 곁에 두기도 민망할 정도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고상하여 이전에 알던 모든 것들을 ‘개똥’으로 알고 미련 없이 버렸다는 바울의 고백은 예수님을 만난 후 이전의 삶에 대해 얼마나 철저하게 버리고 단교를 했는가를 보여줍니다.
14절,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바울에게 십자가가 얼마나 강렬하고 충격적이었으면 모든 걸 버렸다는 이런 격한 표현을 할까요?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구원)
당시 십자가는 흉물입니다. 최악의 범법자를 처형하는 형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린다면 그 가문은 두고두고 수치를 달고 살아야 합니다.
헬라인:지혜를 구하는 그들에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교주로 믿는 것은 이해가 안 되고 창피한 일입니다. 이아무개 교주를 추앙하는 신천지 사람들이 어리석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유대인:이적을 선호합니다. 이들에게 십자가에서 아무런 기적도 보이지 못한 사람을 메시아로 추앙하는 이들은 한심한 자들이요 유대민족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로마인:법을 중시했기에 공화제가 발달했고 법으로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로마인들이 가장 악독한 형틀인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을 구원의 주로 섬기니… 얼마나 웃깁니까, 그래서 로마인들과 헬라인, 유대인들은 모두 그리스도인들을 경멸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바울은 담대히 외칩니다. 고린도전서 1장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22~24절)
18절에서는 더 명료하게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외칩니다. 십자가는 구원을 일으키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죄를 깨닫게 하는 능력입니다. 물론 율법도 죄를 알려줍니다. 그러나 율법은 윤리적인 죄를 지적합니다. 하나님께서 겨냥하시는 것은 신분자체의 죄입니다. 그것은 전가된 원죄입니다. 율법은 죄를 지적만 하지 없애주지는 못합니다. 거울이 하는 일과 같습니다. 이런 죄를 인식하게 하는 것은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는 죄를 인식하게 하고 그 피로 죄사함의 능력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예수님의 피를 보혈(寶血)이라 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가정해 보세요! 그 죽음은 우리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강도를 만나 칼에 찔려 죽었다거나 유대독립을 위해 싸우다 로마군대의 손에 피흘려 죽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피는 우리의 구원과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죄사함의 보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피였다면 결코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개인의 죽음, 사적인 죽음이 아닙니다. 우리 죄를 대신해서 달리셨고 죄들이 오물처럼 십자가에 부어졌습니다. 주님은 그 죄를 뒤집어쓰시고 피흘림과 함께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리고 죄는 무덤에 놔두고 깨끗한 의의 신분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 결과, 십자가의 피는 죄를 도말해 버렸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있는 구원의 능력을 알아보았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이 죄사함의 은총을 가져올 수 있기에 바울은 누가 뭐라던 십자가만 자랑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랑은 무엇인가요? 십자가에 앞에 서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명함 속에 들어있는 모든 명예들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받는 믿음이 됩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증표이기 때문입니다.(행복)
사람들끼리는 물건을 사고 나면 영수증을 주고받습니다. 약혼식 반지도 결혼을 전제로 하는 증표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영수증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최고의 걸작물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있습니다. 유일하게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물이요 걸작품이 타락한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죄인은 하나님과 대립하는 상대적인 존재입니다. 자신의 세계에 하나님의 존재가 들어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 인간성이 바로 죄인입니다.
인간은 형벌을 받고 지옥에 들어가게 될 운명이 되었습니다. 지옥은 원래 사탄을 위해 준비된 지하 감옥입니다.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낙원을 만들면서 왜 지옥까지 만들었느냐, 궁금해 합니다. 그건 모순이라는 것이지요! 지옥은 사람이 아니라 사단을 영원히 가두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사람들이 죄를 지어 지옥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집안에 쥐가 들끓어 쥐덫을 놓았습니다. 곳간 창고 앞에도, 마당에도 부엌에도, 마루 한 구석에도 쥐덫을 설치했습니다. 오직 쥐를 잡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장난질을 하다가 쥐덫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누구의 책임입니까? 아버지가 아니라 당연히 아들의 책임입니다. 아버지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첫 사람은 사탄이 범한 교만의 죄를 짓고 사탄을 따라 감옥에 갇히게 된 신세가 되었을 때도 하나님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독생자를 보내 인간을 구원하러 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라고, 합니다.
‘이처럼 사랑하사…’ 그 구체적 사랑의 내용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위한 형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계획 속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십자가를 보면 세상은 죄를 생각하고 끔찍하게 보지만 그리스도인의 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롬 5;8)하셨다고 합니다.
바울에게 있어 십자가는 사랑과 용서의 심벌입니다. 그리스도인을 잡아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어린 양의 희생 제물로 받으시고 세상을 용서하고 화해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화신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볼 때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사랑, 조건부가 없는 사랑, 한량없으신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 십자가가 있었기에 바울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수혜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성격적으로 굉장히 엄격한 성향입니다. 감성적인 면보다 지적인 면이 강했습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아 사랑의 기쁨을 누릴 대상도 기회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 바울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만납니다. 율법을 통해서나 학문을 통해서라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충만한 사랑이었고 애절한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 앞에서 바울은 꼬꾸라졌습니다. 십자가는 평생 하나님의 사랑의 반지가 되어 그의 가슴에 흔적으로 남겨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행복한 전도자로 살아가면서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아들의 목숨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을 끝까지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대상은 원수들입니다. 다른 아들을 살리기 위해 또 다른 아들을 죽이려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친구를 위해 죽은 사람은 있어도 원수를 위해 죽은 사람은 더 더욱 없습니다. 하나님은 원수를 위해 독생자를 내주셨습니다. 주님도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데 기꺼이 몸을 드렸습니다. 그 현장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정의를 찾고자 할 때에 사전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갈보리를 바라보아야 한다.”(존 스토트)
십자가는 죄의 심벌에서 사랑의 심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를 목에 걸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랑을 받고 산다는 것처럼 행복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십자가는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입니다.
십자가는 승리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용기)
바울은 왜 십자가를 사랑하는가? 그것은 능력의 근원이요 능력의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양면에서 굉장한 힘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심판을 막아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쉽게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총을 누리려면 하나님의 공의를 누군가, 그 누군가는 죄없는 존재가 대신해서 죽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야 합니다.
인간세상에서 의인은 없습니다. 인간들 중에서 십자가에 내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막아낼 사람은 없었습니다. 독생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오물을 가리고 전면에 나섰습니다. 그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죽으시는 ‘어린 양’입니다. 출애굽 때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을 때도 누구도 그 심판을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문설주의 어린 양의 피는 죽음의 사자를 뛰어넘게 했습니다. 어린 양의 피가 가려져 있어 하나님의 심판을 막아내고 넘길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보혈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게 합니다. 우리의 죄는 가려버리고 오직 예수님의 피만 보이게 합니다. 그 피로 우리는 죄사함을 얻고 심판을 면하게 됩니다. 그래서 보혈(寶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사단 마귀의 권세를 막아낸 힘입니다. 마귀가 소유한 최고의 무기는 사망 권세입니다. 사망권세로 모든 인류를 위협하고 지옥으로 몰아놓았습니다. 그런 권세로 예수님조차 죽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덤의 문을 열고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이는 마귀로부터 승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선언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요16:33)
이는 십자가의 승리를 전제로 합니다. 누구도 사망권세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십자가는 죄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죄의 문제는 사망의 문제와 해결됩니다. 의술은 죽음을 연장해주고 종교는 죽음의 두려움에서 어느 정도 위안과 침착함을 줄 뿐입니다. 그러나 어느 종교도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죄를 덜 짓게 할 뿐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죽음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런 해결이 바로 진정한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거기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율법의 요구, 사단의 요구를 다 이루셨기에 더 이상 율법의 요구, 사단의 요구에 절절 맬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의 장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외칩니다.
이런 연유로 바울은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십자가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고 평생을 지고 갔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이요 행복이요 힘이었기 때문입니다.
장수 거북이를 최장수 동물이라 합니다. 5천년 된 거북이를 신귀(神龜), 1만년 된 거북이를 영귀(靈龜)라고 합니다. 장수하는 이유는 무겁고 딱딱한 등을 평생 짊어지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거북이는 바로 그 등껍질 때문에 평생을 느리게 힘들게 삽니다. 토끼에게도 져서 ‘느림보’라고 놀림의 대상이 됩니다. 토끼나 노루는 서너 시간이면 갈 것은 3,4일을 걸려서 도착하는 수고를 합니다. 무거운 등껍질을 이고 가느라 참 힘들게 삽니다. 그러나 무거운 그 등껍질 때문에 장수무대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영생의 존재가 되는 것은 십자가 안에 우리를 숨기고 힘든 십자가를 지고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바울처럼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결론
서울시는 십자가 종탑에 관한 전면조사에 나섰습니다. 낙후된 십자가 종탑을 점검하고 철거비를 제공하겠다는 것입니다. 철거비만 제공하지 설치비에 대한 아무 보조도 없습니다. 서울시 보도자료에 의하면 서울시내에 7,919개의 교회가 있는데, 과연 교회 십자가 첨탑에 의한 안전사고가 얼마나 있었는가? 서울시 소방재난본부의 자료에 의하면, 최근 3년간 서울 시내에서의 태풍 피해 사례는 약 1,800건인데, 그 중에 교회의 십자가 첨탑 사고는 2건입니다. 좋게 생각하면 교인들과 시민들의 안전을 예방하겠다는 것이지만 요즘 세상이 교회에 대한 적대감을 볼 때 수도 없이 세워진 십자가를 줄이겠다는 것입니다. 눈에 거슬린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꼭 세상을 편드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한 번도 교회 편에 선 적이 없습니다. 동성애이든 평등법이든 차별금지법이든… 무슨 일이든 간에 세상 편을 섭니다. 이런 사람들이 언론에 나와서 십자가의 의미를 약화시킬 것입니다. 십자가가 예배당 밖으로 설치할 필요가 뭐가 있냐고 합니다.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면 된다고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말합니다. 세상이 넘어가고 성도님들이 솔깃합니다.
만약에 예배당 십자가 종탑들이 철거되고 교회 스스로 축소를 하거나 다른 문양(비둘기, 물고기) 등으로 교체된다면 그건 스스로 기독교를 포기하는 일입니다. 선인장에 가시가 찔린다고 없애고 장미꽃의 가시를 없앤다면 선인장과 장미꽃이 제대로 그 끈기 있는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보일 수 있습니까?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참된 기독교가 아닙니다.
십자가에는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사랑의 증표가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바울처럼 십자가를 자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세상이 교회에 대해 어찌하든 조금도 ‘쫄지’말고 다시 힘을 내어 십자가를 집시다! 십자가는 우리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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