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좋사오니, 예배가 되려면
마태복음 17:1~8
서론
교회의 4대 사명이 있습니다. 예배와 교육과 선교와 구제입니다. 특히 예배가 가장 앞자리에서 교육과 구제와 선교를 끌고 가야 합니다.(사43:21 참조). 만약 예배가 없거나 소홀히 하면서 교육, 구제, 선교를 한다면 그건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불로 드리는 제단 제사입니다. 아론 대제사장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이 명하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하다 현장에서 즉사합니다(레10:1-2,9). 제사는 제사였지만 하나님의 관심 밖에 있는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코로나시대에 예배가 위험 단계입니다. 예배의 우등생들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는 건강을 빌미로 예배를 공격하고 그동안 사단이 보여주었던 핍박, 박해, 무신론, 진화론에서 살아남았던 교회의 믿음을 거세게 흔들고 있습니다. 지금 신자들이 겪는 위험도는 대면, 비대면 예배 그 자체가 아니라 예배가 아닌데 예배로 착각하고 주일성수가 아닌데 주일성수라는 착각, 믿음의 열기가 식는데도 내 믿음이 단단하다 착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고 그건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예배의 위기이고 믿음의 위기입니다. 위기인 줄 몰라서 더욱 위기입니다. 착시현상 때문입니다.
1절, 엿새 후에…. 엿새 전에 어떤 사건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베드로에게 엿새 전의 그 사건은 영광과 수치라는 영욕(榮辱)의 양면성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으로 100점 맞아 어깨가 으쓱했고 십자가 없는 구속을 말했다가 0점으로 떨어졌습니다. 그것도, 아우들 앞에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16:23) 사탄 취급을 받았습니다. 일생일대의 실수요 수치입니다.
굳건한 반석이라던 베드로가 말 한 마디로 사탄의 졸개 취급을 받은 것입니다.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도 없고 예수님 옆에 있기도 민망합니다. 풀기도 열기도 없습니다. 열기는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는 통로요 초대교회를 끌고 가는 에너지입니다. 베드로에게 열기가 식어졌는데 무슨 힘으로 헌신하겠어요? 베드로에게 지난 엿새 동안은 죽을 맛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모른 척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비롯한 세 제자를 데리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아홉 제자는 남아있습니다.
1절, 높은 산… 학자들은 헬몬산이라 합니다. 2,850m 정도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힘든 산은 아닙니다. 예루살렘 자체가 해발 800미터입니다. 우리는 이 산을 헬몬산이라 하지 않고 ‘변화의 산’이라 합니다. 베드로가 특별한 체험을 통해 엿새 동안의 슬럼프를 벗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평생 헌신은 ‘쌩’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이 산에서 하나님의 불을 받았고 엿새간의 무기력과 죄책감과 수치심을 태워버리는 체험을 통해 이후에 열정적인 사역을 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월요일~토요일까지의 엿새는 바로 그런 시간들입니다. 영광도 있지만 수치도 실패도 실수도 있는 그런 주간들입니다. 이런 주간이 반복되면 누구든 거기에 함몰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일예배는 신자들에게 변화의 산이요, 신령한 은혜를 체험하는 은혜의 산이요, 하나님을 만나는 만남의 예배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명보다 예배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예배는 변화 산의 예배입니까? 가짜 불로 드리는 나답의 죽음의 예배입니까?
세 제자들은 어떤 일을 겪었기에 변화의 산입니까? 무슨 일이 있기에 올라갈 때 늘어졌던 발걸음이 하산 때는 힘차게 내려 올 수 있었나요? 예배생활이 그래야 되는 것은 아닙니까?
제자들이 올랐던 산은 변화를 받기에 장소가 좋았습니다. 우선, 높아서 좋았습니다. 1절,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높은 산에는 경외심이라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해발 800m 이상의 족장로(族長路)를 따라 이동했고 정상에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경건함을 유지했습니다.
신앙은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난 자들이고 시민권이 하늘에 있기에 땅으로 향하려는 본성의 지체를 죽이고 하늘의 신령한 은사들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변화가 되지 자꾸 불신앙으로 아래로 내려가면 믿음의 열기가 식어지고 세상에 휩쓸려 변질됩니다. 산에 올라간 제자들은 변화를 받았지만 아래에 있던 아홉제자는 세상 문제로 전전긍긍했습니다.
높은 산은 시야(視野)가 탁 트이고 넓어지면서 아무 것도 그 앞을 가리지 않으니까 변형된 예수님을 제대로 보았고 모세와 엘리야까지 보는 안목을 얻게 됩니다. 눈이 좋아진 것은 마음이 맑아졌기 때문입니다. 청결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 했으니 신령한 장면들이 보입니다. 높은 산은 하나님을 만나기가 얼마나 좋은가요? 욕심도 없고 마음은 맑고 세상 소음도 없으니 눈이 밝아지면서 하나님에 대해 영안이 열리며 변화를 입게 된 것입니다.
요즘 교회가 예배를 통해 지성소로 나가려 하기보다는 자꾸 하향평준화의 삶을 삽니다. 지성소의 예배가 아니라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유대인들의 뜰에서 예배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 장소는 주님을 제대로 만나고 체험하는 산제사가 아닙니다. 그러다보니 가인처럼 예배를 드리고 나서 미워하고 살인하고 죄를 엄폐하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무신의 뻔뻔함을 드러냅니다. 깊은 곳으로 나아가는 지성소의 대면예배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 제자들이 변화를 받은 것은 장소만 아니라 강사들도 좋았습니다. 3절, 모세는 율법의 수령자요 전수자입니다. 말씀 중심의 강사입니다. 엘리야는 예언자를 대표하면서 능력 전문사역가입니다. 말씀과 능력! 산 위 부흥집회에서 제대로 된 강사를 만난 것입니다.
베드로가 실패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았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라는 신분까지는 제대로 파악했는데 대속의 희생제물이라는 사실을 놓쳤습니다. 모세는 어린 양의 피가 없이는 죄사함도 없다는 율법의 핵심을 누누이 강조했고 엘리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습니다.
변화산상에서 세 분은 3절 ‘더불어’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세 사람의 나눔을 십자가를 앞에 두고 십자가를 통해서 어떻게 인간 구속을 이루어낼 것인가 하는 점을 의논했다 해석합니다. 베드로는 얼핏얼핏 들었을 것입니다. 제대로 이해는 못했지만 살아가면서 십자가 없는 구원사역을 제시했던 자신의 미련함을 회개하면서 더욱 십자가 복음을 앞세우게 되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산에서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도 보았습니다. 2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상황을 변화시키고 이적도 보였지만 주님 스스로 변형된 모습을 보이기는 처음입니다. 우리 주님은 눈부신 분입니다. 육체에 가려져 있었지만 하나님의 독생자였습니다. 변화산에서 그걸 본 것입니다.
그러니 엿새 전에 주님 앞에서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교육’에서 나온 것이라면 지금은 마음 깊은 곳에서 생생한 체험을 합니다. 나중에 제자들이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충성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이때의 변형된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목격했거나 목격담을 전해들었기 때문입니다.
산위에서 변형된 모습을 보았던 세 사람-야고보가 꿈도 펼치지 못하고 가장 먼저 순교할 수 있었던 것! 요한이 지옥 같은 밧모 섬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던 것! 베드로가 거꾸로 죽으면서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믿음보다 변화산상에서 보았던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 때문입니다. 그 모습이 너무도 황홀해서 우리도 조금만 참으면 그런 변형된 천국 백성이 된다는 기대감으로 순교의 그 끔찍한 시간들을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의 기대감이 있었기에 가룟 유다를 제외한 모두가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유다는 그런 이야기를 전해듣고도 세 제자가 '비몽사몽'간에 헛것을 보았다 일축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여기다 세 제자들은 하나님의 음성까지 들었습니다.
5절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이때의 하나님의 음성은 영원히 잊지 못할 신비한 목소리였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도 사라지고 변형된 예수님의 모습도 희미해졌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갈수록 더욱 또렷해졌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힘입니다. 그래서 훗날 베드로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벧후1:16~18) 회상 할 정도로 생생하고 간직해서 삽니다.
이런 음성을 들었기에 제자들은 확신을 품고 산 아래로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올라 갈 때의 풀죽은 모습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최고의 영웅 모세와 엘리야를 만난 저희들은 얼마나 용기백배할까요?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에 얼마나 황홀하고 감동을 품고 있을까요? 이것이 지성소까지 들어가서 드리는 예배요, 대면예배에서 받을 수 있는 변화의 은혜입니다. 이런 예배가 예배의 참 맛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이 예배가 속히 회복되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유튜브에서 보았다면서 이런 글을 보내왔습니다.
<휴대폰도 배터리를 충전하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충전해야 합니다. 휴대폰은 꺼질까봐 보조 배터리까지 들고 다니면서 마음은 왜 미리 충전하지 않을까요. 자동차가 움직이려면 기름을 넣어야 하고… 보일러 돌리려면 물을 보충하고 샤프를 쓰려면 샤프심을 넣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쓰기만 하면 안 됩니다. 쓴 만큼 채워줘야 합니다. 중간 중간에 채워주지 않으면 모든 게 다 꺼져 버립니다.>
신자들에게 믿음의 활력이라는 배터리 충전은 예배당에서, 공동체예배에서, 산위의 변화가 되는 예배에서 충전해야 하는데 오늘 우리는 산 정상으로 올라가 대면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산 아래 있었던 아홉 명의 다른 제자들처럼 비대면예배의 신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를 대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율법의 핵심이 무엇인지, 메시야 사역이 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을 대면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니 예배를 통한 변화가 무엇인지 복음이 일으키는 변화가 무엇인지 제대로 모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대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하늘의 영음(靈音)을 듣지 못하고 세상의 소음(騷音)만 듣다보니 신령했던 신자들이 세속화된 신자들로 변질되고 본인 자신들이 또 그걸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15, 16절 간질로 고생하는 아이를 앞에 두고 안절부절 중입니다. 예배 통해 변화의 힘을 공급받지 못하니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변질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대면 예배의 약점입니다.
<결론>
다시 4단계의 상황이 2주 연장됩니다. 금년에만 벌써 14번째입니다. 거리두기가 연장되면서세상은 위험하다고 자꾸 비대면예배를 드리라 합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 많은 사람들이 소위 비대면예배를 드리지만 영상예배는 예배당예배, 공동체예배를 대체하거나 공존할 '진정과 신령한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변화 산의 예배가 아닙니다. 그 예배는 관람은 하지만 대면과 체험의 예배는 아닙니다. 텔레비전 속의 음식이 우리의 음식이 됩니까? 종이호랑이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그것은 형체일 뿐이요 그림자일 뿐입니다. 변화 산의 아래에서 멀리 관람만 하고 있던 아홉 명 제자들의 사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변화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몇 주간 주일을 쪼개서 7부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를 드리고나니 다음 날 발등이 부었습니다. 이번 주일에 모임 숫자가 조금 늘어났기에 그래도 여섯 번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합니다. 그렇게 하면서라도 예배에 대한 중요성을 신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지금은 예배계엄령 치하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힘들고 눈치를 보게되고 자칫 벌금까지 받습니다. 충북 제천의 농촌교회는 예배당에 노인 8명 모였다고 벌금 100만원을 물게 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교인들까지 예배구경자로 전락합니다. 이건 아닙니다. 세상이 뭐라 해도 예배당에 나와 공동체예배에서 변화산의 체험들을 할 때 우리 믿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지 비대면예배, 가정예배로 주저 앉아버린다면 세상이 우리를 변질시키고 말 겁니다. 두렵지도 않습니까? 우리 자녀들도 그런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설교노트]
본 설교를 하면서 지나치게 영상예배(비대면예배)를 비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비대면예배란 단어 자체를 쉽게 수용 못하지만 교계에는 그 자체를 인정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기독신문 기사
<...다만 코로나19 사태 초기와 비교해 온라인예배가 하나의 예배 형태로 자리잡으면서 ‘현장 예배’ 만족도(89.4%)와 비슷한 수준(83.2%)을 보였다는 점은 주목할만 하다. 실제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오프라인에서 가끔 모임을 갖는 형태의 ‘온라인교회’가 있다면 참여할 의향이 있는지 조사한 결과, 절반 가량(48.4%)이 참여할 의향이 ‘있다’고 응답했다.
(중략)
일반 성도들의 인식 변화를 분석한 정재영 교수(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는 “온라인예배가 주일예배로서 안정화되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라면서도 “온라인예배를 형식적으로 드리는 경향이 있고, 현장 예배를 드리는 경우에 신앙을 더 잘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코로나시기에 온라인예배와 현장예배의 상호보완적 운영이 관건”이라고 진단했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2021.08.17 09:06
[말씀닷컴]
목회 현장에 없는 교수님들의 “온라인예배가 주일예배로서 안정화되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라는 시각은 작은 교회에 대해 전혀 배려하지 않는 평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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