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가 이긴다!(3)
언약 속에 있는 은혜
창세기3:15~21
여기(예배당 공동체예배) 나온 우리 성도님들! 가정에서 예배드리는 성도님들! 아까 찬양 중에‘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그 찬양을 들으면서 마음속에 약간 흔들림이 왔어요. 더욱 사랑? 아니에요. ‘다시 사랑’. 우리는 더욱 사랑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이 가라 앉아버렸어요. 열정도 이제는 다시 사랑을 시작하자고요. 주님을 향한 사랑, 교회를 향한 사랑, 예배를 향한 사랑.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기를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지난번에 말씀 드렸지만, 은혜의 설교를 하면서 ‘성경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557회 나온다.’ ‘은혜 라는 단어는 291회가 나온다.’ 그런 말씀을 드렸어요. 참 많이 나오는 거죠. 이번에 ‘언약’이라는 설교를 하면서 ‘언약’이라는 단어를 검색했더니 289회가 나와요. ‘은혜’ 라는 단어하고 몇 번 차이가 있을 뿐 있지 상당히 ‘언약’이라는 단어도 많이 나와요.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가 그런 말을 했어요.
‘당신 누구냐, 나는 누구냐.’ 당신을 알고 싶다면 오늘 하루 종일 당신이 쓰는 말 중에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당신을 보여 준다. 그런 이야기예요. 어떤 사람은 맨날 “아이고 죽겠네 죽겠네” 그래요. 맨날 그런 분이죠. 어떤 사람을 “아이 짜증나 짜증나” 그래요. 어떤 사람은 늘 비판이에요. 계속 비판하고 또 비판하고. 그게 바로 우리라는 거예요.
오늘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저 하루 살고 그냥 이렇게 텔레비전 보고 잠자리에 들고 그러지 말고,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나를 살핀다. 하나님의 물에 나를 씻는다. 하나님의 저울에 나를 달아 본다.’ 그게 유대인들의 기도관입니다. 저녁에 내가 오늘 어떤 말을 많이 썼는가, 어떤 단어를 많이 사용 했는가, 그것이 나다 생각하고 ‘하나님 그런 좋은 말을 많이 쓰게 해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하시고, 어떤 경우에는 ‘아 내가 왜 이렇게 남을 공격하고 비방하고 험하고, 왜 이런 말들만 많이 썼는가. 왜 이렇게 비은혜적인 언어들만을 많이 사용했는가. 하나님 죄송합니다, 오늘 씻어주시고 도말 하시고 또 내일부터는 은혜적인 말을 많이 사용하도록 저를 주님 도와주세요. 성령님 저를 도와주세요.’
이래야 우리가 하루 하고 살아가면서 성숙하고 1년마다 생일을 맞을 때마다 ‘하나님 작년 생일, 그리고 지금 생일 이렇게 저렇게 달라지게 해 주셔서 주님 찬양합니다’ 그게 진정한 생일맞이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해요
오늘 이 성경책에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많이 나오고 있다면, 성경과 기독교는 사랑의 책이요, 사랑의 종교에요. 그리고 은혜의 책이요, 은혜의 종교에요. 그리고 뿐만 아니라 언약의 책이요, 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계약장부’다. 그렇게 말씀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구약하고 신약할 때 ‘약’이 바로 ‘약속’이에요. 이 약속은 다른 말로 말하면 ‘계약’이고 그리고 ‘언약’ 입니다.
‘계약’은 뭘까요. 쌍방이 있어야 하잖아요. 너하고 나하고 쌍방에 있어서 서로 어떤 문제를 놓고 계약하고 그 계약에 근거해서 이를 치러나가는 것이 바로 계약이고 계약서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맺어진 계약이 있는데요. 이 성경의 289회나 계약, 언약이라는 이런 말이 계속 나왔지만 그 많은 단어를 너를 둘로 나눌 수가 있어요.
우리가 십계명도 그러잖아요. 십계명도 두 돌비로 나누잖아요. 한 돌비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경배’, 한 돌비에는 ‘인간들을 위한 우리의 책임’ 2개가 함께 가는 거예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맺어진 언약, 계약, 약속도 마찬가지에요.‘행위 언약’이라는 게 있구요, ‘은혜언약’이라는 게 있어요.
‘행위 언약’은 말 그대로 행위를 조건으로 담보로 해서 하나님하고 나하고 체결된 언약을 말하는 거구요, ‘은혜’라는 것은 무슨 담보니 담보물이니 그게 없어요. 그냥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겠다, 사랑해 주시겠다. 회복시켜 주시겠다 계약을 체결해 주시는 것이 바로 ‘은혜 계약’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위계약’하면은 아 여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고 엄격한 하나님,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어떤 임무와 또 요구만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니에요. ‘행위 계약’은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것이고 ‘은혜계약’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근거한 겁니다. 전부 좋은 거예요. 행위계약이 우리를 망치려고 시험하려고 맺은게 아니구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니까요.
왜 그럴까요? 우리 첫 사람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아시다시피 우리는 육체와 영원이라는 두 구성이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흙으로 우리를 만드시고, 하나님께 생기를 후하게 불어넣어 주시니 우리가 생령이 된지라. 생령은 생물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영적인 영물이 될 수도 있는 거예요. 우리 에덴동산에서 그렇게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어요.
영혼이야 천년만년 살아도 늙거나 쇠하나 그런 게 없어요. 우리의 영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하나님의 영처럼 동일하거든요. 문제는 우리의 육체에요. 흙으로 만들어진 우리의 육체는 생체적인 리듬을 갖고 있어요. 생체적인 리듬이라는 것은 자연의 원리를 따라서요 점점 젊어져가고 늙어가고 노쇠하고.. 물론 그때 죽음이라는 건 없었어요.
처음부터 인간이 죽도록 고안된 건 아니었습니다. 죽음은 없어요. 그렇다고 영생할 수 있는 그런 존재도 우리에게는 없었어요. 그렇지만은 흙으로 만들어진 육체이기 때문에 우리가 백년 살고 천년 살고 만년 살고 10만년 살아요, 그럼 에덴동산에서 죽음은 없고 사람은 계속 태어나니까 꽉 차요. 지구상에 꽉 차요. 죽고 싶어도 죽지를 못해요 그럼 그게 사람이냐구요.
늙어가기는 할 텐데 10만 년 된 사람이 아니고 10만년 된 동물이고. 20만 년 된 동물인간이고. 그러다보니 인간의 존엄성이 어디 있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빛나는 존재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 인간들을 사랑하시니까, 저렇게 늙어가고 저런 인생이 계속 지루하게 이어져 갈 수는 없는 게 아닌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떻게 해 줄 건가 그걸 생각했어요.
하나님이 눈에 딱 보니까, 인간에게는 동물에게도 없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자유 의지’였어요. 동물에게는 자유의지가 없어요. 그냥 본능 본성만 있어요. 추우면 춥다, 더우면 덥다, 배고프면 으르렁거리고, 더 먹기 위에서 할퀴고 싸우고 배부르면 만족하고 자고 싸고 그리고 다음날 일어나면 그렇게 반복해요. 어느 거를 선택하느냐, 물론 어느 거를 잡아먹느냐에 대한 건 본능적인 본성이고요, 그게 뭔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는 아니었어요.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있는 이 특별한 성징, ‘자유의지’를 보시고 이 자유의지를 통하여서 나와 같은 신적인 존재. 나는 아니지만 꼭 신은 아니지만은 우리가 ‘종’ 이란 게 있잖아요.
같은 식물에도 무슨 종, 무슨 종, 무슨 종. 동물에도 무슨 종, 무슨 종, 무슨 종. 인간에게도 진화론 쪽으로 말하면 무슨 종, 무슨 종, 무슨 종. 하는 것처럼 영적인 존재 에서도, 아 하나님은 아니로되 하나님과 방불한 그런 신적인 존재로 우리를 세워놓으면, 우리는 어느 순간에 시간 밖으로 나가서 천 년 만 년 살아도 전혀 그 육체가 항상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 그런 멋진 존재로 하나님께서 우리 자유의지를 통하여서 우리를 그렇게 세워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 하고 계약을 맺으신 거예요. 그게 행위 계약입니다.
행위계약이라는 건 행위를 담보로 맺은 거예요. 그 행위가 어떤 행위냐, 그게 순종이에요. 너희가 순종을 선택할 수도 있고 불순종을 선택할 수도 있다, 자유의지로 너희가 만약에 순종을 선택하면 나와 같은 성품으로 올라설 수 있을 것이고 그러나 너희들이 자유의지로 불순종, 이 명령을 어기는 불순종을 선택하면은, 너희들은 저 지옥으로 간다….
사실 지옥은 인간에게 해당 안 되는 영역이에요. 지옥은 범죄한 천사, 사탄 들을 가두기 위해서 고안된 거지. 처음부터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진 그런 지옥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위계약을 맺었습니다. 순종을 기준으로 해서. 그럼 그 순종을 무엇으로 표현하냐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했다 아니에요 선악과는 하나님의 행위 계약의 중심이 아니에요. 만약에 이 선악과가 ‘행위 계약’에 중심이면요. 그건 하나님의 작전에 우리가 걸려든 거예요. 행위 계약을 맺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볼 수가 없는 거죠.
행위 계약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 뭐냐, ‘생명과’에요. ‘생명과’. 이 중심은 선악과가 아니고요, 이 중심은 생명과에요. 생명과.
2장 보세요, 2장 9절에 말씀 보니까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게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라’.
생명나무를 따 먹으라는 거예요. 생명나무를 따먹으면 생명나무 열매 자체의 영생할 수 있는 그 효소가 있는건 아니지만, 생명나무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고 하나님과 계속 교제하고 연결을 나눔으로, 인간은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점점 ‘영성화’… 영성화하고 어느 순간에 육체 밖에서 하나님과 생활하는 그런 신적인 존재, 신적인 성품을 가진 그런 사람이 되는 거예요.
얼마나 인간에게 100% 유리한 거예요 이거는요. 이 계약 체결한 것만 보면요, 하나님 완전 손해예요. 인간 중심으로 해주는 거예요. 왜 인간 중심으로 해 주었는가 이 계약을 체결한 그 당시에는 인간은 범죄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죄성이 없어요. 죄성. 죄성이 없기 때문에 무조건 순종하도록 되어 있어요. 프로그램화 된거죠 인간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본심이 뭐냐, 우리를 사랑해 주셔 가지고 100% 우리를 업그레이드(upgrade) 시켜주시기 위해서 이런 계약을 맺은 겁니다. 죄성이 없으면 이건 우리는 100% 생명과를 따먹을 거예요. 뿐만 아니라 이제 생명과만 아니고요
16절에 말씀 보니까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다 먹으라는 거예요. 딱 하나, 17절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소위 ‘선악과만 따먹지 말라’ 이게 얼마나 유리한 거예요. 이게 드문드문 섞여 있고 50%, 50% 섞여있으면 이게 따 먹을 게 없다 보면 아니면 따먹다 보면 나도 모르게 선악과를 따먹을 수도 있지만은 그냥 모든 것을 다 먹어 라는 거예요.
영생을 위해서 생명과를 따 먹든지, 맛을 위해서, 육신을 위해서, 일반 과일을 따 먹을 때 다 따 먹고 저기에는 딱 하나, ‘선악과만 따먹지 말라’ 얼마나 세상 조건이 좋아요. 이거 따 먹을 필요가 없잖아요. 이렇게 많은 과일이 있는데… 이렇게 좋은 생명과가 있는데 하나님은 또 명령까지 있는데 왜 그걸 따 먹어요.
더 감사한 것은요, 하나님께서 이런 영생의 길을 보여 주시면서 아담하고 1:1로 계약을 맺은게 아니고 아담으로 하여금 온 인류를 대표해서 맺어준 거예요. 만약에 아담이 여기에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 후손들은요 덩달아 도매금으로 다 이런 축복을 누리는 거예요. 여기서 태어난 자손들은 전부 다 영생의 길로 나가도록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 사랑이 커요, 얼마나 감사한 일이에요.
더, 더 감사한 것은요, 선악과를 주셨다는 거예요. 이걸 잘 이해를 못하면, ‘하나님이 덫을 놓았다. 하나님 왜 선악과를 만들어 놓았나, 선악과가 없었다면 처음부터 이런 사달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에요. 선악과는요,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 있어요. 왜 사랑이냐.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잖아요. ‘따먹지 말라’ 이건 금지명령 이에요. 금지명령, 어떤 명령을 내렸다는 건 뭐예요. 명령은 누가 누구에게 내리는 거예요, 위에 사람이 밑에 사람한테 내리는 거거든요.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내리는 거거든요. 주인이 관리인에게 내리는 게 바로 금지 사항이고 명령 사항이잖아요.
오늘 선악과를 딱 볼 적마다 이 아담은 말이죠 ‘아 따 먹지 말라’ 누가? 하나님. 금지시키는 하나님이 계셔요. 명령 하시는 하나님이 계셔요. 그러면 나의 언제나 나의 포지션은, 나는 명령을 받는 사람이에요. 나는 금지를 당하는 사람이에요. 나는 순종을 해야 되는 사람이에요. 나는 여기 관리인에 불과하지, 나는 창조주가 될 수 없다는 거예요. 항상 자신의 위치, 자신의 포지션(position), 자신의 그 신분을 생각하는, 경고해주는 그리고 다시 한 번 확신 시켜 주는 게 바로 선악과예요.
선악과가 없었으면 문득 문득 살다보면 내가 창조주라고 착각하잖아요. 맨날 내 명령대로 하고 관리하고 그러다보면 내가 착각해서 ‘내가 창조주이지. 이제 내가 여기에 주인이지’ 이제 그렇게 교만 할 수도 있는데 그러다가도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도 선악과를 딱 보는 순간 ‘따먹지 마라 따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아 하나님이 금지 시켰어, 하나님이 명령하셨어. 예 하나님…. 그러니까 100% 순종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랑이 완벽하게 행위계약 안에 있는 거예요. 이것은 무조건요 순종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게 됐어요. 이게 이렇게 해서 자유의지, 자유선택을 하라는 게 아니에요. 이렇게 하나님이 만들어 놓아서 기울어진 운동장 을 만들어 놓고, 네가 이렇게 순종하면 내가 복을 줄게. 이건 100%, 아니 볼펜을 이렇게 놓고 이렇게 뒤집어지기를 기대합니까. 아 근데 참 이 사람이라는 게, 이렇게 해서 계약을 맺었는데 이게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아담이 선악과 이전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불순종의 표시로 선악과를 따먹고 이 쪽을 선택해 있죠. 자유의지로 이쪽을 선택한 거예요. 그리고 죄인이 된 거예요. ‘죄인’이라는 뜻은, 자리이탈 이에요. 신분 이탈이에요. 피조물이 자리에서 창조주의 자리로 이탈 하고자 하는 것이 이게 죄인인거에요. 관리자 입장에서 주인 노릇 쪽으로 그 이탈 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 죄인 거예요.
하나님의 천사장의 자리에 자기의 자기를 자기 위치를, 포지션을 넣어 버리고 하나님과 맞먹는 그런 자세로 마음을 먹고 자리 이탈한 것이 바로 그것이 죄인 거예요. 아담과 하와가 죄인이 된 거에요. 죄인이 된 그 순간에 급성으로 그가 어떤 죄의 항목에 걸린 게 아니고 불순종이라는 몇몇 항목에 걸린 게 아니고 신분 자체가 죄가 되어 버리고, 입만 열면 죄가 나오고 가면 갈수록 죄가 진화가 되고 죄가 광역화되고 나중에는 노아 때는 죄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만땅’. 관영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생각 자체가, 행동 자체가, 감정 자체가 죄로 가득 찬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이 로마서 1장 28절에 죄의 항목들이 20가지 정도가 쫘악 나와요. 거기 보면, 서로 이간질하는 죄, 탐욕, 탐심, 불효, 수군거리는 죄, 살인, 간음… 와~ 이게 이거 보면 우리가 원죄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짐승보세요. 짐승 그런 죄항목들이 없어요. 짐승은 본능적으로 포악하고 난폭하고 물어뜯고 그럴 뿐이지 수군수군거리고 이간질을 하고 모함을 하고 음모를 꾸미고.. 없어요.
인간이 그래... 인간이 왜 그러느냐. 죄로 꽉 찬 거예요. 죄로 꽉 차기 때문에 행위계약은 아직도 살아있어요. 아직도 살아있지만은 죄가 없는데도 행위계약에 실패를 해버렸는데 이렇게 죄가 있는 상태에서 이 행위계약으로 하나님 앞에 깨끗해지고 100% 순종해서 하나님의 기준에 합격이 되고 그래서 영생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도 없어요.
왜? 바울이 그러잖아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영생에 이르지 못한다. 하나님의 그 기준에 이르질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행위계약은 지금도 유효해요. 그러나 그 행위가 하나님의 눈에 아무도 들지 못해요.
어딘가는 허점이 있고 어딘가는 죄가 있는 거예요. 버려야죠. 이거. 아니 계약을 파기했으면 양쪽이 이게 뭐... 부동산을 매매계약을 했든지 아니면 뭔가를 계약컨대 한 쪽이 이게 어그러지면 파기가 되는 거거든요. 이게 파기가 되면 그 다음이 뭐예요. 반드시 죽으리라. 정녕 죽어야 되요. 이게 하나님의 정의고 하나님의 공의예요.
문제는요 하나님이 여러 속성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속성이 하나는 공의예요. 공의는 행위계약에 근거해서 이거 반드시 죽여야 되요. 심판해야 되요. 근데 또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이 사랑이에요. 행위계약을 맺을 때 처음부터 사랑이 있으니까 행위계약을 맺어줬잖아요. 하나님의 사랑이 없더라면 행위계약 맺어서 그들을 업(Up) 시킬 필요가 뭐가 있어요.
하나님의 사랑이 아직도 살아있어요. 왜?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피조물 중에서도 최고의 영광에 면류관이고 하나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이걸 포기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시 재계약을 합니다. 이 재계약이 은혜의 계약이에요.
은혜의 계약은 뭐냐? ‘행위계약은 아직 유효하지만 행위계약 갖고는 아무도 내 앞에 올 사람 없고 의인이 스스로 자력으로 자기를 구원할 사람이 없다. 내 의의 기준에 도달할 사람 아무도 없다. 100% 죄가 없을 때에도 행위에 실패한 너희들의 조상이고 그 죄성이 흘러오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너희에게 그걸 요구하겠느냐? 이제는 다 은혜로, 은혜로 다 덮겠다.
이제는 행위를 전제로 하지 아니하고 내가 무조건 은혜로 너희들을 구원하고, 은혜로 너희들을 용서하고, 은혜로 너희들을 기다리고, 은혜로 너희들을 회복시키고, 은혜로 내가 천국에, 천국에 내가 입성시키겠다.‘ 그런 계약을 다시 맺은 거예요. 계약을 맺어서...
3장 봅시다. 3장 21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느라.” 하나님이 찾아가셨어요. 먼저.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셨어요. 그들에게 가죽 옷을 해 입히셨어요. 왜 가죽옷을 해 입히셨는가? 그들 보니까 모양새가 꼴이 아니요. 자기들이 하체를 가리기 위하여서...
3장 7절의 말씀 보니까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얼마나 어리석어요. 죄를 짓기 전에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던 그 지혜는 어디로 가버리고 만 거예요. 사람이 죄를 지으니 이렇게 우둔하다니까요.
예수 믿는 사람도 죄성에 빠져버리면요 선택하는 거나, 분별하는 거나, 판단하는거나 어리석어요. 그 무화과나무로 엮어서 여길 가렸으면 무화과나무가 몇 시간 가겠어요? 그 좋은 햇살에 3시간을 가겠어요. 5시간을 가겠어요. 그게 말라버리면 다 드러날텐데 인간의 행위가 바로 그렇다는 이야기...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의 의, 자기 의로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너의 의가 뭐냐. 너의 의는 더러워진 옷과 같으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행위계약에 근거해서 내 행위로, 내 의로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더러운 옷을 입고서는.. 왜? 남들 보다 좀 깨끗하니까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 예복입니다’. 이러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눈에는요 세상 새 옷을 입고 있는 모든 의의 옷들이 다 불합격이예요. 불합격!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 10절의 말씀 보니까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거는 자기들이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잖아요. 하나님 앞에서 서서 있어야 할 상태가 아니잖아요. 왜 두려워해요? 왜 숨어요? 그리고 왜? 숨어도 나무 밑에 숨냐고요! 나무는 내가 다스리고, 관리하고, 명령하고 그런건데 오히려 그 밑에 숨어들어 있는 그 모습…. 죄가 우리 인간을 얼마나 약하게 하는지, 어리석게 하는지 그걸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아.. 이런 녀석들에게는 아무런 행위도 내가 요구해서는 안 되겠구나. 행위를 요구한다면, 의를 요구한다면 아무도 다 회복될 수 없다 생각해서 이제는, 이제는 가죽옷을 해 입혔어요. 가죽옷을 해 입히니까 이것은 거의 반영구적이에요. 가죽 옷을 누가 만들어서 가져왔어요? 하나님이 해 입히셨어요. 입히려면 가죽이니까 짐승이 죽어야죠. 어린양이 그 짐승의 그 피가 아직도 가죽옷에 묻어있어요.
핏덩이들이, 핏자국이 가죽옷에 있어요. 그걸 보고 하나님께서 아직도 그들 속에 죄성이 있고 죄가 있지만 하나님이 간과, 간과라는 것은 뻔히 있는데 가죽옷에 가려버렸기 때문에 그 죄를 내가 못 본 척, 없는 척, 안 본 척 그냥 넘어가 주는 거예요. 그리고 그로 하여금 ‘아이고 뭐 죄가 없네. 어디 갔나? 넌 의인이구나!’ 간주해주는 것이 이것이 바로 은혜언약의 중심이에요.
은혜언약은 아직도 우리가 죄인임에 틀림없어요.
예수 믿기 전도, 예수 믿은 후에도 천국 가는 그 날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은 틀림이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는 간과하시고 의인으로 우리를 간주해주시는 거예요. 그 간주하심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인의 신분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거예요.
근데 여기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아니 암만 하나님이 창조주이고, 하나님이 심판주이고, 하나님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지만 하나님도 그러면 안 되지. 행위계약에서는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벌주신다고 해놓고 이게 하나님의 공의잖아요.
그런데 여기에서는 ‘아이고 없는 걸로 은혜의 계약. 용서’ 그러면 하나님의 정의 앞에, 용서가 충돌이 되는 거예요. 은혜계약과 행위계약, 은혜언약과 행위언약은요 이게 상호 모순적이에요. 충돌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걸 얻으려니까 이걸 버려야 되고, 이걸 얻으려니까 이걸 버려야 되고 이건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의 모순이잖아요. 하나님은 모순되시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지금 문재인 정권에서 청년들이 왜 실망하고 왜 분노하는가? 공정(公正)의 문제예요. 공정. 사실 공정은 굉장히 좋은 거예요. 모든 사람이 공평하고 모든 사람에게 바르게... 그래서 이 문재인 정부에서 이렇게 계약직들, 임시직들, 비정규직들 이런 사람들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요. 이 얼마나 좋은 거예요. 여러분 아시죠. 텔레비전, 드라마 같은데 보면요. 진짜 이 비정규직들은... 야... 이게 보통 대우 받는 게 아니에요.
오늘 이런 설교가 혹시 여러분 해당되는 분들 있으면 양해하고 들으시고요. 그런데 설교기 때문에 어느 편 귀담아 잘.. 뭐 그러질 못하니까 마음이 걸리더라도 들으세요.
어떤 회사 같은데 들은 정규직 비정규직 명찰 색깔이 달라요. 그리고 엘리베이터도 정규직 타는 엘리베이터 비정규직이 타는 엘리베이터가 따로, 밥 먹을 때도 자리가 달라요. 말이 됩니까? 똑같이 일하고 차별금지법은, 차별금지법은 이런 때에 필요한 거예요. 엉뚱한 데에 갖다 대고 차별금지법을 이렇게 쓰지 말고 이런 약자들을 위해 차별금지법은 필요해요.
문제는 이런 사람들을 잘 해주고자 이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해를 보고 억울한 일을 당하게 하면 안 된다 그 말이죠. 이런 사람들 비정규직을 하루아침에 전부다 정규직 해버리면 이 정규직 이 사람들은 이 회사, 공사에 들어오기 위해서 5년도 공부하고, 7년도 공부하고, 10년도 공부하고, 공부를 무지무지 많이 했는데... 내가 딱 정규직인데 하루아침에 비정규직 전부 다 정규직 해 버리면 이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거는 불공평인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정치적으로 풀어갈게 아니고 이 딜레마를 이쪽도 고맙게 생각하고 이쪽도 섭섭하지 않게 생각하지 않도록 뭔가 차등을 두어가면서 몇 년을 두어가면서 차근차근 해결해야 될 문제를 어떤 단시간에 업적을 위해서 이 딜레마를 무시해버리고 이 공정을 무시해버리고 그러니까 한쪽은 좋다 좋다 춤추는데, 한쪽은 너무 분노하고 아니라는 거예요.
행위계약과 은혜계약도 그래요. 하나님이 행위계약 아.. 어겼으니까 은혜계약으로 이거 끝. 없는 걸로. 그러면은 충돌이 되는데... 하나님 스스로 당신의 법을, 당신의 원리를 당신이 무너뜨려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사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런 데서요. 여기서 하나님의 ‘신의 한 수’가 나와요. 이 딜레마를, 이 충돌되는 양쪽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하나님의 한 수가 여기서 나와요.
십계명이 그러잖아요. 1계명에서 4계명 하나님에 대해서, 6계명에서 10계명 사람에 대해서..
이 두 계명을 묶어주는 것이 이 고리가 5계명이에요. 5계명은 부모 사랑, 땅에 있는 어버이께 효도, 하늘에 있는 하늘 어버이께 효도. 이 고리로 두 계명을 묶어주는 것처럼, 이 양쪽의 충돌되는 은혜계약과 행위계약, 은혜언약과 행위언약 이 충돌점, 모순을 없애기 위해 주어지는 신의 한 수가 3장 15절이에요.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여자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로 세상에 보내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모순점, 딜레마를 해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우리를 구원해 주겠다, 라는 이야기예요. 그래서 이 계약은요. 이 제3의 계약은 행위계약도 아니고 은혜계약도 아니고 구속의 계약이라고 해요. 구속의 은혜라고 해요.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은 쌍방이 하나님과 우리예요. 그러나 구속의 제3의 언약은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거예요.
두 분 사이에 하늘에서 계약을 맺었어요. 성자는, “내가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나가겠습니다. 그들을 가르치겠습니다.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겠습니다.” 성부는, 또 계약을 맺은 게 “그래 내가 네가 가면 너를 지켜 주고 그리고 네가 십자가에서 죽었을 적에 너의 흘린 피가 선택받기로 작정된 사람들의 죄를 완전히 도말해 주고 그리고 너를 부활시켜 주고 승천해 주고 천국의 자리로, 원래의 자리로 입성, 심판권까지 내가 줄게.”
이게 성부와 성자 사이에 맺어진 언약의 근거하여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그분이 육체를 입으셨다는 것은 그리고 죽으셨다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는 날 불순종하며 정녕 죽으리라라는 하나님의 공의의 법을 성취시켜주신 거예요.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지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되도록 우리 주님께서 중간역할을 하신 거예요.
이것이 바로 구속의, 구속의 언약인 거예요. 비숍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어요.
우리에게는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이 있는데 행위언약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까? 은혜언약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셨는가? 그래요.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 내가 주님을 위해 어떻게 살고 무엇을 해드릴까? 이건 좋은거지만, 내가 구원을 위해서 내 자신의 의를 위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무엇을 할 건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아직도 그 사람은 비록 우리가 교회에 다니고 교회에서 직분을 받았다 할지라도 아직도 행위계약 속에 있는 사람들이예요. 그 사람 구원 못받아요. 하나님의 심판에 놓일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성부와 성자 맺어진 구속의 계약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고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그리고 믿음조차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는 그 은혜를 우리가 믿음으로 내가 구원받았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까, 가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이런 일을 하셨구나 하면서 감사하고 감격하는 그분들은 바로 은혜의 계약 속에 포함되고 은혜의 언약 속에서 살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 라는 이야기예요.
미국에서 알코올중독자 치료협회를 만든 밥 스미스라는 이런 사람이 빌이라는 술중독자에게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어요. “하나님을 믿으세요. 하나님을 믿으면 당신도 은혜 받고 새로워집니다. 의인이 됩니다.” 하니까 빌이라는 사람이 “예, 저야 하나님을 믿죠. 저야 하나님을 믿는데 내가 이렇게 사는 거 보고 하나님이 저를 믿어주시겠어요.” 이것은 아직도 내 행위가 하나님 앞에 깨끗하지 못하니까 이대로는 나갈 수 없다. 내가 깨끗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 가겠습니다, 라는 이런 사람 굉장히 양심적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 아직도 행위계약 속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에요.
‘아... 하나님이 저를 믿어주신다고요. 하나님이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다고요.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 내 모습 이대로 그분 앞에 내가 나가겠습니다. 천부여 손들고 주께로 갑니다’ 하는 사람들은요. 바로 은혜의 계약 속에 살고 있는, 은혜 계약의 성도다, 라는 그런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행위로 행위계약으로 지금도 의인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모세가 필요하고 율법이 필요하지, 왜 예수 그리스도 주님을 하나님이 보내셨겠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것은 행위계약으로는 안 된다는 거예요. 행위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 하기에 모세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우리에게 구세주로 보내셨다. 라는 이런 사실들을 믿고 이제는 더 이상 행위계약 속에서 살면서 조금 요만큼 나았다고 너 그따위로 믿냐고, 기도 안 해서 어떻게 하냐고, 너 왜 그러냐고, 나처럼 믿어보라고 그런 행위 자랑하지 말고. 잘하면서도 “하나님 내가 한 게 뭐 있습니까?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 은혜입니다.”
이렇게 은혜언약 하에 사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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