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추감사절]
당신은 불평진드기와 살고 있습니까?
예레미야 33:10~12
서론
오늘은 맥추감사절입니다. 우리가 미국교회의 영향을 받아 감사절, 하면 추수감사절이지만 유대인들은 추수감사절이나 맥추감사절이나 같은 비중입니다. 맥추감사절은 초실절에 보리를 바치고 그날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에 수확한 밀을 제단에 드렸다 해서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이스라엘 성년남자들, 특히 예루살렘 주변 약 32km(80리)에 속한 남성들은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의 감사 절기에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합니다(출23:17). 감사 절기에 참석해야 어른 대접을 받습니다. 우리는 결혼을 해야 어른대접을 받는다고 하잖습니까? 유대인은 다릅니다. 감사 절기에 정기적으로 참석해야 제대로 된 성년이고 어른대접을 받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연령도 연령이지만 감사를 알아야 어른입니다. 느헤미야서에 맛다냐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기도할 때 감사하는 말씀을 인도하는 자”(11:17)라 소개합니다. 개역판은 “감사하는 말씀을 인도하는 어른”이라고 나옵니다. 감사를 인도하는 어른? 그냥 감사한다고 감사어른이 됩니까? 감사를 인도하려면 감사를 알아야 하고 상시적이고 감사목소리가 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3대 절기를 주신 것은 감사합니다~ 하는 감사어른들 만들려 하심입니다.
그래서 맥추감사절은 감사과목의 수강시간입니다. 유대인들은 감사학습절기에 참여하면서 감사마일리지가 누적되고 감사어른으로 성장합니다. 그래서 박해에서도 저리 살아남은 거지요.
그러면 어떤 분들은 그래요! 구약시대는 그렇다 치고 우리는 보리와 밀을 농사하기는커녕 밀농사 자체를 본 적이 없는 신약시대이고 현대인인데 웬 맥추감사절이냐고! 구약의 절기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는 한시적인 유대민족 제도가 아니냐고…. 그 말도 맞아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약 법조문들의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셨기에(골 2:14) 구약의 절기들을 글자 그대로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유월절에 어린 양을 잡고 무교병을 먹고, 수장절(장막절, 초막절)에 광야에 장막을 치고 거기에서 1주일동안 거할 필요는 없습니다. 맥추절에 밀을 제단에 바치면서 그렇게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시대 성도들인 우리는 형식과 제사는 없어졌지만 절기의 취지는 계승하자는 것입니다. 그건 절기의 형식에 방점(傍點)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있는 감사에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절기축제는, 하나님의 선민(選民) 프로젝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축제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로 보답하는 새 종족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유월절에는 구원에 대한 감사, 맥추절에는 땅과 첫 소출에 대한 감사, 수장절에는 한 해를 먹이시고 입혀주심에 대한 감사코드가 절기마다 심겨있습니다. 이런 울타리가 없으면 비록 선민이라 하나 불평진드기에 고스란히 감염됩니다. 그러면 불평 공화국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하시는 일에 늘 감사하고 세상에 감사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감사천사 민족을 만들고 싶어 절기를 제정하신 것입니다.
맥추절의 특징은 첫 열매 시식행사입니다. 시식(試食)은 음식을 먼저 맛보는 것입니다. 이마트에 가면 먼저 시식해 보라고 합니다. 첫 음식 맛에 대한 시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땀 흘려 농사를 짓고 첫 밀의 수확을 하나님의 제단에 먼저 바칩니다. 내가 수고했으니 내가 시식할만합니다. 세상나라들은 내가 먼저 시식하거나 왕이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시식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께 먼저 시식해보라 올리는 것입니다. 내가 수고하고 내가 땀을 흘렸는데 시식은 하나님께 양보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기쁨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나 나올 수 있는 성숙된 삶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맥추절을 통해 은혜를 아는 백성들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약시대의 성도이면서 맥추감사절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맥추절의 첫 열매를 대한 감사를 통해 장차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도록 하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다시 살아나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었다”(고전15:20)고 선언합니다. 부활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서 시식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전에 인간 부활은 예고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죽으면 살아날 줄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첫 음식을 시식하는 심정으로 첫 부활을 맞이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 즐거움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 는 그 감격보다 더 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또한 성령을 첫 열매에 비교합니다(롬 8:23). 신약시대에 성령이 임하므로 성령은 우리 가운데 인(印)을 쳐주셨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인(印)은 소유관계를 분명히 하고 내용을 보증한다는 뜻합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로마정부는 봉인을 했습니다(마27:66). 이것은, “접근금지, 무덤의 내용물은 로마정부의 소유물임”이라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봉인이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성령도 우리에게 이런 봉인을 합니다. 하나님의 소유물임을 봉인을 합니다. 그러기에 아무도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성령의 첫 열매를 주심에 대해 감사하는 날, 그래서 신약의 맥추절은 성령강림감사절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목민 출신이지만 대부분 농사를 짓습니다. 농사가 얼마나 힘듭니까? 가나안은 무더운 지방입니다. 비가 제때에 내리지 않기에 농사 짓기가 힘들고 소출을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회만 있으면 불평 진드기가 달라붙습니다. 유대인은 첫 열매를 거둬들이고 하나님의 제단에 갖다 바치면서 감사를 올렸습니다. 단순히 밀 수확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가나안땅에서 곡식을 수확하며 산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서의 수확, 한 해의 첫 수확입니다. 앞으로 더 많은 열매를 기약하는 곡식입니다.
그들에게 첫 열매는 단지 밀만이 아니라 앞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첫 열매에 대한 감사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첫 열매와 같은 민족입니다. 그 감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불평 진드기는 떨어지고 감사천사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첫 열매는 무엇입니까? 처음 주님을 발견했을 때의 그 기쁨을 회복하는 것이 맥추절을 바르게 지키는 것입니다. 처음 아이들을 얻게 되었을 때, 처음 직분을 받게 되었을 때, 세례를 받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교회를 알게 되었을 때… 그 첫 열매들을 시식하게 해주었던 하나님의 은혜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처음의 순간들로 돌아가고 그 기쁨을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하며 영광을 올리며 산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서 최고의 기쁨이자 힘입니다. 감사를 잃어버리고 불평 진드기와 산다는 것은 영적인 혈액이 말라버림을 뜻합니다. 감사를 채워놓지 않는 기도와 봉사와 믿음생활은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쭉정이만 얻을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남유다 민족의 상황은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시국입니다. 많이 반복되는 단어가 ‘없다’입니다. 10-11절,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고… 다시…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는 예루살렘… 모두 달아나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성읍에 경제가 돌지 않습니다. 치안이 무너졌습니다. 아무리 종교가 찬란했어도 이런 상황에서는 국가에 망조(亡兆)가 든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는 건더기는커녕 국물도 없습니다. 누구 탓이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 서로에 대한 불평불만 진드기로 예루살렘 성읍이 꽉 차 있습니다! 무슨 희망이 있겠어요?
이런 위기를 어찌 극복해야 합니까? 예레미야는 외칩니다. 3절,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부르짖으라… 뭘 부르짖으라는 것입니까? 없는 것들을 채워 달라 부르짖으라는 것입니까? 그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선지자가 부르짖으라는 것은 민족적인 회개와 함께 감사 목소리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없는 것만 보지 말고 아직도 남아있는 것을 보라! 너희들의 죄만큼 심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인애하심을 구하며 부르짖으라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그런 감사의 마중물을 넣고 부르짖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읍에 어떤 일들로 채워주시나? 모든 불평과 낙심의 진드기들은 사라지고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결혼식 날이요 가장 즐거운 소리를 내는 사람은 신랑과 신부입니다. 그런 소리들이 없다던 입술, 망했다는 입술에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가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여호와의 성전에서 감사제가 회복되고 그러면…
끝 절, “이 땅의 포로들을 돌려보내어 지난날처럼 되게 할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없음’에서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가 불러오는 축복입니다. 그러니까 부르짖으라! 뭐를? 감사를!!!
요나는 환란을 인하여 고기 뱃속에서 부르짖습니다. 살려 달라 외친 것만이 아닙니다. 회개와 함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욘2:9),
목소리에 감사를 입혔다는 것입니다! 노래에 음색도, 테크닉도, 오랜 연습도, 공연 매너도 중요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는 감사가 입혀진 목소리, 감사하는 목소리가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세상을 울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설교준비하면서 신구약 66권 1189장에서 감사단어가 몇 번 나오는가, 헤아려 보았습니다. 나도 어지간히 할 일이 없습니다. 201번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은 감사의 도로망입니다. 어디로 가나 감사도로망이기에 항상 감사! 쉬지 말고 감사! 범사에 감사가 나옵니다. 또한 성경은 감사 거미줄로 꽉 차 있습니다. 어떤 상황도 감사거미줄에 걸리면 항상 감사! 쉬지 말고 감사! 범사에 감사가 됩니다. 그 수준이면 감사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1347년 10월에 시작된 흑사병은 이탈리아-프랑스-북유럽으로 감염되었고 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유럽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2천5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매주 7천명 이상이 죽어갔습니다. 흑사병은 3백년이나 계속되며 인류의 생존을 위협했습니다. 답답한 것은 아무도 이 병을 고치는 방법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3백 년 전, 영국의 아이엄이라는 마을에도 흑사병이 들이닥쳤습니다. 조지 비커스라는 양복기술자가 런던에서 온 소포를 뜯었는데 병에 감염된 벼룩들이 튀어나왔고 비커스는 나흘을 견디지 못해 죽고 마을은 줄초상이 났습니다. 마을은 고립되고 죽기만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1년 뒤, 마을을 찾은 관리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절반이 넘는 주민들이 멀쩡히 살아있었고 완전히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습니다. 비결은 혈통이었습니다. 그들의 DNA를 조사해 본 결과, 질병을 막아주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흑사병을 일으키는 세균이 몸 안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유전자가 백혈구를 둘러싸고 병균이 침투하는 것을 초기에 침투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피에서 항체를 만들고 그 항체를 다른 사람에게 투여하게 되면 그 환자도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혈청이 있습니다. 죄에 대한 혈청은 십자가 보혈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모든 죄들을 제거해 버립니다. 기쁨과 열정이 사라진 신앙생활에는 감사가 백신입니다. 감사 백신은 모든 불평과 불만을 치료합니다. 우리에게 감사의 DNA가 있을 때에 상황은 역전됩니다. 감사를 더 많이 쌓아가면서 감사어른으로 성장하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결론
맥추감사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에서의 첫 수확! 앞으로 매해 첫 수확을 드리면서 감사하라는 명령에 따라 전통적으로 지켜왔던 맥추감사절, 우리도 상반기동안 지켜주신 그 은혜를 더듬어가며 감사하는 믿음들을 회복해야 합니다.
찬양대가 연습하는데 지휘자가 그러는 겁니다.
“남의 파트 따르지 말고 자기 파트 지키세요!”
그래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파트는 감사파트입니다. 감사혈청이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난 상반기, 남의 파트만 따라간 것입니다. 불평과 불만과 비난과 정죄의 파트! 우리는 불평진드기를 위해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감사파트에서 감사하며 살라 세워진 것입니다.
찬양대 모든 파트가 대단하지만, 알토 파트가 참 대단합니다. 알토 파트는 소프라노에 비해 화려하지 않습니다. 저음(低音)입니다. 자칫 소프라노에 끌려갈 것 같은 데도 제 자리를 지킵니다. 자기들도 더 큰 목소리를 갖고 싶겠지요? 더 멋지게 테크닉, 기교를 발휘하고 싶겠지요! 그런데도 꿋꿋하게 제 파트를 지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화음의 찬양대가 되는 것입니다.
감사와 불평은 ‘시소’와 같습니다. 한 쪽이 올라가면 반대쪽은 내려가고, 한쪽이 내려가면 다른 한쪽은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상반기에 감사무게가 올랐으면 분명 내 입술, 마음에서 불평 무게가 그만큼 빠졌을 거예요! 반대로, 불평무게가 올랐으면 내 입술, 마음에서도 감사의 무게가 그만큼 빠졌을 것입니다! 맥추절에 불평진드기 떼어놓고 감사로 채워놓아야 합니다.
미국에서 부흥회가 열렸는데 중풍환자가 참석했습니다. 좋아하는 찬송을 물었더니 뜻밖에도 429장,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불평진드기가 전혀 없이 감사천사와 사는 순혈(純血)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래서 기독교가 세상을 이긴 것입니다. 싸움할 때, 나 죽여! 하는 사람을 이기는 장사가 없습니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죽어가면서 감사하는 사람을 이길 군대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른 믿음으로만 살면 세상은 기독교복음화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감사는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요 혈청이요 백신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땅에 살게 됨에 감사! 좋은 열매 얻음에 대해 감사! 받은 복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할 때, 감사는 축복의 레일이 됩니다. 감사의 레일을 통해 하나님은 엄청난 축복과 행복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러분은 지금 누구와 살고 있습니까? 불평 진드기(?)와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감사천사와 살고 있습니까? 코로나19의 올해 상반기도 여러분들로 인해 감사했고 행복했습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행복했으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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