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시대에 했던 설교입니다. 그 뼈아픈 시절, 잊지 않기 위해 내용 그대로 올립니다.
코로나 시대, 뱀처럼 영리하라!
마태복음 10:16
서론
다시 주일예배가 2주 동안 중단 되었습니다. 아무리 코로나19가 확산세라지만 예배조차도 사회적거리두기 일환으로 묶어버리는 정부 방침은 편의적 행정이던지 한국 교회를 무시하는 오만함이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좌석 수가 1만2000석, 명성교회는 1만석, 연세중앙침례교회 9000석, 사랑의교회 6500석, 새에덴교회 5000석인데 일률적으로 19명만 허용됩니다. 비슷한 크기의 대형마트에 19명만 입장시켰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대형마트엔 수천, 수만 명이 들어가도 되지만 그 넓은 예배당에 19명밖에 못 들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배조차 드릴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라면서 장례식장, 극장, 목욕탕, 공연장, 식당은 어떻게 갑니까.
정부는 “대면 예배를 통한 코로나 감염이 사실상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비대면 예배를 강요하는 것은 방역 기준이 과학도, 합리성도, 이성도 아니고 그냥 ‘감’입니다. 그렇게 막연한 감으로 헌법이 두텁게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겠다는 말입니다. 헌법 밑에 하위 법령으로 말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수모를 당하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의 처신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너무 쉽게 예배를 포기하고 만 것입니다. 예배당 문도 ‘알아서’ 문을 닫고 영상예배가 대안인 것처럼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있었습니다. 결과, 이렇게 머리 깎긴 삼손의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은 예배비상시국입니다. 평안할 때처럼 대처하다가는 우리 믿음이 떠내려가 버릴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이리 말씀하십니다.
16절, “보라 ”…. 마태복음에서 자주 사용된 지시불변사로 특정한 사실을 강조하고, 새로운 교훈을 말하고자 할 때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보라”는 똑똑히 들으라! 그런 의미입니다. 그만큼 우리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허투루(carelessly) 들을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허투루 들었다가 실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담도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다는 말을 허투루 들었습니다. 롯의 부인은 남편의 말을 허투루 들었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사위들은 불구덩이에서 죽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허투루 들었다가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지금은 설교를 허투루 들을 때가 아닙니다. 가정에서 듣는다고 허투루 말씀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인생 역시 허투루 들었다가 허투루 인생을 끝내게 됩니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뒤에 있는 구절을 강조합니다.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순결(純潔 )은 ‘부패한 것에 혼합되지 않으며 오염되지 않는 순수한 상태’, 거짓이 없는 솔직함, 순진함입니다. 그래서 온유와 순결로 세상에 평화를 이루라! 좋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인의 덕성, 온유함보다는 더 앞서야 하는 것이….
뱀 같이 지혜롭고….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은 ‘지혜롭고’를 ‘영리하고’로 번역합니다. 그러니까 뱀 같이 영리하라! 영리(怜悧 )는, ‘영리하다 ’의 어근입니다. ‘눈치가 빠르고 똑똑함’ ‘슬기롭고 민첩함’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영리한 동물이 뱀입니다(창 3:1). 간사한 동물이라고 나옵니다. 당시는 악의 본능보다는 슬기롭고 민첩한 동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뱀의 영리를 벤치마킹하라, 하셨을까요?
뱀은 때와 시기를 잘 분별합니다. 뱀은 어떤 동물보다도 겨울이 오고 있음을 먼저 압니다. 왜? 몸에 독이 오르기 때문입니다. 그건 겨울이 오고 동면의 계절이 오고 있다는 몸의 신호입니다. 그러면 닥치는 대로 잡아먹습니다. 짐승들을 먹어서 이것으로 지방질을 축적합니다.
뱀은 냉혈동물입니다. 추우면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첫서리가 내리면 뱀은 무조건 땅속으로 들어갑니다. 땅위에 있으면 얼어 죽습니다. 동면은 최대한 신진대사를 늦추는 것입니다. 뱀의 동면은 무능하거나 비겁해서가 아닙니다. 먹을 것이 없으면 잠을 자면서 소비를 줄입니다. 피치 못한 것이지만 금식을 통해 내장을 깨끗하게 비웁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뱀의 영리함이 필요합니다. 코로나19는 교회 예배를 건드리고 있습니다. 예배가 없는 것을 편안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예배가 없음에 두려움을 느껴야 하고 의분을 가져야 합니다. 기독교는 박해에서는 살아남았지만 안일함에서는 망했습니다.
지금이 어떤 시기입니까? 바울은 “지금은 자다가 깰 때라”고 합니다(롬13:11-14). 그리고 시간을 아끼라고 합니다. 때가 악하기 때문입니다(엡5:16).
주일예배가 없다고 비축해 놓지도 않고 땅굴로 들어가지도 못하면 뱀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독기운이 없기 때문입니다. 뱀이 독기운이 없다면 무엇으로 자신을 지켜낼 것입니까. 코로나의 어려움에서 무조건 자신을 숨기려 하지 말고 비축해야 합니다. 예배로 비축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비밀한 초막에서 동면-묵상해야 합니다. 그래야 어려운 시기를 잘 넘길 수 있는 영리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뱀은 성체(成體)가 되기까지 대개 1년에서 9년 정도 걸리고, 그 기간 일 년에 두어 차례 탈피 (脫皮)합니다. 스스로 껍질을 벗음으로 생존하고 성장하는 특이한 동물입니다. 독(毒)있는 먹이를 먹었거나 피부가 상해 껍질을 벗지 못하면 자기 껍질에 갇혀 죽고 맙니다. 뱀은 살려고, 성장하려고 껍질을 벗습니다.
뱀의 몸은 건조한 비늘로 피부는 두 겹입니다. 안쪽은 계속 분열하여 자라는 세포로 죽으면 새 세포에 의해 밖으로 밀려나 바깥 세포층을 이룹니다. 바깥 세포층이 오래 덥고 있으면 성장하지 못합니다. 이걸 헐어내고 허물을 벗어야 삽니다. 한참 성장하는 뱀은 늙은 뱀보다 허물벗기를 더 자주합니다. 더운 지방에 사는 뱀은 추운지방에 사는 뱀보다 활동하는 기간이 길기 때문에 더 자주 허물을 벗습니다.
뱀은 탈피 전에 활동이 무디어지고 눈이 점차 흐려집니다. 그러면 본능적으로 허물을 벗어야 산다는 것을 압니다. 코 부분을 거친 것에 문질러 주둥이와 머리 쪽 허물을 느슨하게 만듭니다. 때로는 사십일 동안 낮과 밤을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고 굶습니다. 뱀 다이어트를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살이 빠지고 옷이 헐거워지듯이 뱀도 껍질이 헐거워집니다.
그런 다음 바위 틈새로 지나가면 쫘악~ 낡은 껍질이 벗겨지고 새 껍질, 새 몸뚱이, 새 몸을 얻게 됩니다. 눈에 빛이 돌아옵니다. 뱀이 새것을 얻는데 고통 없이, 옷 벗듯 홀딱 껍질을 벗는 것이 아닙니다. 안구, 콧구멍 안쪽, 입 안까지 탈피하는 일은 뼈를 갉아내는 고통 그 자체입니다. 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는 고통을 통해 온전한 성장이 가능합니다. 죽을 각오를 하니 새 몸이 되고 낡은 것을 버렸더니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요! 껍질을 벗는 고통이 없이는 인간도 사회도 역사도 성장할 수 없습니다. 한낱 미물이라는 뱀도 이러한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제 육신의 껍질을 벗는 대신 남의 껍질을 벗겨 성장하려 합니다. 육신의 다이어트는 하는데 욕심을 버리는 다이어트는 하지 않습니다.
한 곳에 안주하고 늙어가려는 안일함에서 벗어나 허물을 벗어가려는 고통을 지불해야 내가 성장합니다. 경제성장이든 민주주의 성장이든 개인의 성장이든 모든 성장은 고통을 감내하며 스스로 허물을 벗어가는, 저 뱀의 자세로부터 비로소 가능합니다.
코로나로 우리가 움츠려 드는 지금이 허물을 벗겨야 할 때입니다. 오랜 믿음의 사람일수록 더 자주 껍질을 벗겨내고 허물을 벗어야 합니다. 거듭남을 통해 털갈이를 하지만 매일매일 털갈이를 해야 합니다. 성경은 “거짓말을 하는 옛 행위를 벗어버려라”(골3:9) “옷을 벗어버려라” “다툼과 허영을 벗어버려라”라고 명합니다.
우리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부인이 허물벗기입니다. 굳어지려는 자기에게 안티를 걸고 항상 새 것으로 나가기 위해 날마다 허물을 벗어야 합니다. 멈춤의 낡은 껍질을 벗으려면 묵상과 금식, 정결의 좁은 길을 통해 육신을 벗겨내고 껍질을 털어야 합니다. 생명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부담스럽고, 힘들고, 제약이 많고, 불편함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런 좁은 삶이 육신의 허물을 벗게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보혈의 옷,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뱀은 아무 것이나 먹는 동물 같지만 사실은 썩은 것, 죽은 것은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날것만을 먹는 정결함이 뱀에게 있습니다. 죽은 것… 식은 것은 먹지 않고 뜨거운 피를 가진 것만 먹기에 냉혈이면서도 살아냅니다.
뱀은 육식만 먹고 과일은 섭취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포유류 조류 파충류 양서류 어류 등을 먹으며 , 어린 뱀은 지렁이 민달팽이 곤충류를 먹으며 삽니다. 소화력이 강해 포획물을 며칠씩 걸려 털과 발톱의 일부만 남기고 모두 소화시킵니다. 그래서 힘이 강합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정결함을 지녀야 합니다. 아무 것이나 먹고 입고 마시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정결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입에 나가는 것도 조심해야 하지만 입으로 귀로 눈으로 들어오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기에 살아있는 것을 먹어야 합니다. 주님은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요6:27)고 하셨습니다. 이런 양식을 먹어야 근력이 생기고 강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아담의 후손들에게 뱀은 본능이면서 사람을 죽이는 치명적인 독 , 징그럽게 꿈틀거리는 몸뚱이, 사람과 달리 섬뜩하게 차가운 몸 냉혈동물… 그래서 두렵고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간교한 뱀은 자기가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압니다. 그러기에 긴장합니다. 뱀의 눈은 감았다 떴다 하는 눈꺼풀 대신 투명한 비늘로 덮여 있어, 항상 뜨고 있습니다. 눈을 보세요 ! 뱀눈이 흐리멍덩한 것을 본 적이 있나요 ? 뱀의 눈은 항상 예리합니다. 나를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공격성이 보입니다. 그래서 무서운 사람을 뱀 눈이라 하잖아요?
뱀은 매사에 조심합니다. 아주 조용히 미끄러지듯 걸어가며 위험을 잘 피합니다. 감각이 예민하여 미리 위험을 느낍니다. 이것이 영리함입니다.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대하는 적개심이 사람은 물론 자연계가 뱀을 대하는 공격성과 같아요. 세상은 기독교에 대해 공격적입니다. 교회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난리가 납니다. 기독교를 위해 죽으려는 순교자들은 줄어드는데 기독교를 죽이려는 박해자들은 늘어납니다. 이런 세상에서 제자들은 뱀처럼 항상 눈을 뜨고 경계심을 갖고 긴장된 일상을 살아야 합니다. 나를 좋다던 사람들이 언제 돌변해서 나와 교회를 공격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악의 자리, 교만의 자리, 게으름의 자리를 피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악의 자리이고 교만은 왜 위험한지, 게으름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분별하는 영리함들이 있어야 합니다.
뱀은 엄청난 번식력으로 인간과의 싸움, 야생동물과의 싸움에서 이겨냅니다. 뱀은 현재 456속의 약 3,300(어떤 분은 2,900)종으로 남극을 제외한 각 대륙에 널리 분포하며, 한반도에는 14종(16종?)이 서식합니다. 희한하게 울릉도나 독도에는 뱀이 살지 않습니다.
뱀이 남극을 제외하고 세계 곳곳에서 살아가고 사람들이 뱀을 징그러워하면서 오히려 숭배하는 것은 놀라운 생명력과 번식력입니다. 뱀은 생식기가 두 개로 이를 교대로 짧게는 1시간에서 길게는 72시간까지 교미하고, 1년 1~2회에 걸쳐 한 번에 최대 150개의 알을 낳습니다. 그래서 죽여도, 죽여도 살아남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뱀의 성장과 번식력을 통해서 살아남고 세상을 복음화하라고 하십니다.
<결론 >
뱀은 상당히 양면성이 있으면 그만큼 모순성을 보입니다. 공포의 대상이면서 숭배의 대상, 죽음의 상징이면서 불사(不死)와 영생, 치유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뱀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력과 번식을 위해 뱀을 수호신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뱀은 이처럼 혐오의 대상에서 강한 생명력과 강한 번식력으로 숭배의 대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자기보호와 풍요와 번식의 상징으로 혐오와 숭배를 동시에 이루어낸 영리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걸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기자는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16:4)이라 합니다.
초대교회가 이걸 해냈습니다. 초대교회 때 십자가는 최악의 형벌이고 혐오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예수가 유대인에게는 꺼리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아이콘, 상징으로 자리매김을 합니다. 로마인에게 기독교는 십자가에 달린 사람을 구세주로 믿는 우스운 미신종교였지만 로마기독교인들에게는 구세주 숭배 대상, 유일한 구원종교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생명력과 번식력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이게 기독교의 힘입니다.
성결교단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이성봉 목사님은 늘 오른손 주먹을 쥐고 다녔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장애인인 줄 알았을 정도였습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으면 으레 이리 대답합니다.
“주님의 손을 잡고 가는 거야.”
우리가 주님의 손을 꼭 잡아야 뱀처럼 영리하게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손을 꼭 잡아주어야 우리의 영리함이 간사함이 아니라 시대를 아는 분별력과 통찰력으로 세상에 평화를 전해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살아남고 코로나19의 동면(冬眠)은 허물을 벗어내는 초막기간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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