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유라굴로 광풍에서
사도행전 27장 14~26절
[코로나 기간 중에 했던 설교입니다.]
서론
본문 14절에 ‘유라굴로’ 광풍이 나옵니다. 유라굴로는 ‘동풍’과 ‘북풍’의 합성어로 ‘동북풍’이라는 A급태풍입니다. 2100Km 높이의 이다(Ida)산맥으로부터 생기는 반대의 기류가 충돌하면서 강력한 북동풍이 됩니다. 광풍을 만난 배는 방향을 조절할 수없는 속수무책 상태로 아프리카 방면으로 밀리다가 모래톱이나 암초에 부딪쳐 파선하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지중해의 해상 태풍으로 유명합니다.
본문에, 바울을 태우고 로마로 가던 배는 곡물운반선입니다. 276명과 곡물을 선재하고 항해하다 유라굴로 광풍을 만났는데 곡물은 버렸지만 276명은 한 명도 죽지 않았습니다. 기적입니다. 바울이라는 그리스도인이 중심을 잘 잡아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두 살았습니다.
한국교회, 우리는 코로나 앞에서 어찌했습니까? 코로나19 광풍이 불 때 의연하게 잘 감당했습니까? 이리 떠밀리고 저리 떠밀리면서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닙니까? 코로나19 광풍 가운데서 교인들의 의연한 모습에 주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다움을 보았을까요? 우리는 처음에 속절없이 당한 일 앞에서 예배당 문을 닫고 예배를 포기하고… 앗! 뜨꺼워라~ 예배당을 떠나고 예배에서 숨어버리고 그러지는 않았습니까?
이제 시간도 어느 정도 흘렀으니 우리 자신들을 점검하고 앞으로도 계속되는, 또 치료제가 나왔을지라도 변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전이되면서 계속 공격을 받을 텐데, 그때는 어떻게 처리하고 처신해야 하는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광풍을 만난 이유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광풍을 만난 원인이 무얼까요? 9절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 때였습니다. 금식하는 절기는 태양력으로 9-10월경으로 유대력으로는 7월 10일에 지켰던 속죄일을 의미합니다(민29:7~11). 이후 해상에는 태풍이 잦게 일어납니다.
바울은 겨울을 지낸 후에 항해를 계속하자고 권고했습니다. 바울은 여러 차례의 여행 경험과 세 차례나 파선을 당하여 위험을 경험했던 사람입니다(고후11:25).
그러나 11절, 선주와 선장은 백부장의 말을 믿었습니다. 선주와 선장은 바다와 항해에 대해 전문가이고, 경험자입니다. 바울은 육지 사람이지 바다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바다에 대해서는 비전문가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백부장은 하나님의 사람보다 선주와 선장의 말을 믿었습니다. 바울의 조언을 따르지 않고 출항을 강행했습니다. 선주와 선장의 입장도 이해가 갑니다. 이 배는 곡물운반선입니다. 물건을 제 때 들이지 못하면 손해배상 책임을 집니다. 그래서 께름칙하면서도 출항한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다에 대한 전문가의 안목과 경험을 우선적으로 고려했을 뿐 바다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바다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바다의 미친 바람, 풍랑을 잔잔하게 명할 분은 바다를 지으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파도를 일으키고 파도를 잔잔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사람의 말과 지식과 경험을 믿었다가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때마다 시대마다 인류를 공격해 온 역병들과 전염병이 있습니다. 태풍, 자연재해, 흑사병, 전쟁… 쓰나미… 이런 자연의 재앙 가운데 이번에는 세계가 당한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를 자연의 역습(逆襲)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자연 파괴, 환경 파괴, 생태계 파괴… 그래서 전염병들이 살 곳을 잃고 인간을 숙주(宿主)로 삼아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동물들도 인간들이 무차별적으로 자신들을 노획하고 공격하니 자기보호 차원에서 인간들을 역습하게 되고 이것이 전염병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자연을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어기고, 자연을 파괴하고 지배하고 이기적인 목적으로 무차별 훼손하기에 코로나 광풍, 쓰나미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자연도 견디다 못해 역습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제대로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어긴 결과입니다.
이번에 최고로 피해를 받은 곳이 교회입니다. 전도의 문이 막혔고 예배관과 교회관에 대한 믿음들이 흐트러지고 있습니다. 왜 이런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까? 그만큼 한국교회가 너무 안일하게, 자기중심적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예배의 소중함, 교회의 소중함을 모르고 너무 당연시 해왔습니다. 교회가 너무 소란했습니다. 분쟁과 시기와 질투들이 난무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크게 경종을 울리신 것이며 이후에 계속 몰아닥칠 이보다 더 큰 다양한 유라굴로 광풍들을 감당하기 위한 근력을 이번에 키워내신 것입니다.
광풍에서 살아남으려면
지금 망망대해에서 만난 유라굴로 광풍에서 살아서 돌아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10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희망 상실입니다. 코로나 앞에서 한국교회는 대안이 없습니다. 온라인에서 한계를 찾지만 그건 대안 자체는 아닙니다. 오히려 여기에 익숙해지면 코로나보다 훨씬 더 해악요소가 됩니다.
유라굴로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희망이 생겼고 무사 생존할 수 있었습니까?
바울의 말을 들었습니다.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다가 풍랑을 만났다고 뒤늦게 후회합니다. 이번에 바울이 22절, 배만 손상이 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니 안심하라! 말합니다. 그것은 23절,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입니다. 선장과 선주는 자기 욕심만 채우려다가 사람들을 위기에 몰아넣었고 백부장은 사람의 말을 너무 믿다 죄수들이 죽고 본인은 영창이나 처형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럴 때에 바울이 괜찮다~ 라는 말은 희망이 되었고 그래서 바울의 말에 고분고분합니다.
배안의 물건들을 버렸습니다.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함입니다.
19절,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모래톱에 걸리면 꼼짝하지 못하고 침몰합니다. 배를 가볍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양식이든 귀중품이든 화물이든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아깝지만 살려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배안에 있어 모두 살았습니다. 육지에 가까운 줄을 알고 사공들이 배를 버리고 거룻배를 타고 탈출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죄수들은 모두 죽습니다. 그때 바울이 말합니다.
31절,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살겠다고, 배 밖으로 나가면 죽는다는 경고입니다. 그러니 배안에 있으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동안 말씀을 너무 잘 알았습니다. 목회자급입니다. 그러나 말씀과 행동을 통합시키지 못했습니다. 말씀대로 살아 내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재설정해야 합니다.
체중을 줄여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과체중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베드로와 요한이 그랬을 때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모세는 40일 금식하며 빈 몸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했을 때 얼굴에서 광채가 나타났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너무 살쪘습니다. 과체중에 걸렸습니다. 우리는 너무 세상에 동화되었기에 광채가 아니라 냄새가 납니다. 그래서 드라마를 보면 무례한 목회자 장로 권사로 나옵니다. 화도 나지만 우리 잘못도 있어 부끄러운 것입니다.
이제 이걸 빼야 합니다. 교회 안의 물건들, 세속적인 물건들을 버려야 합니다. 명예, 감투… 무슨 장(長)… 이런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몸을 줄여야 한국교회가 유라굴로에서 살아납니다.
배안에 있어야 합니다. 선원들이 거룻배를 타고 도망치려 했다가는 모두 죽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배안에 남아있어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교회가 몇 차례 집단 확진자가 생기니 교회 스스로 문을 닫았습니다. 예배에 인원제한을 두었습니다. 교인들 스스로 교회에서, 예배당에서 멀리 하려합니다. 그것이 대책입니까?
교회 안에 있어야 합니다. 배 밖으로 나간다고 살 수가 있습니까?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어항 속의 금붕어를 실물로 유대인의 정체성을 교육합니다. 어항 속의 금붕어를 보이며 자녀들에게 묻습니다.
“이 금붕어가 어항이 좁고 때로는 위험하다고 어항 밖으로 나가면 살겠니 죽겠니?”
“당연히 죽지요! 금붕어가 어항 밖에서 어떻게 살아요?”
“그래! 우리 유대인이 그렇다! 지금 박해를 받는다고 유대인이라는 것을 버리며 하나님 앞에서 선민 공동체에서 영원히 죽는거란다!”
이런 가르침이 히틀러의 박해 가운데서도 히브리인의 혈통을! 선민 정신을 지켜낸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다시 교회 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예배 안에, 공동체 안에 있어야 하고 지난날의 믿음의 열정으로, 예배 신앙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야 정상적인 믿음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은혜의 기관은 교회밖에 없습니다.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은혜 안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 예배 공동체 예배당 안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예배당은 울타리요 껍질입니다. 껍질이 벗겨진 과일 속살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껍질 안에 들어와 있어야 코로나에서 믿음이 보호받습니다! 들판에서 양들은 울타리 안에 있어야 안전보호를 받습니다.
우리도 교회 안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온라인예배에서 나와 예배공동체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된 보호를 받을 수 있고 건전하게 믿음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광풍이 주는 유익
유라굴로로 인해 불안했고 고생도 많았지만 유익도 있었습니다. 전도의 기회가 생겼습니다. 백부장을 비롯해서 선원들이, 죄수들이 바울의 인격과 능력을 알았습니다. 28장 멜리다섬에서는 추장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증거되었습니다. 유라굴로 광풍이 아니었다면 전도의 기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로마에서 편안하게 셋집에 살면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28:30). 백부장이 인생의 위기에서 자기를 살려준 바울에게 혜택을 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 일행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체험적인 신앙이 된 것입니다.
거친 파도가 유능한 뱃사공을 키우는 법입니다. 바울은 유라굴라로 인해 유능한 뱃사공이 됩니다. 모두 바울에게 목숨을 걸었습니다. 풍랑이 만들어 낸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고 순교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유라굴로 광풍은 당시에는 위기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유익이었습니다.
코로나19는 죽음과 손해만 끼치는 것이 아닙니다. 코로나로 이익을 얻는 사업체들이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유익도 있습니다. 두려움에만 떨다가 하나님께서 코로나를 통해 주시려는 영적 유익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코로나로 인간의 과학이 만능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가 얼마나 소중하고 공동체가 얼마나 힘이 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 풍랑 인연하여서 한국교회가 더 하나님 쪽으로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결론
바울이 말합니다.
24~25절, “하나님께서 나로 가이사 앞에 서게 하겠다!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보호하겠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러니 모두 안심하세요”
우리도 코로나 와중에서 이런 말씀을 듣고 의연하게 견디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입니다.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26절,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조금 걸릴 것입니다. 백신이 나와도 완전치료제가 나올 때까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코로나가 끝나도 사업이 회복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때까지 믿음으로 버티어 냅시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읍시다! 이참에 유능한 뱃사공으로 실력을 키우고 알곡신자로 체질개선을 합시다! 유라굴로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성화로 나가는 은혜의 시간을 만들어 냅시다. 이것이 유라굴로 풍랑을 이겨내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아직은 유라굴로 광풍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주일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배 셧다운(shutdown) 앞에서(시편 23:1~6) (1) | 2024.06.06 |
---|---|
당신은 불평진드기와 살고 있습니까?(예레미야 33:10~12) (1) | 2024.06.06 |
[차별금지법] 자비(慈悲)와 견책(譴責) 사이에서 (레위기 19:9, 10, 17, 18) (1) | 2024.05.25 |
기쁜 말, 기쁜 일, 기쁜 노래! (룻기 2:10~13) (1) | 2024.05.25 |
왕의 큰길(大路)인가, 족장로(路)인가!민수기 20:14~21 (0) | 2024.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