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기간 중에 했던 몸부림의 설교입니다.]
예배 셧다운(shutdown) 앞에서
시편 23:1~6
서론
정부는 코로나 확산세가 거세지자 내일(12일)부터 수도권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4단계로 격상한다고 발표했습니다. 7월 12일부터 7월 25일까지 두 주간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한 거리두기 체계에서 가장 강력한 봉쇄조치로 사실상 ‘셧다운’에 해당합니다. 아시는 것처럼, 셧다운(shutdown)은 전원 고장, 사고, 기타 오류 등의 이유로 컴퓨터 시스템 작동이 중지되는 것입니다. 예산안 처리 무산으로 인한 미국 연방정부의 일시 업무 정지를 뜻하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셧다운 사태가 되면 공무원들의 월급이 일시적으로 지급 중지되기도 합니다.
12일부터 한국 교회가 셧다운 상황을 맞았습니다. 현재의 3부에서 2부로, 대표기도도 찬양대도 서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차 있었던 터라 일체의 예배가 중단되고 새벽기도회를 비롯한 모든 모임이 두 주간동안을 셧다운되는 현실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교회의 예배와 함께 성도님들의 가게와 사업장들도 큰 타격을 입을 것을 생각하니, 솔직히 두렵습니다.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19만해도 힘들었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 치명적인 인도 델타 변이바이러스까지 발생해서 확진자와 사망자수가 급격히 늘어 하루 신규 확진자 수는 11일 현재 1378명… 사망자는 한국은 2,038명, 세계적으로는 400만 명이 넘었습니다. 이번 주간부터 예배당 문을 잠그고 주일에도 혼자 예배하고 설교할 참담한 상황에 눈물이 납니다.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정부 방침에 따르기야 하겠지만 예배까지도 셧다운! 우리가 못나서 이러는지 못해서 이러는지… 어느 쪽이든 이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예배 셧다운(shutdown)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윗은 이런 상황을 4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비유합니다. 다윗도 그의 생애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골짜기를 걷는 심정을 여러 번 반복했습니다. 인생 셧다운 위기입니다.
누구든 인생 셧다운 상황 앞에서는 어지간히 대가 세지 않으면 불안하고 두려움에 떱니다.
바알선지자 450명을 몰살시킨 대찬 사람 엘리야 선지자도 ‘형편을 보고’(왕상 19:3), 어떤 형편입니까? 이세벨이 내일 이 맘 때까지 반드시 너를 죽이겠다는 그런 경고 상황에 가슴이 철렁~ 하며 도망 쳤습니다. 사역이 셧다운된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어쩌다 이 혼란한 세상에 살게 되었습니까? 이전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진짜 악한 것들이 고삐를 풀린 것처럼 한꺼번에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개인이 당하는 어려움과 함께 한국교회에 쏟아지는 비난, 동성애, 젠더, 페미니즘, 차별금지법… 교회는 세상에 대해 관대하려 하는데 세상은 교회에 대해 관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 버거운데 2주간 동안 예배와 교회 활동 전체가 셧다운되는 상황 앞에서 음침한 그림자를 봅니다. 두 주간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 라는 것보다 예배가 없는 그 자체를 인정할 수도, 지나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일들이 한국교회를 얼마나 무너뜨릴 것인가, 앞날이 훤하게 보이기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앞에 서 있는 심정입니다.
오늘과 같은 때에 우리는 답을 구하기 이전에 답이 오는 방향을 먼저 바라보아야 합니다.
요나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구원받아야 할' 성읍이 아니라 '망해야 할' 원수나라로만 보았기에 사명을 걷어차고 줄행랑을 쳤습니다. 사명이 셧다운된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이런 상황 앞에서 세상은 바라볼 방향들을 제시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안’-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연구하고 마음을 다스리고 상처를 극복하면 된다고 합니다.
기회주의들은 ‘옆’, ‘주위’를 둘러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위기는 기회가 될 수도 있으니 이럴 때에 돈을 버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 주위를 돌아보며 기회를 찾으라고 합니다.
낙관주의들은 ‘앞’을 내다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도 긍정마인드를 갖고 앞을 바라보면 상황이 역전되는 날이 온다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게 합니다.
염세주의자들은 ‘뒤’를 가리킵니다. 최악의 ‘낮은’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세계나 인생은 나빠지면 나빠졌지 절대로 좋은 일은 없을 거라면서 비관하게 합니다.
우리는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세상이 제시하는 이런 해결법들을 듣고 있습니다. 예배가 셧다운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까?
다윗은 세상의 지식과는 전혀 다른 곳을 지목합니다! 다윗은 내 ‘안’도 아니고 ‘옆’도 아니고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니고 ‘위’를 올려다봅니다. ‘위’는 어디입니까?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다윗은 현재 어떤 형편입니까?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22장에서 어찌히여 나를 버리셨냐고, 어찌하여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않느냐고, 내 신음소리를 외면하시냐고...(1,2절) 울부짓습니다. 다윗은 그걸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쳐다봅니다. 위로 올려다보니 누가 있습니까?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니 그냥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양들에게는 목자가 전부입니다. 신뢰하는 목자가 있으면 만사 오케이입니다. 목자 중에서도 하나님 목자입니다. 그래서 조금 전만 해도 사망이 음침한 골짜기였는데
지금은 2절, 푸른 풀밭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푸르다는 것은 단순히 푸른 이미지가 아닙니다. 새풀새풀 나들나들… 아직도 이슬방울이 맺혀있는 연한 풀입니다. 그 연한 풀을 먹고
2절, 풀밭에 누이시며… 눕게 됩니다. 양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눕는다, 는 것은 대사건입니다. 양은 가축 중에 가장 예민하고 겁을 많이 탑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놀라는 것이 양입니다. 조금 전만해도 음침한 골짜기에서 긴장감으로 가슴이 콩알만 한 심정이었던 그 양이 눕습니다. 그 겁쟁이 양이 골짜기에서 눕다니… 이건 최상의 컨디션입니다.
양들은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 주지 않으면 눕지 않는 습성이 있습니다.
-배부르게 꼴을 먹어야 눕습니다. 배가 고프면 절대 눕지 않습니다. 배가 만족해야 눕습니다.
-겁이 많아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푸른 초장에도 누으려 하지 않습니다. 한 마리가 무엇에 놀라 달아나면 알아보지도 않고 도망질합니다. 그러기에 여간해서는 누우려 하지 않습니다.
-집단생활을 하기에 저희들끼리 싸우고, 싸움이 그치지 않으면 푸른 초장에도 눕지 않습니다. 동물 사회에도 지배계급이 있습니다. 닭들 사회에서는 쪼는 순위, 소와 염소들은 뿔로 받는 순위, 양들은 몸으로 밀어붙이는 순위가 됩니다. 그러다 보니 순한 양들 사회에서도 치고받지는 않아도 적대 의식이 있습니다. 긴장, 경쟁, 알력입니다. 그래서 자기 초장을 지키려 눈을 부라리고 누군가 자기의 땅으로 들어오면 언제라도 몸으로 밀어내려고 긴장을 늦추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눕지 못합니다. 그 결과 체중이 줄고 신경이 예민하고 암양들은 사산합니다.
-기생충으로 괴로움을 받는 동안은 눕지 못합니다. 여름에는 말라리아, 쇠파리, 진드기 등의 해충으로 시달립니다. 이러한 해충에 시달릴 때에는 아무리 푸른 초장, 맑은 시냇가로 인도함을 받아도 누워있지 못합니다. 양들은 일어나서 발을 구르며 머리를 흔들어대며 해충들을 자기 몸에서 떼어내게 하려고 덤불 속으로 뛰어듭니다.
양떼들의 눕지 못하게 하는 습성의 조건을 채워주는 것은 당연히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들은 목초지와 물관리를 잘 합니다. 그래서 자기 양들을 맛나는 풀로 잘 먹입니다. 그래서 배가 부르게 해주면 양들은 자리에 눕습니다.
양들은 목자만 나타나면 신기하게도 경쟁의식을 버립니다. 오로지 목자에게만 관심을 둡니다. 목자가 내 터전을 지켜준다는 확신으로 편안히 눕게 됩니다.
양떼들은 목자의 손이 여러 구충제들을 이용해서 모든 해충들을 없애줄 때 눕게 됩니다.
양은 목자가 보이면 안심해서 눕습니다. 그들은 경험적으로 목자를 신뢰합니다. 모든 염려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목자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같은 고백을 합니다. 시4: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시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이렇게 양들은 목자의 수고로 배가 불고 안전을 확신하고 해충이 주는 고통에서 해방되고 눈을 떠보면 지팡이를 잡은 목자가 앉아서 자기들을 지켜주는 그 모습에서 안심하고 잠들 수 있는 것입니다. 목자가 그들에게는 전부입니다.
그런데요, 양들이 습성과 관계없이 누울 때가 있습니다.
목자들은 때로는 말을 듣지 않는 천방지축(天方地軸) 말썽꾸러기 양들을 몽둥이로 다리를 분질러서 눕게 하십니다. 그래서 늘 목자 옆에서 목자의 돌보심과 관리를 통해서 몸과 마음도 치료를 받고 회복을 하게 됩니다. 목자의 치료를 받는 동안 누운 양은 비로소 목자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양이 막대기로 다리를 분질러 놓은 것은 그냥 미워하심이 아닙니다. 그의 천방지축 행동을 고쳐주시기 위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6절입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밧세바와의 관계, 우리야를 간접 살인하고 맞는 인생의 셧댜운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알게 되고 회개와 감사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자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소생하다’는 ‘되돌아오게 하다’는 뜻입니다. 불순종에서 순종으로, 우리 밖에서 우리 안으로, 목자에 대한 불평에서 감사하는 목소리로…. 다윗은 자기가 겪었던 인생의 시련들로 인해 하나님의 시련의 불구덩이에서 영혼이 소생되는 체험을 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예배 셨다운 두 주간! 누군가에는 소생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소멸의 기간이 될 것입니다. 소생의 기간으로 삼는 분들에게는…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床)을 베푸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기름을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 기름을 바르다는 말은, 내 수그러진 머리에 활력을 주신다, 는 말입니다. 이는 머리에 향유 같은 고급 기름을 바를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지친 여행객들을 위로하며 심신을 달래주는 고대 근동의 문화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머리를 들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결론
앞에서 했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인생의 시련과 불안, 인생의 셧다운 앞에서 심리학자들은 ‘안’을 들여다보고 심리치료로 소생하려 합니다. 기회주의들은 ‘옆’, ‘주위’를 둘러보고, 기회를 찾아내려 합니다. 낙관주의들은 ‘앞’을 내다보며 자기 계발에 힘을 씁니다. 염세주의자들은 ‘뒤’를 보며 인생을 귀찮게 봅니다.
인생셧다운 앞에서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사방팔방의 형편에서 눈을 떼고 ‘위’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두 주 동안은 더욱 큰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 한 분이면 세상을 모든 얻은 것처럼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자족의 마음이 될 것이며 하나님으로 채워 넣을 때 비로소 5절 마지막,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런 고백으로 매일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예배의 셧다운! 교회 모임의 셧다운이 발생하는 두 주간에 믿음마저 셧다운되지 마시고 오히려 영혼이 소생되어 의(義)의 길로 우뚝 솟아오를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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