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성화(神手聖化) 야곱열전(2)
성화가 미션이다!
창세기 25장 27~34절
서론
식물은 언제 성장합니까? 여름에 성장합니다. 여름에 잎도 커지고 열매도 커지고… 그래야 가을에 상품이 됩니다. 여름에 크면 가을 큰 열매를 얻고 여름에 잘 익어야 맛있는 열매를 얻습니다. 여름더위에 성장 없이 가을열매가 없어요! 가을수확은 여름에 달려있습니다.
지난주일 야곱을 모델로 성화의 길을 시작했습니다. 식물들이 여름에 푸르게 성장하듯이 이번 여름에 신수성화(神手聖化) 야곱, 연속설교를 통해 인격이 조금 더 성장하고 성숙하고 더 성화되는 중간 형태의 모습들을 서로에게 보여줄 변화의 여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성화(聖化) 교리는 조금씩 거룩해지고… 조금씩 예수님을 닮아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낸다? 거룩하게 산다? 성스럽게 산다? 말만 들어도 부담스럽지요? 이거야말로 한창 팔팔 뛰는 악동(惡童) 나이에 고급 양복을 입히고 젊잖게 행동할 것을 요구받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그래서 은혜는 인기가 있어도 성화는 인기가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가려면 성화의 길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근본이 하나님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의 구원은 성(聖) 삼위일체로 이루었습니다. 성부는 구원을 계획하시고 성자는 구원을 위해 대속하시고 성령은 우리에게 구원을 적용하셨습니다. 모두가 성(聖)입니다. 그러니 성화는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의무가 된 것입니다.
이게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서에게 성화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에서가 마음대로 살지만 하나님은 그냥 두셨습니다. 에서는 33절 장자의 명분을 죽 한 그릇에 동생에게 팔아넘깁니다. 장자 명분은 언약의 대물림입니다. 언약의 3대 축복이 떠났습니다. 장자명분은 족장의 명분입니다. 아브라함-이삭, 에서가 될 수 있었는데 장자 명분을 팔아버림으로 언약 족장의 자리에서 실격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과는 관계없는 남남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날부터 하나님은 에서에게 관심을 꺼버렸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다릅니다. 에서가 언약의 대물림권, 장자축복권을 넘겨버렸지만 아직도 에서는 큰아들입니다. 장남에 대한 기대와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26:34, 35을 보면, 에서 때문에 마음에 근심을 합니다. 마음의 근심은 '영혼의 괴로움'이란 뜻입니다. 부모가 왜 장남 때문에 왜 영혼의 괴로움을 느끼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어긋나는 에서의 일부다처 행위와 가나안 며느리들이 보여 준 이방 생활 방식 때문입니다.
결국은 에서가 장자답게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냥꾼 한량이 되어 영적인 일에는 너무 무심합니다. 부모들은 아직도 장자 명분이 야곱에게 넘어가 버린 것을 몰랐기에 에서에게서 장자의 명분만 아니라 장자로서의 반듯한 생활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입장이 다릅니다. 이미 에서는 장자 명분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내려주시려는 3대축복은 이미 에서에게 없습니다. 그러니 에서가 죽을 쓰든 밥을 쓰든… 부인을 둘을 얻든 셋을 얻든… 마구잡이로 살든 관심이 없어요. 그러니 에서로 인해 속상해 할 것도 아쉬워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에서는 노는 물이 달라진 것입니다.
야곱은 다릅니다. 야곱은 비록 꾀를 쓰기는 했지만 장자 명분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형이 되고자 하는 욕심이 아닙니다. 그는 형 아우라는 신분을 떠나 집안에 흐르는 언약의 축복을 알았습니다. 27절 야곱은 조용한 사람입니다. 그는 장막에 거주했습니다. 28절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단어와 문장들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야곱의 영적 기질입니다. 그는 형과 달리 치밀한 사람이고 영적인 것을 알아본 사람입니다.
야곱은 어머니에게서 언약의 축복을 배웠습니다. 아브라함의 집안에 내려오는 엄청난 축복을 알았습니다. 쌍둥이 중의 하나에게만 정통성이 있고 축복은 정통성을 통해 내려갈 것입니다. 자기는 차남이라 정통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죽을 쓰고 장자권을 사버린 것입니다. 에서 입장에서 보면 사기지만 야곱은 정당하게 대가를 치러 장자의 명분을 산 것입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의 관심은 야곱에게 향합니다. 출생은 에서가 장자지만 언약순서로는 야곱이 장자입니다. 하나님과 야곱이 노는 물이 같습니다. 그래서 에서의 행동은 부모의 마음에 영혼의 근심이 되었지만 야곱은 하나님의 근심이 됩니다. 너는 왜 언약의 족장답게 신분답게 못 사냐? 그래서 하나님은 평생 야곱을 주시하며 야곱을 추적하며 손을 대십니다.
야곱은 장자 명분은 얻었지만 명분대로 살지 못합니다. 자기아집, 사기꾼기질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실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자꾸 머리를 굴립니다. 장자축복에만 관심기울이고 땅을 주겠다… 대민족을 만들겠다… 눈에 보이는 축복에만 평생을 매달립니다. 그래서 부인들을 네 명이나 얻고 수없이 자식들을 뽑아댑니다. 대민족을 이루려면 다산(多産)을 해야 하니까요. 하나님의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인간적인 방법입니다.
아브라함 가문에 내려오는 3대축복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 번째 항목, 복의 근원이 된다… 복의 근원은 천하에 복을 유통시키는 파이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룩한 족장이라는 명분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명분에 맞추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장자의 명분을 인정하시면서 평생을 야곱과 같이 명분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명분에 맞는 성품과 생활을 하도록 다듬어 가신 것입니다. 이런 결과가 야곱의 성화입니다.
이제 왜 우리가 성화의 길을 걸어야 하는지, 아시겠지요?
하나님과 우리와 노는 물이 갖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신분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이시기에 자녀도 거룩한 신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의인이라 불러주십니다. 인격이 생활이 의인이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뿌려졌기에 그 흔적을 보고 의인의 신분으로 간주해 주시고 대해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형편없이 살아도 나를 의인으로 대하시는 하나님의 간주는 변치 않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인신분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명분에 맞게, 정말 의인답게, 나도 거룩하니 너희도 생활에서 거룩하라고 명령하십니다(레 11:45). 그러면 간주를 넘어 명실공(名實共)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명실공(名實共)이라는 한문은 명실이 같다, 즉 소문(所聞)과 사실(事實)이 같다는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 신분이라는데 행동은 아닙니다. 소문과 사실이 다른 셈입니다. 그러면 명실공이 아닙니다.
소문과 사실! 신분과 행위가 차이가 나는 우리의 상태를 명실공으로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성화(聖化) 미션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내 신분과 생활은 너무 차이가 큽니다. 이 간극을 좁혀야 합니다. 믿음생활이란 결국 행위까지도 거룩한 신분에 일치하게 차이점을 좁혀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을 받은 이후 최대의 프로젝트입니다. 이걸 위해 신앙생활에 올인해야 합니다.
성화(聖化)되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에 선교미션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선교는 말로 하는 전도와 인격으로 하는 전도가 있습니다. 말로 하는 전도는 언어적 행위요 인격으로 하는 전도는 비언어적 행위입니다.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비언어적 전도는 관계전도입니다. 좋은 관계를 맺어놓으면 그들도 점차 믿음으로 들어옵니다.
왜냐? 보험으로 말하면, 기독교라는 상품이 최고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어 천국에 가고 땅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과 축복을 받는다는 이런 좋은 상품이 어디 있습니까? 문제는 보험을 소개하는 내가 그 보험에 대한 확신이 없고 설명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확신이 없으니까 제대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못 삽니다. 나는 그 보험을 믿지 못하면서 좋다면… 누가 믿겠어요? 너나 들어라! 너나 좋은 하나님을 믿어라! 라고 거절당합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거룩하지 못하고 원수까지 사랑했다는 하나님을 전하면서 원수는커녕 교인들끼리도 사랑하지 못하면 누가 믿겠어요?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말하면서 일반인들보다 더 꽁하고 자기아집과 교만에 빠져있으면 누가 하나님을 믿겠어요?
이번 성화설교에서 이렇게 생각해봐요! ‘날보고 누가 예수님을 믿을까?’ 옆에 분에게 물어봐요! 나를 보고 누가 예수님을 믿겠어요? 답이 나옵니까? 자신은 없지만 날보고 예수가 괜찮은 분 같고 교회가 좋은 곳 같다는 분이 있으면 여러분은 성화 되어가는 중간 단계에요!
이게 미션인데 우리는 엉뚱한 곳에서 믿음생활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공연히 헛발걸음 하는 셈이니 성장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한국교회가 달라져야 해요! 신앙도 좋아야 하지만 생활도 좋아야 해요! 기도도 잘 해야 하지만 생활기도가 좋아야 합니다. 고백한 것만큼 생활로 살아야 하고 믿는 것만큼 행동으로 그 믿음이 진짜임을 보여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성화입니다.
성화는 불편합니다. 젊은 사람들일 수록 성화에 관심이 없습니다. 교회서는 눈물의 경배찬양을 하고 예배당 밖으로 학교에 가면 도루묵입니다. 선택이나 행동이나 언어생활에 별 차이가 없습니다. 성별이 없는 거예요! 교회 다니거나 안 다니거나 그 나물에 그 밥입니다.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는 추락 중입니다. 사람들이 단어를 고를 줄 몰라서 그렇지… 예배당을 크게 짓는다? 기독교가 상업화되었다? 목회자들의 탈선? 이런 것도 비판하지만 사실은 내 주변 교인들이 생활에서 성화의 중간단계가 없는 것에 실망하고 싫은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도 한국교회의 문제는 세습이나 재정비라나 예배당건축보다 성화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화를 명령하십니다.
거룩한 아버지 나를 닮아라….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니까 보이시는 하나님, 예수님을 주신 거예요!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 자비와 긍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 베끼는 거예요! 이럴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그거 생각해보면 되요. 예수님은 자신을 먼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남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항상 자신을 덜 생각한 것이지요!
이런 예수님을 카피하는데 20년을 믿고 30년을 믿었는데도 성화 모양체가 나오지 않는 것은 무슨 문제일까요? 표절이라도 해야 하잖아요? 하나님께서는 하루아침에 오이나 콩나물이 자라듯이 그런 성화를 기대하지 않으세요! 그런 기대는 바울을 비롯한 1% 이내의 신자들입니다. 99%는 참 답답하게 자라고 성화의 길을 갑니다. 그 안에 내가 있어요!
하나님은 조금씩이라도 자라라는 것입니다. 믿은 세월만큼! 성경 읽은 것만큼! 설교를 들은 것만큼~ 조금씩 자라라! 다른 말로 밥값 하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라나지 못합니다. 믿음의 밥값을 못해요! 왜 그래요? 성화의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입니다.
이번 신수성화 모델은 야곱입니다. 야곱은 성화가 가장 안 되었으면서도 성화의 최고봉에 올랐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친근감이 들어요. 왜? 야곱에게서 지독히도 성화되지 못하고 남들에게 해를 끼쳤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손에 야곱도 성화가 된다면 나도 성화시켜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 안에서의 기대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남들 때문에 일찍 집을 떠나고 객지생활을 했지만 일찍 성화의 삶을 살았습니다. 노예 신분에도 주인이 총무를 시킬 만큼 신임하고 감옥에 가두면 간수장이 총무로 삼고 죄수들이 그를 멘토로 삼는 것입니다. 모두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알았습니다.
요셉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자꾸 요셉의 위대함을 총리가 되었다, 형들을 용서했다? 이런 쪽으로만 봅니다. 그러니 성공신학의 모델이 되고 한국교회에 잘못된 축복관을 수입한 장본인이 되고 맙니다. 요셉에게서 총리보다 더 중요하고 형제를 용서한 것보다 더 중요한 면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게 성화입니다. 노예 신분이면서도 성화되어 가는 것! 감옥이라는 장소에서도 성화되어 가는 것! 형들에게 왕따 당하고 살해 위협과 버림을 당한 처지에서도 꾸준히 성화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 이것이 요셉의 위대함! 이걸 놓치면 안 됩니다.
야곱은 이게 안 되는 사람입니다. 야곱은 남을 골탕 먹이고 야반도주합니다. 사실은 그 안에서 용서를 빌고 형의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형에게 구박 당하면서 그만큼 대가를 치루겠지요? 그러면서 성화가 되는 거예요! 에서 형에게 맞으면서 사기를 친 죄를 뉘우치고… 구박을 당하는 고생을 통해 남을 속인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일찍 성화가 됩니다. 내가 일찍 성화가 되면 내 아내들이 내 자식들이 그만큼 덜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도망쳐 버렸습니다. 성화의 길로 들어서지 않고 사기꾼의 길로 내빼버린 것입니다. 그게 언제까지 갔어요? 세상에! 130세 나이까지 갔어요! 아이들 말로 ‘더럽게도’ 성화가 안 되거나 늦은 사람입니다. 성화의 부진아!~ 성화의 지진아입니다. 내가 성화가 늦으면, 알지요? 주변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 진다는 것! 야곱이 성화되는데 왜 이리 130년 동안 더디었나요? 인생의 목적을 성공과 출세에 두고 성화에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화의 번지수는 어디입니까?
머리입니까? 머리로 이해하고 머리로 은혜를 받고 머리에서 끝납니다. 성경 많이 읽고 알아도 성화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기도를 한 시간도 좋고 모두에게 찬탄과 감동을 줄만큼 유려하게 잘 합니다. 그런 기도 백 날 해봐야 성화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기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화의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입니다.
성화(聖化)는 ‘성’자 돌림입니다. 한문으로 같은 ‘성’은 아니지만 성화는 성격, 성품, 인격입니다. 성격은 기질이고 성격이 모아지면 인격이 됩니다. 인격은 안에 있는 것이고 인품은 밖으로 흘러나오는 품격입니다. 아무리 다른 곳에 성화가 되어도 성품과 성격에 나타나지 않으면 우리 신분에 걸 맞는 인격! 성화 미션을 수행하기에 필요한 성화는 되지 못합니다.
다음시간에는 성화에 훼방이 되는 성격에 대해 전합니다. 성격 때문에 성화가 느리거나 아예 안 된다는 것! 그래서 늙으면 오히려 성화가 더 안 됩니다! 성격이 이미 굳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성화가 가장 안 되는 이유가 고집과 아집입니다. 개가 강할수록 성화가 안 되거나 얻어터지면서 성화가 됩니다. 그만큼 나도 힘들고 주변 사람들이 힘들지요! 그러니 성화가 빠를수록 나도 좋고 남들도 좋습니다.
결론
박영선 목사님은 성화에 관한 주제로 <구원 그 즉각성과 점진성>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구원은 즉각성-즉시입니다. 이것이 과거형 구원입니다. 구원이 몇 년 걸려 일어나는 경우도 없고 오랜 과정도 없습니다. 구원은 일시적이며 1회적입니다. 그래서 즉각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현재적 구원-즉 성화는 점진적입니다. 조금씩, 더 조금씩 거룩하게 변화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마치 굼벵이처럼 조금씩 기어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성화는 천국에서의 상급과 영화를 누리게 합니다. 성화가 많으면 누릴 영화도 많지요! 그러니 구원을 받은 이후! 우리의 생활의 목표는 항상 성화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성화의 길을 걸어 그리스도인의 명분에 맞게… 목사의 명분에 맞게 목사답게… 장로의 명분에 맞게… 우리 모두의 교회 직분에 맞게 성화의 계단을 올라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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