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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친절한 죽음은 없다지만(요한복음 11:5~16)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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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중고서적에서

친절한 죽음은 없다지만

요한복음 11장 5~16절

서론

옛날에는 늙으면 그냥 죽으면 끝났습니다. 늙음과 죽음 사이에 기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살다가 은퇴하여 4,5년 살면 노환으로 죽었습니다. 그러기에 미리 죽음을 예감했고 그 자체가 준비가 되었기에 별로 죽음교육이 필요 없었습니다. 하늘나라만 생각하면 되었습니다.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100세도 거뜬히 바라보는 장수시대입니다. 요즘엔 “88세부터 팔팔하게 살다 99세에 가자는 말도 나옵니다. 은퇴하고도 30년 이상을 삽니다. 

 

문제는 평균수명이 늘어났지만 그만큼 말년을 고통스럽게 보내는 사람도 많아졌습니다. 늙으면 죽는 것이 아니라 오래 살고 오래 아프고 가족들을 오래 고생시키다 떠납니다. 고령화에 따른 질병 증가로 늙어가고 죽는 과정이 길다보니 가족이나 집이 아니라 요양원에서 병원에서 대부분 혼자 죽습니다. 가족 해체와 1인 가구의 확산으로 고독 사()의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미국은 1945년까지만 해도 대부분 집에서 가족과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1980년대에 이르자 비율은 17%로 줄었습니다. 100명 중에 17명만이 집에서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세상을 떠났고 나머지 83명은 요양원이나 병원에서 혼자 떠났습니다. 그렇게 홀로 떠나면 부모님 사후에 불효에 대한 후유증이 큽니다. 형제간에 서로 탓하다 아예 등을 돌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교회교육이 성경을 가르치는 주일학교 교육만 아니라 마지막 10년을 죽음을 잘 준비하는 교육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교사주일과 함께 교회교육주일로 넓힌 것입니다. 

교회교육은 무엇인가? 단순하게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어떻게 살까? 웰빙(well-being)입니다. 육체 건강과 정신 건강의 서로 간에 조화를 잘 이루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웰빙! 어떻게 살까? 는 결국,

 

-어떻게 죽을까? 웰다잉(Well-Dying)을 전제합니다. 웰다잉은 아름답게, 평안하게 정리하는 삶의 마무리입니다. 내 삶의 마지막이자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인상 깊은 영향력을 남겨놓을 죽음을 스스로 준비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한국죽음학회는 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맞이하는 죽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어떻게 잘 죽을까, 웰다잉은 결국

 

-어떻게 품위 있게 늙어갈까? 웰에이징(well-aging)입니다. 늙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 이런 점에서 행복한 은퇴설계의 끝은 죽음에 대한 계획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맞이하는 죽음을 돕는 학문이 죽음학’(thanatology)입니다. 오늘까지 버젓이 살아 있다 내일이면 영원히 없어져 버릴 자기소멸, 왜 죽어야 하며, 죽음을 대비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그게 죽음학입니다. 

 

문제는 대부분이 하나님은 고려하지 않은 채로 죽음을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설계하지 않는 죽음은 어디로 가는지 조차 모르기에 아무리 준비해도 정작 죽음 앞에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으면 됩니까? 준비된 죽음을 맞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 이런 마음의 자세를 갖추고 사는 것이 죽음 준비법 1번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성씨(姓氏)는 고()씨입니다. 장례식에서 이름 앞에 모두 고() 아무개라 합니다. 대통령이든 목사든 모두 고() 아무개, 그러기에 천년만년 살 거라, 생각하다 어느 날 느닷없이 죽음을 당할 때 이럴 수가 있나? 당황하거나 분노하지 말고 언제라도 죽음을 맞이하려는 준비를 차곡차곡 쌓아놓았다가 죽음이 오면 잘 맞이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본문을 봅시다. 베다니 마을에 세 남매가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33년 지상생애에서 유일하게 가족처럼 생각했던 가정입니다. 어떻게 이런 인연이 비롯되었는가,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동쪽 여리고로 가는 길목 약 3 지점의 작은 마을로 안식일 규례에 걸리거나 성전제사에 대한 준비를 위해 잠시 쉬는 마을이기에 예수님도 종종 머물다보니 친한 사이가 되었던지, 마르다는 음식 솜씨가 좋고 마리아는 경청의 솜씨가 좋고 나사로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우정관계가 되다보니 매우 가깝게 지냈던 것 같습니다.

어떻든, 예수님과 그렇게 가까운 사이였지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1, 어떤 병자가 있으니

2, 병든 나사로는

3,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듣고.

 

세 남매는 미혼이었기에 죽음을 생각할 연령은 아닙니다. 그런데 덜컥 병에 걸려 죽습니다.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전혀 준비되지 않는 상태에서 죽음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랑하는 자임에는 틀림없지만 죽음조차 사랑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부모 없이 살아온 남매이기에 집안의 기둥 나사로의 죽음은 충격입니다. 떠나는 오라비도 떠나보내는 누이들도 울며불며 야단이었을 것입니다. 준비되지 못한 죽음은 누구에게나 충격입니다. 여기서는 춤추게 하시는 예수님조차도 일시적으로 멈칫~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죽음은 두렵고 슬픈 것입니다.

 

죽음학에서 세계적 권위자인 엘리자베스 퀴불러 로스는 말기환자 6백 명을 관찰 상담 연구하여 <죽음의 순간>이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환자들은 5단계의 과정을 보인다고 합니다.

 

1단계, 부정:“내가 죽더니 말도 안 된다” “우리 엄마가 죽다니 말이 안 돼!”

2단계, :죽어야 할 사람이 많은데 왜 하필 내가?”

3단계, 타협:“어떻게 하면 더 살 수 있을까?” 기도를 통해 빅딜까지 제시합니다.

4단계, 우울:“다 끝났어 병이 깊어지고 가망이 없으면 우울증이 옵니다.

5단계, 수용:“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을까?” 천국을 받아들입니다.

 

베다니의 세 남매도 이런 단계를 겪었을 거예요! 문제는 3, 사람을 보냈는데도 예수님이 오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배신의 마음으로 세상을 떠났겠지요? 두 자매는 오라비를 보내는 충격과 함께 예수님에 대한 섭섭함과 분노가 있습니다. 그래서 3일 후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전갈을 받고 20, 마르다는 마중을 나가지만,

20, 섭섭함을 토로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마리아는 섭한 감정을 더 노골적으로 나타냅니다. 친절한 죽음은 없기 때문입니다.

 

20,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주님에 대한 섭섭함도 있고, 오라비의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님을 그렇게 대접했겠지요! 이렇게 준비되지 않는 죽음은 모두에게 깊은 상처와 분노를 남기게 됩니다. 이렇게 죽음은 자칫 좋은 관계들을 갈라놓습니다.

 

20세기 초만 해도 미국의 64세 이상 노인 65%가 자녀들과 살았습니다. 1960년대에 이르자 25%로 떨어졌습니다. 유럽에서는 80세 이상의 노인 중 10%만이 자식과 함께 살고 절반 이상은 배우자도 없이 혼자 살아갑니다. 나이 든 부모가 혼자 살게 내버려두는 것을 불효로 생각하는 한국인들조차 상황은 다르지 않습니다.

 

최근 수백 년을 제외하고는 인류의 수명이 30세 이하였습니다. 로마제국의 평균 수명은 28세였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수명이 30세를 넘지 못했다는 것은 채 늙기도 전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노화로부터 오는 시력, 청력 기억력 상실, 틀니 이런 과정이 없이 그냥 급강하합니다. 그러니 죽음은 온 마을이 함께 모여 감사와 존경의 장례식으로 그 죽음을 기렸습니다.

 

요즈음 60~75세를 신중년이라 합니다. 몸도 마음도 겉으로는 젊고 건강해도 사실은 온갖 병치레를 합니다. 일제시대나 6·25전쟁 전후로 태어났기에 먹지도 못했고 기를 펴지도 못했습니다. 건강의 1번이 인데 근육, 근력이 약해요! 그래서 각종 질병에 노출됩니다. 심장병 고혈압 치매 파킨슨병 암() 중풍 여기에 화병까지 그래서 대한민국 국민들은 인생 마지막 10년 중 절반 이상을 앓으며 지냅니다.

 

15년 전 한국인은 남자가 3.4년 아프다 73.4세에, 여자가 4년 정도 앓다 80.4세에 세상을 떴습니다. 요즘엔 남녀 모두 5~6년씩 고생하다 남자 76.8, 여자 83.7세에 생을 마칩니다. 오래 사는 대신 오래 앓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 장수가 재앙이다, 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노인들! 마지막 10년의 절반을 병치레 하다 가는데 이 과정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갑자기 100세시대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다른 시대보다 3배의 수명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갑작스레 오래는 살게 됐지만 건강은 미처 따라오질 않아 인생 마지막 10년 중 절반 이상을 앓으면서 보냅니다. 그러니 간병 등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증폭됩니다.

 

한국의 의료체계는 일단 아프면 살려놓고 보자~입니다. 유럽에서는 암 말기환자들에게는 호스피스제도를 통해 대화하고 죽음을 준비할 기회를 줍니다. 우리는 무조건 치료입니다. 내일 죽을 것 같은데도 수술합니다. 주사바늘이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치료를 합니다.

 

환자 자신의 요청도 있지만 주변가족들이 더합니다. 나중에 무슨 말을 들을까봐 의식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데도 호스를 끼워놓고 생명을 연장시킵니다. 이 모든 치료가 대부분 환자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진행됩니다. 환자는 가족들의 여러 사정과 이유 때문에 인생의 마지막을 병원에서 주사바늘로 멍든 상태에서 멍한 상태로 살다갑니다. 살아있지만 사는 게 아니지요! 그러니까 죽음의 질()’을 따지는 조사에서 영국이 1, 우리는 32위에 처져 있습니다.

이 죽음의 현장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님, 과연 죽음 앞에서! 인생의 절망 앞에서 나사로와 마르다 자매를 춤추게 하실까요? 주님은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5, 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마르다에게서 아멘! 이라는 말을 들으신 후에 무덤에 나가 외칩니다.

43,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러자 44, 나사로가 베옷을 입은 채로 무덤에서 나왔고, 초상집은 순식간에 잔칫집이 됩니다. 춤추게 하시는 하나님은 초상집에서조차 춤추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죽음에서 춤추게 하시는 하나님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초상집에서 춤춰야 하나요?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살려주지는 않습니다. 3년 공생애 기간 중에 12세 소녀, 나인성 청년, 베다니 나사로 오직 세 사람만을 살렸습니다. 그들도 나중에는 죽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죽음 이후의 세계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죽음 앞에서 나 자신의 죽음이든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이든 죽음 앞에서 부활이요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마르다처럼 내가 믿나이다! 신앙으로 고백하면서 우리 인생의 마지막 10년을 어떻게 살까, 웰빙 어떻게 늙어갈까 웰에이징, 그리고 어떻게 준비되었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웰다잉 인생의 가장 중요하면서도 기본인 이런 것들에 대한 분명한 정리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나사로는 살아난 이후에는 죽음이 무서워 한 번도 웃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죽음을 준비하며 매사에 진실했고 남은 인생은 그만큼 행복수명입니다.

 

행복수명을 늘리려면 전문가들은 경제력, 건강, 가족 삶의 '3대 요소'를 말합니다.

 

-자신의 '잔존 가치' 높이고 '경제 수명' 늘려라!

-심리적 건강관리로 '건강 수명'을 늘려라! 노인들의 심리적 만족도가 매우 낮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소통 수명'을 늘려라

 

영국 메디컬저널지(BMJ)는 품위 있는 좋은 죽음(good death)이란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삶을 마무리 할 것인지에 대해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 정의합니다. 죽음의 방식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은, 죽음을 당하기보다는 당당하게 그 죽음을 맞이한다는 의미입니다.

 

지난 10, 호주 생태학자 데이비드 구달 박사가 10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소에 안락사를 통해 스스로 삶을 마치겠다고 선언했던 구달 박사는 전날 기자회견에서 “6년 전부터 시력이 몰라보게 떨어졌고 더 이상 삶을 이어가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했습니다.

 

호주는 안락사를 금지하고 있기에 스위스로 건너와 의료진과 손자들이 보는 앞에서 치사량에 해당하는 신경안정제 주사를 맞고 운명한 것입니다. 구달 박사는 "이제 삶을 마감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장례식을 치르지 말라. 나를 기억하려는 어떤 추모 행사도 갖지 말라. 시신은 해부용으로 기증해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안락사문제는 신학적으로도 많은 문제가 있지만 죽음을 당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했다는 점에서는 높이 삽니다.

결론

우리 인생에 주어질 마지막 10!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죽음은 아닙니다. 죽음은 모두에게 오는 것이고 두렵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정작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기 전에 일어나는 일들이 두려운 것입니다. 청력, 시력, 관절염, 오래도록 앓다가 죽는 것! 병에 농락당하다 가는 그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나 혼자 죽어가거나 모르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지막 10년에 대한 죽음 맞이 프로젝트가 필요한 것입니다

 

인생의 끝 마지막 10년을 어떻게 아름답게 마무리할까요?

 

1) 끝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2) 어떤 치료를 어디까지 하는 것이 좋겠다는 사전의료의향서를 미리 작성해 두세요!

3) 불필요한 연명치료 거절을 일찍 말씀해 두세요!

4) 가족들이 힘들만큼 병세가 악화되거든 호스피스병동으로 옮겨 달라 하세요!

5) 유언장은 미리 작성하세요! 재산분배는 물론이지만 신앙대물림, 장례식 절차도 포함됩니다.

6) 기도와 말씀읽기를 통해 총기가 잃지 않도록 정신건강을 지켜내세요

 

12:1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성경에서 가장 잘 준비된 죽음을 보여준 사람은 여호수아입니다. 모세는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르게 혼자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보내놓고도 후처를 얻어 6명의 자녀를 낳으면서 너무 평범하게 말년을 보냅니다. 예수님은 사역 때문이기는 해도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었습니다. 야곱은 장엄하게 죽었지만 그 삶이 험악했습니다

 

여호수아는 110세 장수로 건강수명 사명수명 행복수명 영적수명 모두에게 최고의 점수를 받고 잘 준비된 죽음으로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죽는다면 죽음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친절한 죽음은 없지만 예수님께서 살려주시는 나사로의 죽음이라면 죽어볼만도 할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죽고 주님 안에서 다시 사는 법을 알고 죽는다면 언젠가 우리에게 찾아오는 죽음 앞에서도  석양의 노을이 아름다운 것처럼 우리의 생애마감표로 주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죽음을 아름답게 빛내는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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