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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누구 탓이라고 하는 한(요한복음 9:1~7)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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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참고삼아
참고 삼아

누구 탓이라고 하는 한

요한복음 9장 1~7절 

서론

한 사람이 부모를 통해 세상에 들어오는 순간, 금수저를 물기도 하고 흙수저를 물고 태어나기도 합니다. 어떤 부모를 만났느냐, 어떤 신체조건, 어떤 외모, 두뇌를 갖고 태어났느냐 이게 성공과 행복의 80%이상을 차지합니다. 조건만 좋으면 승용차 인생이지만 흙수저로 태어나면 달구지 인생마냥 달그락거리며 살아갑니다. 달구지인생이 성공하려면 남보다 더 노력하고 고생하고 땀과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심각한 장애로 태어난다면 억울하기가 말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맹인은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입니다. 

시각장애는 1~6급으로 나뉘지만, 크게는 빛을 지각하지 못하는 전맹(全盲)과 행동이 곤란한 저시력으로 구분됩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회원은(2020년) 14만명, 미등록을 포함하면 29만 여명으로 추산됩니다. 눈은 정보의 70%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70%의 정보를 접하지 못하고 그만큼 삶이 풍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정보의 대부분이 텔레비전과 활자인데 이게 안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즐거움은 90%가 보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아내와 남편의 얼굴, 동료들의 얼굴, 산과 들과 바다, 꽃가 나무들 영화의 미술 모든 즐거움은 눈으로 옵니다. 그러기에 눈이 처음부터 기능을 못하거나 후천적으로 고장이 나면 그만큼 불편하고 웃을 일, 행복할 일이 없어집니다. 속히 시각장애인이 사물을 볼 수 있는 대체안구가 발명되었으면 합니다.

 

여기 이 남자, 몇 살이나 되었을까요? 부모슬하에 있는 것으로 보아 30세 이하입니다. 요즘처럼 사회복지가 되지 않고 마땅히 할 일도 없는 시절에 집에서나 공동체에서나 잉여인간 취급을 받았습니다. 잉여인간은 남아도는 인간 쓸모가 없는 사람입니다. 가장 비참한 인간입니다. 그러니 풍성한 삶이고 춤이 없습니다. 

어떻게 견딜까요? 팔자소관으로 견딥니다.

팔자소관

왜 이런 사람들이 태어나는 것일까요? 왜 이렇게 태어나야만 했을까요? 춤도 출 수 없는데 인생이라는 춤의 무대는 왜 주시는 것일까요? 이런 해석에, 팔자소관이 나오는 것입니다.

 

팔자소관은 타고난 운명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당하는 일을 말합니다. ‘운명은 인간의 노력이나 능력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이고 팔자는 육십갑자로 표현한 8개의 글자로 생년월일시 개인에게 주어진 운명적인 흐름을 사용하는 말로 사주(四柱)라고도 합니다.

 

두 단어 모두 열심히 노력해도 노력한 만큼의 대가가 오지 않을 때가 많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팔자를 바꿔보려고 무당을 불러다 푸닥거리를 하고, 부적, 개명을 합니다.

 

그러다 이게 안 되면 그냥 체험하고 살아요! 그러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집니다. 인도나 태국 등 불교나 힌두교 등을 믿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운명론을 믿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애써도 타고난 팔자가 있고 운명이 있기에 거슬리지 말고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으로, 되는 것은 되는 것으로 살면 마음이 편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어디 인간의 삶인가요?

 

여기 이 젊은이도 그렇게 살아왔을 거예요! 할게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자려니 내 운명이려니 갑갑하고 답답할 때마다 팔자소관이나 하며 살아왔을 거예요! 풍성한 삶이 없는 거예요!

이 사람이야 맹인이어서 그렇다하지만 두 눈 멀쩡히 뜨고서도 팔자 소관자들이 있습니다.

남의 탓 소관

팔자소관이 아니라면 남의 탓하며 견디는 것입니다. 시각장애인을 두고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장애가 누구의 탓이냐? 누구의 죄탓, 누구의 잘못이냐는 도덕적 질문입니다. 사실은 시각장애인에게는 도덕적인 질문이 아니라 의학적인 질문이어야 합니다. 이 사람이 왜 그랬는가? 임산부가 약을 잘못 먹었나? 아이에게 어떤 요소가 부족했는가? 병은 의학적으로 접근을 해야 하는데 제자들은 도덕적인 질문을 합니다. 질문이 잘못되니 처방도 잘못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에덴의 뱀은 여자에게 묻기를,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부정적인 질문입니다. 부정적인 질문은 부정적인 대답을 불러옵니다

 

동산중앙에 있는 나무실과는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인색한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부정적인 질문에 부정적인 대답이 나온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죄에 오염된 이후 부정적인 씨를 갖고 태어났습니다. 긍정(肯定)보다는 부정(否定)이 먼저입니다. “엄마 먹을 것 없어요?” “여기 누가 없어요?” 부정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생물학적 질문을 해야 하는데 도덕적인 질문을 합니다. 도덕적 질문은 도덕적인 결론, 죄 때문에 불행이 생기고 죄 때문에 병이 온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은 욥의 세 친구들의 해석입니다. 죄가 없으면 어떻게 이런 불행이 왔느냐, 율법적인 해석입니다.

 

문제는 교인들도 이런 율법적 시각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병이 왔다 죄 때문에 가난이 왔다 죄 때문에 망하게 되었다 물론 죄 때문에 오는 병이 있습니다. 에이즈는 잘못된 성() 관계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매독이나 임질도 그렇습니다. 술을 먹고 노름하고 방탕하게 살다가 그 죄 때문에 가난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한 쪽의 잘못으로 가정이 쪼개지고 해체되기도 합니다. 음주운전하고 자동차를 몰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온몸이 망가지기도 합니다. 이런 위기들, 불행들은 죄 때문에 옵니다

그러나 많은 불행은 죄와 상관없이 끼어듭니다. 이걸 무시하고 모든 불행을 도덕적으로 해석하면 누구의 이냐, 원망합니다. 심각한 장애아의 경우, 엄마 탓이냐 아빠 탓이냐? 생물학적으로 이런 아기들이 백만 명 당, 5백만 명 당 한 명꼴로 나올 수도 있는데 도덕적으로 해석하면 부부 중에 누구의 죄 때문이냐? 그래서 견디기가 힘들고 부부싸움을 하다 헤어집니다.

 

내 불행이나 타인의 불행에 누구의 탓, 혹은 내 탓이라는 해석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런 시각은 우리를 건강하게 세워주는 것이 아니라 이중적으로 더욱 힘들게 만듭니다. 남들의 아픔에 너무 쉽게 도덕적으로 진단하고 율법적으로 정죄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전생 소관

제자들은 불행의 이유를 누구의 탓으로만 돌린 것이 아니라 과거와 연결합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 누구의 죄로 인함입니까? 태어날 때, 이건 과거입니다.

사람이 불행할 때 과거에 집착하면 더 불행해 집니다. 지난 날 누구 때문에 지난 날 누구 탓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 아니면 그때 내가 잘못했다 과거는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좋은 추억의 과거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만 나쁜 추억은 불행하게 만듭니다. 억울한 과거는 지금의 나를 억울하게 만들고 슬픈 과거의 추억은 지금의 나를 슬프게 만들어 냅니다.

 

제자들은 미래를 말하지 못했기에 춤을 추지 못합니다. 청년의 미래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용하시고 간섭하실까? 청년은 어떤 사람으로 변할 수 있을까? 미래를 묻지 않았습니다.

 

청년에게 지금은 시각장애인이다, 여기에 예수님이 계신다. 과거에 집착해서 누구 탓이냐 부모 탓이라 생각하며 부모를 원망 말고! 네 탓이라 자책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나를 어떻게 해주시고 사용하실까? 예수님에게 미래를 묻고 미래를 맡겨라!” 그렇게 말해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과거의 관점입니다. 과거의 관점을 가지니 자신에 대한 절망, 부모에 대한 원망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지향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행복할 수 없고 춤출 수 없습니다. 과거는 관계를 악화시키고 인생을 퇴행시킵니다. 믿음도 과거지향으로 나가면 왕년에 이런 말로 지금의 열정 없음을 위장하고 맙니다. 과거가 그를 망치고 믿음 성장의 발목을 잡습니다. 부부싸움도 대체적으로 과거문제를 붙들고 늘어지다가 함께 살아갈 미래를 포기하고 맙니다.  

 

질문은 그 사람의 수준입니다. 제자들은 이미 해답을 갖고 묻고 있습니다. 그것은 시각장애를 죄로 보았고 부모나 자신 중의 누구 하나의 죄로 본 것입니다. 과거지향적 질문입니다. 과거에 무슨 희망이 나오겠어요? 질문법을 배워야 합니다, 좋은 질문을 해야 좋은 답이 나옵니다, 바른 질문을 해야 바른 대답을 얻습니다. 미래지향적 질문에 미래지향적인 답이 나옵니다.

 

상담과 코칭의 차이점은, 상담은 과거에 연연하고 코칭은 미래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상담도 중요하지만 코칭이 없는 상담은 나쁜 과거를 회상하며 더 힘들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도덕적인 해석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서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종교적 해석을 했습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 

예수님은 미래지향적입니다. 과거로 본다면 죄 탓이고 누구의 탓이라는 원망이 나오지만 미래지향적으로 본다면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능력을 보이려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젊은이는 예수님께서 그의 눈을 뜨게 하심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낸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아니 자기도 춘추고 예수님도 춤추게 하시고 모두 춤추게 만든 것입니다.

 

신앙은 눈()의 문제-시각의 문제입니다. 상황을 어떤 눈으로 보느냐,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불행이 화()가 되고 복이 됩니다. 우리가 어떤 불행을 자꾸 도덕적으로 해석하고 과거로 눈을 돌리면 불평과 다툼밖에 없습니다. 서로 물고 뜯다 더 불행해집니다.

 

19세기 영국에 복음이 열풍이 불었습니다. 엘리자베스 프라이라는 여성이 형무소 교도소로 바꾸는 운동을 펼쳤습니다. 형무소는 죄의 대가를 치르는 곳”, 인과응보적 개념입니다. 교도소는 교도” “교화한다는 의미입니다. 형무소는 응징의 개념이고 교도소는 변화의 개념입니다. 형무소는 과거지향적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교도소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이냐? 미래지향적입니다. 같은 죄인을 두고서도 시각이 바뀌니까 전혀 다른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과거지향적인 시각을 버려야 합니다. 종종 어떤 사람을 두고 과거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과거 그가 이런 사람이었다, 저런 사람이었다 이런 시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 성장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과거에 연연하면 성장하지 못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미래지향적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 될까? 그를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일을 행하실까? 그것을 기대할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게 해결되지 못하면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고 밝은 눈으로 왔지만 춤추지 못합니다. 전에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인이 되지만 지금은 앞을 보는 장애인이 됩니다. 전에는 절망적인 장애인이 되지만 지금은 원망하는 장애인이 됩니다. 무얼 원망하는가요?

 

지금 이 나이에 내가 무엇을 먹고 살란 말이냐?”

왜 나의 과거는 그래야 했는가?”

 

육신의 눈만 아니라 마음의 눈도 미래지향적으로 고침을 받지 못한다면 지금인들 금수저이겠어요? 눈이 열려 있는 것 하나만 상황이 달라졌을 뿐, 흙수저 상황은 동일합니다. 그러면 눈을 뜨고서는 오히려 반항과 원망이 더 거칠어집니다. 

그러면 더 못된 사람이 됩니다. 차라리 앞을 보지 못했다면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했을 것이고 고분고분이라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을 뜨고 난 후에 오히려 더 많은 불평과 반발을 늘어놓았을 것입니다.

 

프랑스 출신으로 노벨상 작가인 앙드레 지드의 <전원 교향악>은 앞을 보지 못하는 소녀 제르트뤼드의 개안(開顔)과 폐안(廢眼) 사이의 갈등을 그린 소설입니다. 제르트뤼드는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불행한 소녀인데 목사가 키워줍니다. 제르트뤼드는 목사에게 간절하게 묻습니다.

 

정말로 땅은 새들이 노래하는 것처럼 아름다운가요? 사람들은 왜 그 이야기를 더해주지 않는 걸까요?” 목사는 그녀에게 위로하듯 대답합니다.

눈이 보이는 사람들은 새들의 노래를 잘 듣지 못한단다.”

 

제르트뤼드는 목사와 함께 전원에 나가 보통 사람들은 듣지 못하는 전원의 교향악, 대지의 교향곡을 즐겨 듣습니다. 환희와 은총에 젖어 듭니다. 그녀의 영혼에 은혜의 빛이 깃듭니다. 목사의 사랑으로 세상과 인생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이 생깁니다. 플라토닉한 영혼의 사랑입니다. 눈멀었을 때 그녀는 목사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수술로 육체의 눈으로 보니 사랑한 것은 목사가 아닌 아들 자크였습니다. 자크는 이미 가톨릭으로 개종해서 신부가 되어 있었습니다. 목사를 사랑할 수도 없고, 가톨릭신부 자크도 사랑할 수 없는 제르트뤼드는 무척 괴로워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그녀는 영혼이 죄로 너무 더러워짐을 고민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립니다. 육체의 눈이 개안되면서 영혼의 눈은 폐안되는 아이러니, 눈이 멀었을 때는 죄를 몰랐지만 눈이 열렸을 때 죄도 들어왔습니다. 

 

그러니 그녀가 보게 되는 것은 행복의 춤이 아니라 불행이고 죄에 물들어 가는 영혼이었습니다. 그녀는 죄의 춤을 출 수 없어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만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부모, 제자들, 15절 이하의 바리새인들은 건강한 눈을 가졌다 하나 사실은 영혼의 색맹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던 사람이 가룟 유다였다면 여기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눈을 고쳐주었다고 그걸 노동이라면서 춤의 무대에 올라 춤추려는 불쌍한 이 청년! 생애 처음으로 멋진 왈츠를 추고 있는 이 젊은이를 끌어내리려는 바로 그 사람들이 진짜 맹인입니다!

결론

태어나면서 앞을 보지 못하고 살던 젊은이! 춤추게 하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5절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하십니다. 빛이신 분이 빛을 잃은 젊은이에게 춤추자 하십니다.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눈은 인간영혼의 입구이자 인간육신의 출입구입니다. 눈을 통해 아름다움이 들어오지만 눈을 통해 더러움도 들어옵니다. 그래서 영혼을 아름답게 하는 것도 눈이고 영혼을 추하게 하는 것도 눈입니다. 눈을 잘 씻어야 합니다. 눈이 색맹으로 물들지 않도록 영혼의 눈을 날마다 깨끗하게 씻어야 합니다. 감사라는 렌즈를 잘 끼워서 감사할 때 감사가 우리를 춤추게 합니다

 

우리 늘빛교회가 누구의 탓이라는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눈들을 바로 시력으로 되돌려 놓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어둠에 있던 이들이 나와 춤추게 하고 하나님을 웃게 해 드리는 춤추는 예배의 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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