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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땅에 글을 쓰시다(요한복음 8:2~11)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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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글을 쓰시다

요한복음 8장 2~11절

서론

천주교에서 오랜 전통으로 내려오는 7대 죄악(罪惡)이 있습니다. 폭식-질투-나태-분노-탐욕 성욕-교만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 외부적인 죄가 아니라 우리 내면에 독사가 똬리를 트는 것처럼 숨어있어 더 치명적인 죄들입니다. 유대 랍비들은 세 가지 큰 죄를 경고합니다.

 

-우상숭배. 종교적 윤리적 사회적인 모든 차원에서 가장 큰 죄악입니다. 가나안에서 극복하지 못한 죄였는데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을 통해 우상숭배라는 죄의 녹()은 완전히 벗겨집니다.

-살인죄. 일반적으로는 죄 중의 으뜸 죄입니다. 타인의 생명을 살해하니 얼마나 큰 죄입니까?

-간음죄. 남편 있는 여자의 간음과 몸을 파는 창기의 죄입니다. 가장 더러운 죄입니다.

 

우상숭배는 가장 불경한 죄이며 살인죄는 가장 무서운 죄, 간음죄는 가장 더러운 죄입니다. 그래서 간음죄는 가장 더러운 죄이기에 가장 더럽게 죽입니다. 인분 통에다 집어넣어 목에 수건을 매서 표를 삼고 끌고 다닙니다. 그러다 동구 밖에 끌고 나가 레위기 20:10 이하에 근거해서 돌로 쳐 죽입니다. 

 

부모가 먼저 돌로 쳐야합니다. 마을에 더러운 죄가 있지 못하도록 끔찍한 상황을 보여주어 예방하려는 차원도 있습니다. 십자가도 같은 치욕을 주는 형벌입니다.

본문은 세 번째의 처형, 간음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음행은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혼자서 음행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남자는 어디로 가고 여인만 끌고 왔나요

 

남성우월주의 시대에 고의적인 행동인가요? 권력 있는 남자이기에 은폐하고 있나요? 남자가 줄행랑을 쳤을까요? 모두 문제가 있어요! 고의적이라면 관습이 나쁘고 남자의 죄를 은폐했다면 여인만 끌고 온 이들이 나쁘고, 줄행랑 쳤다면 비겁한 남자입니다. 여자 혼자 놔두고 도망질 했다면 이런 나쁜 남자에게 순간이나마 속아서 춤추었던 것이지요! 

 

여자들은 어찌된 속성인지 나쁜 남자들을 좋아합니다. 이 여인도 나쁜 남자에게 걸린 것입니다.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유대 교권자들의 불순한 의도를 봅니다. 모세가 율법에 그랬다면 그런 것이지 언제 예수님의 의향을 존중했다고 이런 질문을 할까요? 골탕 먹이려는 난제의 질문입니다.

 

살다보면 질이 나쁜 사람들 때문에 힘듭니다. 뻔히 알면서도 골탕 먹이려 질문하는 학생, 다 알면서도 남편을 떠 보는 아내, 공연히 목사를 떠보는 교인들, 질이 좋은 경우는 아닙니다.  

 

어떻든 예수님의 딜레마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율법대로 돌로 쳐 죽이라 하면. 백성들과 이간시키겠지요!

 

저 사람 사랑이 없다! 그동안 가짜 교훈을 전했다!”

율법대로 죽이라 한다면? 로마에 고소할 조건이 성립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치정부의 형태로 사형 언도권은 있지만 사형 집행권은 로마정부가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살려주라~! 율법을 거역하면? () 율법주의로 몰아세웁니다. 유대인에게 율법을 절대 기준입니다. 그래서 모세와 에스라를 가장 존경합니다. 모세는 율법을 받은 사람이고 에스라는 율법을 해석한 사람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6절에 질문의 의도가 나옵니다.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님께서 저들의 흉계를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의도를 알면서도 곤란한 상황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예수님의 딜레마입니다.

 

어찌해야 됩니까? 인간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 어떻게 양자에게 빛이 될 수 있습니까? 의견이 다르고 상황이 다른 사람들! 이 사람들 옹호하면 저 사람이 반발하고 저 사람을 감싸면 이 사람이 비난합니다. 양쪽 모두에게 동시에 빛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딜레마!     

 

8,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이럴 때,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무얼 쓰셨을까. 어떤 내용을 쓰셨을까? 사실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 쓰셨을까? 그게 더 중요합니다.

 

성경을 보는 관점이 그렇습니다. 창세기 1장을 읽으면서 천지창조의 순서를 중시합니다. ‘요일마다 무엇을 창조하셨나?’ ‘무엇을 창조했나?’ 그걸 중시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창조하셨나? 그게 중요해요. 사람을 며칠에 창조하셨나? 보다 왜 창조하셨을까? 그게 중요해요!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 누군가를 이해하는 비결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판결보다는 왜 땅에 글을 쓰셨을까요?

-시간을 벌었습니다. 

시간을 두고 격한 감정을 추스릅니다. 저들은 여인을 통해 예수님을 올가미에 묶으려 합니다. 죄는 여인이 저질렀는데도 그 죄의 올가미를 자신에게 씌우려는 종교지도자들. 예수님은 시간을 벌며 곰곰이 생각하셨습니다. 주님도 육신을 입으셨기에 선택에 대한 갈등이 있습니다. 그래서 땅에 글을 쓰며 생각을 정리합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글을 쓰시며 시간을 끄는 것은 어떻게 보면 군중들을 위함이 아닌가, 싶습니다. 군중은 쉽게 흥분됩니다. 그래서 독재자들은 군중의 조급함을 이용합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감정이 갈아 앉도록 하십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 조급하면 실수한다! 선택하고 행동하기 전에 생각을 해야 한다. 예수님은 군중들의 실수를 막으십니다.

 

-예수님은 11로 상대하십니다. 

사람은 군중으로 만나면 사납지만 개인적으로는 다 좋은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인간 본성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글을 쓰셨습니다. 원어는, “대항해서 글을 썼다 아무렇게나 낙서가 아니라 상대방을 대항해서 썼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해석은, 군중들의 죄의 제목을 써내려 가셨다! 간음 살인 도둑질 불효 거짓증거 한 사람 쳐다보고 글 쓰시고

그것도 아니라면 남자는 어디 갔느냐?” “남자는 왜 못 데려오고 연약한 여인이나 끌고 난리냐? 졸장부들아!” 그런 내용을 쓰셨을까요? 어떻든 개인적으로 한 사람씩 상대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돌로 쳐라!”

죄가 없는 자, “죄에 대한 욕망이 없는 자입니다. 돌을 던지기 전에 정말 자신은 깨끗한가? 자신을 살피라는 것입니다

너도 아름다운 여인이 유혹한다면 외면할 수 있겠느냐? 너도 멋진 남자가 유혹하면 외면할 수 있겠느냐? 너흰들 연속극을 보면서 저런 사랑이라면 나도 그런 마음이 안 들더냐?’

 

그러면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그래, 이 여인이 잘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돌을 던질 정도는 아니야~ 저 여인의 죄가 약해서가 아니라 내게 정죄할 자격이 없어! 나도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걸! 나는 생각으로 죄를 짓고 저 여인은 행동으로 죄를 지은 차이점에 불과해~ 나도 같은 사람이야~

 

두 수도승이 강을 건너려던 중입니다. 물이 불어나 남자들도 건너기 힘든 강물입니다. 그때 아름다운 여인이 달려오면서 오늘 꼭 건너야 한다고, 제발 나를 업고 건너 달라 애원합니다. 두 수도사는 특별수도 중이기에 여인과 눈이 마주쳐서도 안 되고 옷깃을 스쳐서도 안 됩니다. 

 

더군다나 여인을 등에 업었다면 지금까지 수행기간은 도루묵입니다. 수행심이 강한 수도사는 못 본 척 강을 건넙니다. 다른 수도사는 망설이다 여인을 등에 업습니다. 앞서가는 수도사는 속으로 분노했습니다.

아니, 수도승이 여인을 업다니, 여인의 육체와 하나가 되다니~ 신의 노여움을 받을 일이야!’

 

무사히 강 건너에 도착한 여인은 고맙다며 작별을 했습니다. 여인의 청을 거절했던 수행심 강한 수도사는 사라지는 여인을 멍~하니 바라보다 여인을 업은 수도승을 힐난합니다.

너는 순결한 마음을 신에게 드린다, 서원해 놓고 어찌 여자를 업었더냐? 수행자의 계율에 어긋난다는 걸 몰랐더냐? 여인이 등에서 너를 끌어안을 때 정욕이 불타지 않더냐? 너는 파계승이 되고 만 거야!”

 

그때 여인을 업었던 수도승이 조용히 꾸짖습니다.

형제여, 나는 등에서 여인을 내려놓았거늘 너는 어찌 마음에서 여인을 내려놓지 못하느뇨?”

 

수행심이 깊다는 수도승은 차마 여인을 업지 못했지만 동료 수도승에 대해 질투심으로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인의 냄새는 어쩔까? 여인에게서 나오는 그 숨결은 얼마나 따뜻할까? 그러면서 혼자서 의인인척 동료수도승에게 돌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땅에 글을 쓰시면서 물음을 던지십니다. 너는 안 그랬느냐? 마음으로 한 번도 여인을 품은 적이 없더냐? 내가 너를 아는데 내가 너를 아는데 내 앞에서 죄가 없다면 돌을 던져라~!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씩 눈을 맞추었습니다. 마음을 꿰뚫어보는 눈입니다. 유년시절의 죄, 정열에 불탔던 젊은 시절 사랑을 나누고 버렸던 여인들, 사업을 한다고 술자리에서 만났던 여인들에게 수작을 부렸던 죄들 너그들은 운이 좋아 들키지 않았고 이 여인은 들켰다는 차이밖에 없어~ 그래도 여인을 향해 돌을 던질 자들은 던져라! 돌을 던지는 순간, 내가 너희들의 죄를 이 사람들 앞에서 낱낱이 까발려주마~ 그땐 너도 이 여인의 신세가 될 거다! 어디 돌을 던져봐라~

 

그러자 처음에는 눈을 내리깔더니, 두 번째는 돌을 제자리에 내려놓더니, 다음에는 뒷걸음질을 치다니 안 그러면 죄를 드러낼까봐, 슬그머니 하나씩 떠나갔습니다.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때는 그래도 양심 기능이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미적거리고 떠난 것은 죄가 까발림 당할까봐 그런 것이지 정작 자기 죄에 대한 자기반성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 정도라도 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돌을 던지는 사람들은 아닌가요? 그러면 언젠가 내가 실수할 때 그들이 내게 돌을 던질 것입니다. 내가 남들 비판할 때 나도 그런 입장이라면 그걸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우리도 그 자리에 남아있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다고 여인의 죄를 합리화시켜 주지 않았습니다. 

일대일이 되었을 때 여인에게도 경고했습니다.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즘 얼치기 예수님 흉내를 내는 주장이나 사람들이 늘어갑니다. 죄는 미워하지만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라는 말에 숨어서 죄를 비호하고 옹호하고 죄를 편들어 줍니다. 더 나아가 죄를 미화시켜 줍니다. 그러면서 예수님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죄가 없다면 쳐라~”

그렇게 된 것은 제도의 잘못이라고! 부모를 잘못 만난 것이라고!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그러니 죄를 물어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가는 인본주의 주장입니다.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분명 여인에게 너는 죄를 지었다! 저그들도 죄가 있어 내게 돌을 던지지 못했지? 나만 그런 죄를 졌는가? 내게 돌 던질 놈은 하나도 없어!

그러고 갔다면 예수님은 죄를 옹호하고 조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옹호한 것이 아니라 죄를 깨우쳐 주시고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경고와 사랑의 훈계를 하신 것입니다. 앞으로는 잘 할 것이라는 기대를 거는 권면입니다. 

 

이런 권면은 욕설보다 다 아픕니다. 여인은 돌멩이를 쥐었던 율법자들에게서는 어떤 감화도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반감만 더 강해졌습니다. 그러나 용서하시는 주님에게 눈물을 보입니다. 이후 부도덕한 생활을 버렸다면 그건 예수님의 사랑의 눈과 사랑의 말씀 때문입니다. 칼 메닝거는 말합니다.

 

사랑은 사람을 치료한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양쪽 모두를!”

 

곰팡이, 아무리 걸레로 닦아내어도 다시 생깁니다. 그러나 뜨거운 빛이 비추면 저절로 사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으로 오셨습니다. 여인의 죄가 예수님의 빛으로 드러났고 그 앞에 나왔을 때 여인은 용서를 체험하고 새롭게 춤의 세계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결론

나는 누구입니까? 남의 허물을 잡아내고 사람들에게 끌고 오는 율법주의자라면 자비와 긍휼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눈과 손에서 돌을! 힘을 빼야 합니다. 온정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내가 율법 없이 죄와 놀고 있는 사람이라면 죄에 대한 율법을 강화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죄를 심상하게 여기지 않고 성화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춤출 수 있습니다.

 

정죄만 있던 세례요한! 모자람으로 고민하던 혼인집 신랑! 종교자의 갈망은 있지만 속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했던 니고데모! 다섯 남자로서도 만족할 수 없었던 수가성 여인, 38년된 병자! 빈무덤에서 울고 있던 마리아, 벳새다들판의 배고픈 군중들에게 찾아와서 춤추자~ 하시던 예수님이 오늘은 끝내 현장에서 초죽음이었던 여인을 살려내어 춤추게 하십니다. 

비록 부끄럽기는 했지만 예수님 생각만으로도 행복했고 춤출 수가 있었습니다. 그 남자가 버리고 간 파국의 춤을 예수님께서 멋진 파트너가 되어 다시 춤추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을 다시 춤추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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