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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빈들에서도 춤을~(요한복음 5:1~10)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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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중고서적에서

빈들에서도 춤을~

요한복음 5장 1~10절

서론

신약성경 27권 중에서 앞의 네 권은 무슨 성경이라고 합니까? 복음서! 4복음서라고 합니다.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성경은 마가복음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지 30년쯤 후 주후(主後) 65년 경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쯤 후에, 마가복음을 참조로 마태복음 누가복음이 기록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10년 후에 요한복음이 기록됩니다.

 

복음서들은 내용이 거의 비슷합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행하신 일들에 관한 기록입니다. 비슷한 내용이라면 마가복음 한 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니면 10년 후에 기록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만 있어도 충분할 텐데 요한은 왜 50년 후에 또 하나의 복음서를 기록했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같은 4복음서 중에서 마태-마가-누가복음을 공관복음이라 부릅니다. 공관(公觀), 같은 관점에서 보았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보기에 앞선 세 성경은 어떤 관점일까요? 사람으로 살다 가신 예수님의 33년 생애에 치중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요한이 보기에는 이것은 예수님의 빙산의 일각입니다. 세복음서는 예수님의 실체의 일각만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빙산의 9각(회중들에게 비유적인 단어임을 설명)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신 교훈이나 하신 일보다는, 예수님의 근본이 누구신가? 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탄생이나 세례로 시작하지 않고, 예수를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님의 말씀 규정하며 시작합니다. 요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 나오는 비유나 기적이 거의 없습니다. “나는 이니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니라

나는 부활이니라

나는 선한 목자이니라

나는 세상의 빛이니라

 

이런 어투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소개하는 어투와 같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3:14)

나는 거룩한 자니라”(19:2)

 

사도요한은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음을 보여주려 한 것입니다. 20장을 봅시다!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기록한 목적을 말합니다.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예수님이 누구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입니까, 사람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입니다. 세복음서가 인간 예수를 많이 보여주는 공동관점이라면 요한은 하나님 예수를 보여주려 요한복음을 썼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목적은?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믿어 무엇을 얻으려? 생명을! 그 생명은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영원히 사는 생명을 얻게 하려고 이 글을 쓴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이게 참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교훈에 신앙의 목적을 둡니다. 용서, 자비, 관용, 무비판, 무저항. 이런 사람들이 간디이고 슈바이처 같은 분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적의 재현에 믿음의 목적을 둡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소원성취가 일어나고 예수님을 지렛대로 삼아 자기계발을 하거나 성공하려 합니다.

요한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결과이지 그것이 동기나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으로 믿어야 하고 그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는 것이 믿음의 참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신 교훈이나 행적들을 보아라! 바로 하나님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어떻게 이런 일을 행할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기 바란다! 는 관점에서 복음서를 기록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게 쉽지가 않아요?

 

1, 요단강 세례식에서 예수님을 만난 세례 요한! 6개월 아래 친척동생으로 세례주고 끝날 수 있겠지요.

 

2장 가나의 혼인잔치, 물로 포도주를 만든 신통방통한 분으로 끝날 수 있겠지요.

 

3, 니고데모, 이스라엘의 해방을 말하는데 거듭남을 말씀하시는 아리송한 분으로 헤어질 수 있겠지요.

 

4장 수가성 여인, 남자 트라우마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으로 끝날 수 있겠지요.

 

5, 38년 된 베데스다 병자, 자리에서 일어나는 기적으로 끝날 수 있겠지요.

 

20장의 마리아! 빈무덤에 나타나신 예수님, 시간이 흐르며 내가 허깨비를 보았나, 그럴 수 있겠지요! 이런 사람들은 자기생애에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추억을 삼아 남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행운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그런 관점에서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걸로 인연이 끝났다면 그건 예수님의 빙산의 일각밖에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만나 문제가 해결되고 갈증이 채워지고 육신이 고침 받고 ()의 중독에서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구각-신성을 알게 되고 영생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한복음의 독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해주기를 기대했는가? 하나님 본체로서의 예수님으로 영접해서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에 거하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청중들은 두 부류입니다. 인간예수만 알고 끝나는 사람들 인간 예수로 출발했지만 하나님본체로 믿고 구원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지경에 왔는가요? 예수님을 전설이 아니라 역사적 인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그래서 교훈을 따르고 남겨진 영력으로 도움 받으며 살려 합니까? 그거로는 부족합니다. 인간예수로도 위로 받고 자기계발에 도움 받을 수 있지만 구원과 영생을 얻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영접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과 함께 풍성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본문은 오병이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였다는 익숙한 이적입니다.

문제 가운데 오시는 예수님! 여기 인생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세례요한에게는 정죄만 있지 속죄가 없습니다. 혼인집 신랑에게는 모자람이 문제되고, 니고데모에게는 종교적 갈증, 수가성 여인에게는 성중독, 베데스다 38년 환자는 육체의 질병,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희망이 죽었다면 벳새다 들판은 먹는 게 문제입니다. 먹는 문제는 인간 문제 중에서 가장 원초적이고 절실합니다. 암만 정치를 잘해도 경제문제를 풀어내지 못하면 국민은 외면합니다.

 

그건 옛날도 같습니다. 4복음서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하신 기적들이 여럿 나오는데 어느 사건은 여기에는 나오는데 저기에는 빠졌고 저기에는 나오는데 여기에는 빠졌습니다. 그런데 벳새다들판의 오병이어 이적사건은 4복음서에 모두 나옵니다(14:13-21, 6:30-44, 9:10-17). 그만큼 먹는 문제는 모두에게 절실한 관심사라는 것입니다.

 

이때는 언제입니까?

 

4절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한국인에게 명절은 스트레스입니다. 돈과 일과 혼잡한 교통, 거기다 가족, 친척이라는 인간관계로 얽히고설켜 행복한 명절이 못됩니다. 세뱃돈 받고 용돈 받는 아이들에게나 즐거운 명절입니다. 

 

유대인에게 명절은 축제입니다. 대부분 예루살렘에서 맞이하는 명절은 기대감과 즐거움으로 설렙니다. 예루살렘 명절축제에 참석하고 나면 온갖 스트레스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백성, 언약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으로 충만합니다. 이 기운으로 다음명절까지 살아갑니다.

 

그러나 지금 벳새다에는 명절분위기가 아닙니다. 벳새다는 갈릴리호수의 북동쪽, 요단 강물이 갈릴리 호수로 유입되는 입구에서 북동쪽 약 1 지점에 위치한 비옥한 평야지대입니다. 평야지대라면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 군중들은 배고픈 사람들입니다.

 

벳새다 들판! 대략 2만여 명이 종일 말씀을 듣고 귀가할 저녁이 되었습니다. 기진맥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5,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저들로 춤추게 하라!

 

오병이어의 사건에 마태복음은 그 분위기를 더 자세히 전달합니다.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14:15)

저녁이 되매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다! 그러니 어떻게 춤출 기분입니까?

모든 것이 유월절 축제를 앞둔 풍성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죽 사는 것이 힘들고 갑갑했으면 명절조차 준비하지 못하고 여기에 나왔겠어요? 이런 이들에게 춤을 추자니! 그래서 빌립은

 

7,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1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10만원으로 계산하면 2천만 원이고 그것도 넉넉한 떡과 액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빌립은 제자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예수님의 빙산의 일각밖에 보지 못하는 거듭나지 못한 제자입니다.

 

여기에 안드레가 나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의 빙산의 구각, 요한복음 1:1,2의 그 로고스, 우주의 근원, 하나님의 신성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구해옵니다.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이건 믿음이고!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이건 현실입니다.

안드레. 평소에는 형 베드로에게 가려져 존재감이 없습니다. 그런데 위기에는 나타납니다. 꼭 있어야 할 곳에 있습니다. 그는 일을 되게 하는 사람! 마중물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공동체는 이런 사람들이 있어 성장하고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런 안드레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유대인들은 식사 때마다 하나님께서 감사기도를 드리면서 복을 기원하는 오랜 전통이 있습니다. 빵을 먹을 때면 밀을 수확해 빵을 만들어 먹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포도주음료를 마실 때면 포도를 수확해 음료를 담가 먹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계속해서 일용할 양식의 복을 베풀어달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겉으로는 빙산의 일각으로서의 유대인의 관습으로 기도하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빙산의 구각의 실체, 창조주의 능력으로 빵에게 창조의 역사를 부여하십니다. 해와 달들과 별들과 산천초목을 만드신 창조주의 능력이 발휘되고 있는 순간입니다. 춤의 서막(序幕), 전주곡이 시작되고 있는 순간입니다.

기도가 끝나자 이적이 일어납니다. 떡을 떼어주는데 계속 불어나고 무한리필(!)입니다.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황량했던 들판에 춤판이 벌어집니다. 예수가 만든 들판춤판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14, “그 사람들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 사람들! 군중들은 빙산의 일각을 보았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구각은 보지 못하고 일각만 보니 종일 말씀을 들은 내용으로 보나 눈앞에 나타나는 이적으로 보나 그는 누구입니까? 그 선지자 메시아와 같은 말입니다. 여기에서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유대를 해방시켜줄 정치적 해방자입니다. 그러니 어떤 춤판으로 반응합니까?

 

15, “그들이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이런 초능력자를 왕으로 세우면 먹고사는 문제는 물론 더 큰 이적으로 단방에 로마인들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왕으로 삼으려 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말춤을 추자는 것입니다!

 

예수님, 어떻게 반응합니까? 이 사람들이 나의 일각밖에 보지 못하는구나.

 

15, “그러므로 예수께서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구각을 보지 못하고 일각에만 기대는 군중들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떡 춤을 주지 않고 기대에 어긋나면 미련 없이 춤을 끝낼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들판의 춤은 한 때의 추억으로 끝났습니다. 예수님의 일각-교훈이나 기적밖에 보지 못하니 떡이 제공되지 않으니 춤판을 떠난 것이지요! 기대감을 채워주지 못하니 예수님을 버립니다!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베드로가 멋진 대답을 합니다.

 

68,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베드로, 무엇을 보았나요? 선지자라는 예수님의 일각에서 창조주라는 구각(?)을 본 것입니다.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 창조주 하나님으로 믿고 이제 알게 되었다! 진정한 춤판이 여기에 있는데 어디로 가겠느냐? 신앙은 여기까지 가야 춤추는 생애가 됩니다. 요한은 이 사실을 보여주고 말해주고 싶어 복음을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독자라면 이걸 보아야 합니다.

결론

제자들이라고 같은 신앙과 춤을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십니다.

 

70, “내가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예수를 팔 자러라

 

누가 배신자요 배도자입니까? 예수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의 교훈과 능력이라는 일각밖에 보지 못하는 이들, 자신의 종교적 기대감, 이해와 필요를 채우기만 바라며 종교생활을 하는 이들은 결국은 떠납니다. 재미가 없던지 고난이 오던지 인간관계가 삐거덕거리거나 심지어 설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또 다른 춤판을 찾아 떠나고 수가성 여인처럼 또 다른 남자 찾아 떠납니다.

 

예수님 본체의 구각을 알고 고백하는 이들은 어려움이 있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영생의 말씀이 여기에 있는데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인생의 시련과 시험이 있을 때도 이렇게 말합니다.
영생의 말씀이 여기에 있는데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요한복음은 의심병 환자였던 도마의 고백으로 끝납니다. 20 28!

 

이제 나의 의심을 끝내고 비로소 고백합니다. 당신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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