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은 답을 알고 있다!
민수기 19장 8~10절
서론
오늘의 제목은 일본 사람 에모투 마사루가 쓴 <물은 답을 알고 있다>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설교는 일종의 패러디 설교라 해도 되겠습니다. 패러디(parody)는 어떤 작품을 흉내 내거나, 모방하거나, 폭로하거나 빗대어 다른 이야기를 하는 문학 형식입니다. 물을 통해 교회의 개혁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할까, 무엇을 개혁해야 할까, 진정한 교회개혁은 무엇인가, 살펴볼 수 있습니다. 패러디 설교이기에 그냥 편하게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우선, 물은 정결의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은 기독교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의식에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가 나일강이나 갠지스강이니… 강(江)을 중심으로 생겨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인도에서는 매년 1월 15일부터 인류 최대 종교축제 ‘힌두 패스티벌’이 열립니다. 인도말로 ‘쿰브멜라’(주전자 축제)입니다. 송파구만한 강가 모래밭에서 49일 열리는데 1억 2000만 주황색 옷을 입은 구루(영적스승)를 따라 온몸에 회백색 칠을 한 알몸의 수행자(나가사두)들은 강물에 풍덩~ 뛰어듭니다. 손으로 수차례 얼굴을 씻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이마에 갖다 대는데 어떤 나가사두는 물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키만한 머리카락을 공중에 흩날리며 소리칩니다.
“할 하르 마하데브(전지전능한 시바신은 어디에나 계신다.)”
나가사두의 목욕을 지켜보던 수천 명이 양손을 하늘에 뻗치며 따라 외칩니다. 인도인들은 이런 축제 기간에 강물에 몸을 담그면 모든 죄와 사악함을 씻을 수 있으며, 윤회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믿습니다. 이 때문에 부자와 거지를 가리지 않고 전역에서 모여듭니다.
우리 민속 신앙에서도 여인들이 소원을 빌 때는 새벽 일찍 정화수를 떠놓고 빌었습니다. 정화수(井華水)는 이른 새벽에 처음 길은 우물물을 말하는데, 동의보감에 나오는 여러 물 중에 으뜸으로 꼽힙니다. 정안수라고도 합니다. 물의 성질은 평(平)하고 맛이 달며 독이 없습니다. 한약을 달이거나 환단(還丹)을 만드는 데 씁니다.
정화수의 기능은 그만큼 정결하고 그 정결한 물로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그런 정성으로 기도하는 소원을 이루어 주시라는 것입니다.
종교의 중심이 정결입니다. 대부분이 내세를 말하기에 내세로 가려면 죄를 씻고 정결함을 얻어야 한다, 그래서 수도하고 고행하고 물로 몸을 씻으면 정결함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도 이와 비슷한 면이 보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정결해야 하고 그 수단이 물로 씻는 것입니다. 본문을 봅시다.
7절, 자기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은 후에…
8절, 물로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9절, …부정을 씻는 물을 위해 간직할지니…
이 물이 어떤 물인가? 17절, 흐르는 물…입니다.
흐르는 물은, 신선한 물이요 오염되지 않는 물이요 수질이 좋은 1급수 물입니다. 이런 물로 몸을 깨끗이 씻고 옷읅 세탁하고 정결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의 한계가 있습니다. 몸은 씻지만 마음은 씻을 수 없습니다. 영혼까지 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물로 몸을 씻고 옷을 빨고 깨끗함으로 하나님 앞으로 인도는 되지만 죄를 씻는 것은 오직 짐승의 피였습니다. 하나님은 피만이 죄를 씻어준다,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희생제물의 피도 인간의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약속어음입니다. 십자가의 피가 훌려질 때까지 약속어음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를 깨끗하게 한 것은 황소와 짐승의 피가 아니라 어린 양 예수의 피라고 한 것입니다.
로마가톨릭은 예수의 피로만 속죄함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에 하나를 첨가했습니다. 선행이 보태질 때 완전히 정결하게 되고 구원을 받게된다는 것입니다. 저들도 그게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면죄부입니다. 돈으로 속죄표를 사는 것입니다. 죽은 이들의 구원까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외친 것입니다. 그것은 흐르는 깨끗한 물이 아니라 더러운 웅덩이 물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 웅덩이물로는 정결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예수 오직 십자가를 외친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올 때마다 초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죄에 대해, 십자가에 대해 얼나 민감하며 감사하며 작은 죄에 대해서도 가책을 느꼈습니까? 예배당에 들어오면 우선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죄에 대해 얼마나 심상합니까? 그러니 자신을 성찰하지 못하고 개혁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개혁교회는 늘 개혁의 길을 걸으면서 개혁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을것입니다.
에모투 마사루는 <물은 답을 알고 있다>에 지구의 70%가 물이고, 사람의 육체도 70%가 물이라 합니다. 사람이 수정란(受精卵) 때는 99%가 물, 막 태어날 때는 90%, 다 성장하면 70%, 죽을 때는 50%, 아주 죽으면 물이 한 방울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나를 물로 보지 마!”라는 말은 죽겠다는 말입니다. 건강하게 살고 싶으면 말을 바꾸세요. “나를 물로 봐주세요!” 하고.
물이 생명의 근원이라면 사람을 살리는 교회도 물이 되어야 하고 물처럼 흘러가고 물처럼 반응하는 물의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는 ‘아쿠아 처치’(aqua church)입니다. 같은 물이라도 ‘워터’(water)가 마시는 물이라면 라틴어로 ‘아쿠아’(aqua)는 생명을 살리는 물입니다. 교회는 생명을 살리는 물과 같은 교회, 생명의 역사를 만들어 내는 물과 같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만 흐릅니다. 물의 하향성, 교회는 겸손해야 합니다. 물은 자기가 위치한 높이보다 더 높은 곳으로는 절대 갈 수 없습니다. 낮은 곳으로만 찾아서 흘러 내려갑니다. 물은 낮은 데로 흐르며 아무리 작은 틈새라도 찾아서 스며듭니다. 어떤 대상을 가리지 않고 본능적으로 아래로 흘러내리며 틈새를 찾아서 촉촉한 땅을 적시고 바위를 적시면서 생명의 싹을 트게 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겸손입니다. 높은 분이셨으나 스스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스스로의 커트라인을 낮추셔서 낮은 자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그들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물이 틈새를 찾아내며 스며들 듯이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의 틈새에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셔서 그들을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자신을 성장시키셨으며 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처럼 일하셨듯이 교회도 낮은 데로 겸손한 마음으로 계속 움직여야 합니다. 물처럼 흘러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을 살리는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물은 자기 모습을 고집하지 않는 유연함이 있습니다. 물의 유연성, 신자는 유연해야 합니다.
물은 상대에 따라 다양한 모양으로 변합니다. 둥근 그릇에 담기면 둥근 형체로, 네모 그릇에 담으면 네모난 모양으로 자신의 모습을 그릇에 맞춥니다. 물은 이처럼 특정한 모양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만약 물이 딱딱하게 굳어있다면, 아무 곳에나 담을 수 없습니다. 모양이 없기에, 담기는 모양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기에 “물로 보지마” 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물은 그릇에 따라 모양이 달라질 뿐 아니라 때로는 증발함으로 아예 형체가 없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감추어 버립니다. 그러면서 하늘에서 깨끗한 물이 되어 다시 돌아옵니다.
물은 순리를 좇아 흐릅니다. 물의 순리성. 신자들은 역리가 아닌 순리를 쫓아 살아야 합니다.
물은 흘러가다 바위에 막히면 기다립니다. 물이 다 채워지고 바위를 넘길 때까지 기다립니다. 안 될 것을 된다고 생떼를 쓰는 법도 없고 못 갈 것을 가겠다고 덤비는 법이 없습니다. 가게되면 가고 못 가게 되면 찰 때까지 조용히 기다립니다. 순리를 좇아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윷놀이와는 영판 다릅니다. 윷놀이는 뛰어넘기, 잡아먹기, 질러가기, 업혀가기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물은 순리를 좇아서 삽니다. 우리 사회가 물처럼 순리를 좇아서 흘러가는 사회가 된다면 이렇지 않을 텐데 윷판과 같은 세상이기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물은 다른 물줄기와 만나면 조건 없이 섞여 하나가 됩니다. 북쪽에서 내려온 물이건, 남쪽에서 내려온 물이건, 오염된 물이건, 거부하지 않고 서로 합칩니다. 서로 부딪히지 않습니다. 합쳐지면서 빗물은 도랑이 되고 도랑은 냇물이 되고 냇물은 강물이 되고 강물은 바다로 유유히 흘러가며 거대한 물줄기를 만들어 냅니다.
물은 만나는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하고 부드럽게 해줍니다. 사막과 같은 땅이 물이 들어가면서 옥토가 되고 말랐던 시내가 물이 들어가면서 고기들이 살게됩니다. 말라가던 사람들이 수분이 넘치게 시작하면 생기가 돌고 살아납니다. 그러면서 물은 자기의 모습을 유지합니다. 네모난 그릇에 담겼다고 해서 물의 마음이 삐뚤어지지 않고 물의 본질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온유하다, 하셨습니다(마11:29). 상냥, 관대, 친절, 고사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영어로, 젠틀(gentleness)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수용성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과 섞여야 하고 퉁기지 말아야 합니다. 조건 없이 섞여질 수 있는 물과 같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물의 유연성, 온화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는 살고 세상을 개혁할 수 있습니다.
물은 모든 것을 삼키는 힘이 있습니다. 물의 역동성입니다. 신자는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물은 때로는 조용히, 때로는 정열적입니다. 물은 열을 받으면 엄청나게 끓는 힘으로 강한 것들을 삶아버립니다. 모든 강한 것들이 물 앞에서 흔적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물은 목적을 달성합니다. 묵묵히 흘러가면서 목적을 달성해 나가는 물의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드러움과 강함을 고루 갖추신 분입니다. 강한 자들 앞에서는 강하고 약한 자들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신 분입니다. 권력자들 앞에서는 추상같으신 분이었고 힘없는 사람들과는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강함과 부드러움으로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교회는 조용히 흘러가는 물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나 교회에서 쉼을 얻어야 합니다. 사막의 오아시스가 되어야 합니다. 울고 싶은 사람들이 조용히 울다 가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끓는 물이 되어야 합니다. 맥빠진 사람들이,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싱거운 사람들이 성령의 도가니에서 자신들을 뜨겁게 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뜨거워져야 합니다. 교회가 뜨거운 불이 되어야, 끓는 물이 되어야 사람들이 불구경 오고 물 구경을 올 것입니다.
결론
종교개혁은 교회개혁이요 사람에 대한 개혁입니다. 우리 스스로 개혁하지 않으면 제도의 개혁은 도루묵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생명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 안에서 새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깨끗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겸손함으로 구원을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온유함으로 세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목마름을 해결해 줍니다. 이런 생명의 원천 예수님을 간직한 교회는 어찌해야 합니까?
에스겔 47장은 황폐했던 예루살렘성전 문턱에서 엄청난 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음을 봅니다. 성전에서 나온 물은 시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었습니다. 양쪽으로 나무들이 자라고 강물에는 고기떼들이 우글거렸습니다. 성전이 온 천하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한 것입니다. 생수가 되시는 하나님을 모신 성전이 그동안 부패하고 타락하여 은혜의 혈관이 막혔더니 장차 예수님께서 오셔서 교회를 정결하게 하실 것을 환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그리될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그리될 것입니다. 개혁은 억지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다움을 회복한다면 그리될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교회개혁입니다. 교회개혁은 내가 개혁으로 나아갈 때 시작되고 완성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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