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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초대교회, 기다림의 신앙(누가복음 2:25~35)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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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 기다림의 신앙

누가복음 2:25~35

서론

대림절 세 번째 주간입니다. 대림절을 뜻하는 라틴어 애드벤트’(Advent) 오다’ ‘도착하다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로마제국에서 신으로 숭배되는 황제가 즉위한 후에 여러 도시와 지역을 방문할 때, ‘그분의 방문’(His Advent)이라고 한데서 유래했습니다. 이를 초대교회 교인들은 구세주의 오심’(The Coming of Our Savior)이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애드벤트에 담긴 대림절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에 오심을 의미합니다. 즉 대림절은, 이미 이루어진 사건으로 표현되는 주님께서 이미 오셨다.’와 아직 이뤄지지 않은 사건에 대한 소망이 담긴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겼습니다.

 

초대 기독교신앙의 특징은,

첫째, 공동체적 신앙입니다. 유대교는 성전과 율법 중심이지만 신약교회는 교회가 신앙을 함께 고백합니다. 믿음의 형제자매로 혈육적인 사랑을 합니다. 혼자 구원받고 축복 받는 개인 신앙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관심과 책임적 신앙을 가졌습니다.

 

둘째, 순교적 신앙입니다. 순교를 각오하지 않으면 세례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하나님이신 당신은 나의 구세주요 나의 가이사입니다!”입니다. 황제라는 말입니다. 황제숭배가 막을 오르고 있는 시점에 예수님을 가이사 황제라 인정한 것은, 주님과 함께 죽을 수 있다는 각오가 묻어있는 것입니다,

 

셋째, 기다림의 신앙입니다. 물질과 축복을 기다리는 현세적 기다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을 소망하는 기다림입니다.

세 가지 기독교신앙의 특징은 서로 어우러지면서 초대교회의 믿음을 강화시켜 왔습니다.

기독교역사 2천년 동안 교회의 신앙은 미래적이고 성취적이고 종말론적인 기다림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기다림의 신앙이 없을 때 교회는 건물 중심이고 현세에 묻혔기에 세속화되고 타락했습니다. 기다림의 신앙이야말로 교회를 교회 되게 했던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의 초림-성탄을 영접한 이들을 소개했습니다. 마리아 요셉, 목자들, 동방박사들 모두 이타적인 사람들입니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자기를 희생한 사람들, 그들이 초림 예수를 영접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또한 메시아 대망사상 소유자들입니다. 메시아가 오심으로 다윗 왕가가 회복되고 새 세상을 열어줄 것을 기대하는 기다림의 신앙인들입니다.

 

본문에도 같은 패턴의 신앙자가 나옵니다. 25, 시므온 노인입니다. 시므온은 유대 사회에서는 매우 보편적이고 흔한 이름입니다. 야곱의 둘째 아들 이름이 시므온으로 들으심입니다. 남편과 동생에게 구박을 받으면서도 남편의 사랑을 얻고 자식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던 레아가 장남 르으벤을 얻고 둘째아들을 다시 얻게되었을 때 내 기도를 들어주셨구나, 시므온 들으심이라고 이름했습니다.

시므온 노인의 신앙과 삶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이 어떤 것이며, 언제 재림하실지 모르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한 경건된 삶은 어찌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25:1-13).

 

시므온의 기다림은 약속에 근거한 기다림입니다. 폴 틸리히는 <흔들리는 터전>에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인간을 기다림의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 말합니다. 시편은 갈망하는 기다림, 사도의 서신들은 참을성 있는 기다림으로 그렸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다림의 신앙은 초대교회의 신앙고백뿐이 아니라 성경의 중심 주제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는 추방을 당하는 아담과 하와에게 여인의 후손을 통한 에덴의 복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기다림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습니다.

노아는 오랜 세월 120년을 방주를 지으면서 대홍수를 준비하고 기다렸습니다.

아브라함은 25년이나 자식을 기다렸고 3대 축복의 실현을 기다렸습니다.

다윗도 왕이 되기까지 12~15년 정도 기다림 속에서 연단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나안에서 바벨론 포로 70년 세월에서 메시아를 대망했습니다.

 

이처럼 어느 시대이건 기다림이 없었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구세주가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그냥 본능에 의지해서 막연하게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세주를 보내주신다! 구세주가 너희를 위로해 주실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4천년의 믿음입니다. 이런 약속이 있어 세계적인 핍박과 시련에서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사실입니다. 성경은 전설이 아니라 사실이었습니다. 전설은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전설이 아니라 사실적인 역사로 받아들였습니다. 구세주의 강림은 전설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의 성취를 믿었기에 유대인들은 시련 속에서도 유대인임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시므온 노인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기다림의 신앙을 유지했습니다. 그의 이름처럼 날마다 메시아의 강림을 기다렸고 기도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 심지어는 비()선민이던 동방박사들조차 큰 왕을 기다렸습니다. 초림이 기다리던 이들에게 임한 것처럼 재림도 기다리는 이들에게 지혜로운 다섯 처녀처럼 맞이하는 은총을 누리게 할 것입니다.

 

시므온 노인은 기도하몀 기다리면서 25, 의롭고 경건한 자세를 유지했습니다. 의롭다는 것은 정의로움이요 경건은 독실함을 말합니다. 의로움은 도덕적인 것이고 경건은 신앙적인 것입니다. 그는 신앙생활과 생활신앙이 모두에게 합격점을 받으며 사는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기다림이 전부가 아닙니다. 기다림에 맞게 순결과 일편단심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일편단심(一片丹心) 한 조각의 붉은 마음입니다. 오직 한 색, 붉은 마음, 한결같은 참된 정성, 이게 기다림에 있어야 합니다.

1970년대 남편들이 사우디에 가서 돈벌었습니다. 잘 기다린 여인들은 지금도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남편을 기다리면서 춤바람이 나버린 부인들은 가정이 해체되고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세계 1차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 애수(哀愁)가 있습니다. 애수(哀愁)는 가슴에 스며드는 슬픈 근심을 말합니다. 2차대전이 시작된 1939년 가을 안개 자욱한 런던 워털루 다리에 한 대의 지프가 멎습니다. 오십이 다 된 독신남자가 조용히 내려 추억에 젖습니다.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만났던 곳도, 죄책감에 못 이겨 그녀가 생을 마감한 곳도 워털루 다리였습니다. 애인의 전사소식에 자포자기한 채 거리의 여자로 전락했다가 살아 돌아온 남자와 조우했지만, 여자는 기다리지 못했다는 회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서 자살해 버리고 맙니다. 끝까지 기다리지 못한 회한을 다룬 영화, 가슴에 슬픔이 스며드는 애수(哀愁)’입니다.

 

성탄절은 기다리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도 기다리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이 현실화가 되고 세상살이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눈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인간 세상에서 위로를 받으려면 세상은 참된 위로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위로가 되어야 하며 기다림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바른 믿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시므온의 기다림은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기다림입니다. 그는 누구였을까요? 형식화되고 외식이 된 제사장들을 비판하다 파직당한 제사장 출신이었을까요? 그랬다면 불명예, 차가운 시선, 왕따, 외로움이 있었습니다. 성전을 떠나 모임을 갖고 유대교 일파를 만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성전은 축복의 통로라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가나안교인이라는 신조어가 나옵니다. 교회 안 나가, 를 거꾸로 한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믿지만 교회는 안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속화되었다, 제도화되었다, 재정이 제대로 사용되지 못한다, 그런 곳에 내가 왜 헌금을 내느냐, 말은 하지만 사실은 구속감이 싫어서, 게을러서, 헌금이 아까우서 인간관계 설정이 싫어서 안 나오는 것입니다. 좋은 자세가 아닙니다. 기독교 2천년에 무교회주의가 성공한 적이 없고 무교회신앙이 주님의 역사에 이득이 된 적이 없습니다. 고립주의와 체질적인 비판의식은 순수한 신앙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인들 교회가 완벽하다고 믿어서 구성원으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교회가 울타리가 되어주고 불을 붙여주는 곳이 되고 타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곳입니다. 서로 부대끼기에 고치고 다듬어지고 만들어지고 세워져 가는 곳입니다.

 

골리앗을 물리친 조약돌이 그냥 조약돌이 된 것입니까? 오래 도록 시냇가에 남아 굴러가면서 부서지고 깨어지면서 반질반질하고 단단한 조약돌로 살아가다 다윗의 손에 들리게 되고 골리앗을 물리치고 한 나라를 구하는 조약돌이 된 것입니다. 나만 옳고 남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자갈돌이다 업신여기며 홀로 있었다면 스스로가 쓸모없는 돌멩이로 끝났을 것입니다.

가정은 완벽해서 있는 것입니까? 때로는 가정이 콩가루집안 같아도 남아있어야 다시 회복이 되고 화합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가정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가정을 떠나면 남아날 가정이 어디에 있습니까?

 

27, 성전에 들어가매 

시므온은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지 않으면서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그 기다림은 성전 중심입니다. 성전 밖 세상은 절망과 위기로 가득 차 있었고 성전 안에서도 거슬리는 일들은 많았습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스스로의 신앙을 기다림의 신앙으로 만들어 갔습니다. 성전이 부패했다고 성전을 떠나 독야청청하지 않았습니다.

 

성전에서 평생을 기다림의 신앙으로 보냈습니다. 성탄 때에는 마구간에 오셨던 예수님, 12세 때에는 성전에 오셨습니다. 마구간에 오셨다고 했을 때, 그는 베들레헴으로 거처를 옮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구간에서 주의 위로를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시므온은 신비주의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성전에 대한 약속을 믿었습니다. 성전-하나님의 눈이 머물겠다고 약속하신 곳입니다. 그래서 성전 중심에서 믿음을 키워나갔습니다.

 

기다림의 신앙-성전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믿음을 가꿔나가야 합니다. 교회공동체는 믿음의 가정이고 울타리입니다. 이곳의 교리가 우리를 지켜줄 것이고 교회 안의 공동체의 일원이 서로를 만져주며 다듬어 갈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기다림은 공동체간의 삶이 서로의 믿음을 빛나게 해 줄 것입니다.

 

시므온 노인의 기다림은 탄식과 눈물의 기다림이 아닙니다. 그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은 소망을 주었고 기쁨을 주었습니다. 괴로운 마음으로 기다린 것이 아니라 밝고 힘찬 마음으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했습니다. 시므온은 예루살렘의 위로가 되었고 성전의 명물이 되었습니다. 성전을 찾는 사람들은 제사장들에게서 위로를 받고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시므온 노인에게서 위로와 기쁨을 얻었습니다.

교회 생활, 즐겁게 해야 합니다. 교회생활을 즐겁게 하려면 굳어진 얼굴 근육이 풀려야 합니다. 얼굴에 웃음꽃들이 피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얼굴에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겸손의 인격을 통해 보여야 합니다.

 

지방의 어느 양로원은 서로 형님!”이라 합니다. 따져보면 나이가 위든지, 배움이 위든지, 키가 위든지 뭔가 하나씩 위가 있답니다. 그래서 형님입니다.

우리가 서로 따져보면 나보다 하나씩은 나은 게 있습니다. 서로가 존경해야 합니다.

시므온은 선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에게서 사람들은 위로를 보았습니다. 성전 제사장들의 부정과 타락, 로마정부의 학정 이런 것에서도 시므온을 보면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시므온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의 주변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같은 비전을 공유했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화병에 꽃을 오랫동안 싱싱하게 유지하는 몇 가지 방법이 나왔습니다. 차가운 물 대신에 미지근한 물을 담글 것, 수면 아래 잎사귀는 모두 떼어낼 것, 흡수가 잘 되도록 칼이나 가위로 줄기를 엇비슷하게 자를 것 등입니다. 특히 시든 꽃 가까이 화병을 두지 말 것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믿음도 그래요! 미래적인 사람들, 희망적인 사람들,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야 합니다. 세속적이고, 아이들 이야기나 하고 아파트 굴릴 이야기만 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세상의 위로를 구하는 축에 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위로가 안 됩니다. 구역공부에 참여했던 분들은 이런 데서 실망합니다. 대화 수준의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성경적으로 수다떨기>라는 책이 있답니다. 수다를 떨어도 남 흉보고 세상적인 이야기들로 수다 떨면 허무하고 부끄럽습니다. 남의 인격도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로 수다를 떨면 믿음도 상승하고 다른 사람의 믿음도 상승시켜 줍니다.

시므온은 배움도 없고 리더십도 없었습니다. 오직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사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다림의 그 모습 자체가 조용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런 사람-우리 늘빛교회에 필요한 사람입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결론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계 종교철학자이자 신학자인 마틴 부버는 자신의 신학이론에서 만남과 엇갈림”(meeting miss meeting)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마틴은 어린 시절 일찍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는 마틴을 외할아버지 댁에 남겨두고 도시로 돈 벌러 떠났습니다. 마틴은 언제나 엄마가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엄마가 오면 된다는 생각에서 견딥니다. 어느 날 친구와 다투었는데 친구가 말합니다.

엄마는 오는 게 아니야! 너의 엄마는 다른 남자와 살고 있어! 너는 버림을 받은 거야.”

할아버지에게 물었더니, 사실입니다. 이 한 마디 말은 인생을 모두 알아버리게 만듭니다. 그때부터 아이는 외톨이가 됩니다. 모든 어른을 불신하고 어머니를 증오합니다. 그러나 마틴은 다행히 잘 컸습니다. 그는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신학의 이름은만남의 신학입니다.

 

그는, “인생은 만남의 중요하다, 그러나 진정한 만남은 한가지 밖에 없다. 다른 모든 만남은 엇갈림이다. 만났다가 헤어진다. 하나님과의 만남만이 영원한 만남이고 구원의 만남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적인 만남과 기다림은 모두 미스미팅-엇갈림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부부로서의 만남은 죽으면 끊어지는 미스미팅-엇갈림이라는 거지요!

예수님 안에서의 기다림만이 우리를 보게 만듭니다. 오래 기다리면 오래 보고 많이 기다리면 많이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에게 가서 만나든 주님이 우리에게 재림하셔서 만나든 우리의 믿음은 결코 미스미팅-엇갈림이 아니라 진정한 미팅이 될 것입니다.

대림절은 겨울철의 사순절입니다. 깨어 기도하면서 주님 오심을 기다리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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