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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희망 고문을 희망으로~(열왕기하 4:11~17)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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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중고서적에서

희망고문을 희망으로~

열왕기하 4장 11~17절

서론

희망고문’(希望拷問)이란 말은 들어보셨나요? 희망은 어떤 일을 이루거나 하기를 바람’, ‘앞으로 잘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합니다. 얼마나 좋은 단어입니까? 인간에게 희망이 없다면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기다림,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윌리암 말스톤이 3,00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94%의 사람들이 사는 목적을 기다림, 희망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 많은 시간, 그 많은 생각을 전부 기다리는 희망에 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희망은 인간들에게 살아가야 할 목적이요, 원동력입니다.

 

그런데 희망도 나쁜 것이라고 주장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사신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입니다. ‘신이 죽었다고 주장하는 니체는 희망에 대해 이런 말을 합니다.

 

희망은 모든 악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고통을 연장시키기 때문이다.”

 

니체는 희망도 고문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를 희망고문이라 합니다. 희망고문은, ‘거짓된 희망으로 오히려 괴로움을 주는 행위’, ‘안될 것을 알면서도 될 것 같다는 희망을 주어 고통스럽게 하는 것’, ‘될 듯 될듯하면서도 결국에는 일이 안 되어 고통스런 마음입니다.

 

희망고문이라는 말은, 가수 박진영이 <희망고문>이라는 제목의 책을 내면서 대중들에게 알려진 신조어로 아는데 사실은 19세기 소설가 빌리에 드 릴아당이 희망이라는 이름의 고문이라는 단편소설을 쓰면서 나왔던 단어입니다. 절망적인 결과만이 기다리는 극적인 상황 속에서 희망이 아예 없다면 모든 걸 포기하고 깔끔히 손을 뗄 수 있겠으나, 약간의 가능성이 보이면 그 가능성 때문에 어떻든 절망을 벗어나려하기에 오히려 희망은 고문이 된다는 것입니다.

 

최악의 연쇄살인범 데이비드 파커 레이는 젊은 여성들을 납치하여 갖은 성고문을 하면서 3개월만 버티면 풀어주겠다 약속했으나 사실은 희생자를 조롱하는 희망고문이었고 희생자에게 싫증이 나면 살해 암매장하고 다른 희생자를 납치했습니다. 웃기는 것은 최악의 연쇄살인범 역시 자기는 사면 받을 수 있다고 희망 고문을 했는데 결국은 징역 227년 형을 받았습니다.

 

요즘 취업준비생들에게 취업은 희망고문입니다. 심각한 청년 취업난에 직장 구하기를 아예 포기합니다. 절반 이상의 청년들이 취업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에 구직활동을 중단했습니다. 되지도 안 될 것에 목숨을 걸고 공연히 고통당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한국인에게 남북통일은 일종의 희망고문입니다. 포기할 수도 없고 기다릴 수도 없고 차라리 잊어버리고 살면 살겠는데 남북통일에 관한 그럴듯한 뉴스들이 나오면 다시 희망을 품게 되고 결국에는 그 희망은 고통으로 고문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게 벌써 70여년이 됩니다.

 

요즘 남북관계도 그렇습니다. 진정한 비핵화(非核化)는 멀기만 한데 김정은의 위상은 영웅 아이콘으로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희망은 더 큰 실망으로 돌아오고 고문이 되고 있습니다.

 

주변의 젊은 개척교회 목사들도 희망고문으로 시달립니다. 개척교회들이 안 됩니다. 그래도 문을 닫을 수가 없습니다. 몇 명 데리고라도 교회를 해야 합니다. 안 되는 집안은 그 안에서 싸웁니다. 그 안에서 자꾸 잘 되는 남의 교회 이야기만 합니다. 이런 개척교회 목사들에게 하나님이 계시니 잘 될 것이다’ ‘참고 있으면 잘 될 것이다 이러면 백번 천 번 맞는 말이지만 하루 이틀 그런 말을 들어왔냐고요, 같은 개척교회 목사의 말이라면 위로가 되는데 소위 목회에 성공했다는 분들이 그런 말을 하면 이건 일종의 희망고문입니다.

 

우리가 말을 하지 않아 그렇고, 그런 말뜻을 잘 몰라 그렇지 저마다 얼마나 희망이라는 말에 속아서 살았고 고문을 당했습니까? 이번만 참으면 잘 될 거야, 이번 일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그러는 남편이 희망고문이 되고 자식들이 희망고문이 됩니다. 차라리 포기하면 되는데 삶에 꼭 정답이 있나요? 남편이 이번은 잘 될 것 같아요~ 내가 하는 일이 이번에는 꼭 대박을 터트리고 그러면 지금까지 빚을 모두 갚고 제대로 남편 노릇을 해보리라, 희망을 걸어요. 

 

그런데 잠자리 잡을 듯 잡을듯하면서도 놓쳐 하루를 완전히 버립니다. 어머니에게 엄청 야단을 맞아요! 그러면서도 내일에는 그 잠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희망을 갖게 되고 이게 다음 날이 되면 다시 희망고문입니다.

 

희망고문이라는 말이 때로는 신앙에도 들어옵니다. 우리 믿음까지도 이런 희망고문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믿음이 흔들립니다. 설교가 안 들려와요! 저런 희망적인 메시지는 설교용이지 현실에서는 달라~ 안 되는 일에 공연히 희망을 품지 말고 미리 꿈을 깨~ 내게 무슨 희망? 이제 희망은 없어! 희망에게 속아 괜히 시간 낭비, 마음에 상처를 받기 싫어 이러면 설교가 약장수들 너스레 같고 목회자들의 가르침이 학교에서 듣는 지식이나 정보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희망의 위험성 내지는 희망고문의 실상을 알았던 여인이 나옵니다. 본문은 주전 850년경의 사건으로 희망고문이라는 말이 나온 것보다 2천 년도 앞서는 이야기입니다.

 

본문 내용은 익히 아는 바입니다.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가 사역하던 시절입니다. 엘리야는 상당히 충동적이고 강렬합니다. 제자 엘리사는 상당히 섬세하고 따뜻합니다. 그러니 엘리야는 전투와 대결이 많고 엘리사는 치료와 회복이 많아요! 스승과 제자지간이지만 많이 달라요~

 

8, 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에 이르렀더니. 

수넴은 모세산( 12:6) 중턱, 갈멜산과 요단강 근처의 길갈 중간입니다. 엘리사가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거기에 한 귀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귀한 여인은 부요한여인으로, 남편 덕택에 부자가 된 여인을 말합니다. 여인은 믿음이 깊은 사람이라 엘리사가 누구인가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이렇게 소개합니다.

 

9, 항상 우리를 지나가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

 

누가 알았다고요? 내가 아노니. 거룩한 여인이기에 거룩한 사람을 알아본 것입니다. 사람을 알아보는 식별력이 우리 성도님들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10, 선지자님을 위해 작은 다락방을 만들고 침상과 책상 의자 촛대를 장만하겠다는 것입니다. 휴식과 연구를 위한 공간마련입니다. 

그야말로 13, 세심한 배려를 하는 여인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주밀한 여인이라고 나옵니다. 귀한 부인이 주밀(周密)하면 참 좋아요! 돈이 많은 여인들이 세심히 살펴주면 목회자들이 목회하기가 훨씬 편하고 행복합니다. 

 

이런 여인들로 지난 세월 한국교회 1세대 목회자들이 성공한 것입니다.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이 있는 법! 엘리야 스승과는 다른 섬세한 엘리사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요. 게하시에게 묻습니다.

 

14, “여인에게 어떻게 보답하면 좋겠는가?” “여인에게 딱 하나 문제! 자식이 없습니다!”

16, “한 해가 지나 이때쯤에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여인이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

 

그 말은 속임수라는 것입니다. 나를 더 이상 속이지 마소서~

여인의 말의 원래 의미는, “당신은 공연히 나를 위로하는 립서비스를 합니다. 속임수의 헛된 소망을 나에게 일으키지 마옵소서” “나를 어떤 거짓 소망으로든지 흥분시키지 마옵소서라는 부정적 반응입니다. 

그런 희망적인 말에 수도 없이 속았습니다! 그래서 공연히 희망도 걸었고 자식을 낳아 젖을 물리는 꿈을 꾸며 행복한 시간도 있었지만 그것이 거짓이었음을 알았을 때 그만큼 비참했고 고통스러웠다는 것입니다.

 

14, 남편은 늙었습니다! 

생산능력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여인도 가임기간이 지나버린 것입니다. 그런데도 선지자님이 와서 기도해 봐~ 기도하면 돼! 기도는 능력이야! 믿는 자들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어~ 이런 식으로 해서 나에게 희망을 주려하고 흥분시키려 한다면 그 자체가 내게는 바로 희망고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헛된 꿈을 품지 않도록 그런 말을 하려면 다시는 우리 집으로 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임신이라는 너무도 많은 희망을 품었던 여인, 아기가 들어서지 않고 수없이 꿈들이 무너지면서 실망했던 여인! 이제는 내 운명이려니 포기했는데 선지자님이 임신이 된다니까 거짓 소망으로든지 공연히 흥분시키지 마소서라고 받아친 것입니다. 더 이상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상처받지도 고문당하지도 않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희망이 주는 고문, 희망고문입니다.

우리가 성경 가르침, 설교를 여인처럼 해석하면 말씀을 가려서 받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내가 이해가 되는 부분은 받아들이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설교니까 그렇지 라고 가볍게 대합니다. 그러면 신앙보다는 자기 신념에 더 의지하게 됩니다.

 

교회에서 하는 희망적인 설교, 메시지조차 왜 희망고문이 되는 것일까요? ‘희망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힘센 단어입니다. 그만큼 힘있는 단어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럼에도 희망이 때로 사기성이 되는 것은 희망이 갖고 있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희망을 문제 해결이라 생각합니다. 

문제가 해결되면 어려운 일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희망을 품습니다. 그러나 문제라는 것이 해결되면 다른 문제가 터집니다. 그러면 실망하고 이번 문제만 해결되면 또 다른 희망을 갖게 됩니다. 또 속아서 희망을 갖고 또 절망합니다.

문제해결 자체가 진짜 희망은 아닙니다. 문제해결은 그냥 해결에 불과합니다. 희망은 문제해결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무엇입니다. 돼지가 담을 뛰어넘는 문제가 해결이 되었다고 돼지가 어떤 희망을 가집니까?

 

-목표성취가 희망인가요? 

장래 부귀(富貴)를 보장해 줄 직업을 장래희망이라 합니다. 장래희망이 이루어졌다고 희망적입니까? 에베레스트 산() 등정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던 산악인이 그 산을 올랐을 때 희망적이었을까요? 8586m 칸첸충가를 등정한 오은선씨는 산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 합니다. 인생 목표달성이 평생 희망이 되고 그 희망을 따라 사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는 희망을 긍정의 사고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면 된다! 할 수 있다! 좋은 일이 일어난다! 날마다 최면을 겁니다. 좋게 될 것이다 라는 그 기대 자체가 희망이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나는 할 수 있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소리 쳐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거짓된 희망이고 희망의 사기성입니다.

 

상황에서 오는 희망, 문제해결에서 오는 희망, 낙관적인 마음으로 기대하는 희망은 진짜 희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회성 희망이고 언제라도 문제가 생기면 절망으로 모드가 바뀌게 됩니다. 사람들이 이런 희망에 속고 살면서 점점 희망을 잃어버리며 늙어가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꼭 필요한 희망이라는 단어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해당됩니다. 한 가지 희망이 이루어지면 그 일로 다른 희망을 품게 합니다. 만약 그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처음의 희망조차도 공연히 헛물켜는 것에 불과합니다. 대통령이 되었지만 대통령이 되어서 하고 싶었던 모든 희망들이 완성됩니까? 그러니 대통령 자체도 미완성의 희망입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되면서 힘든 일을 만나면 희망고문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본문에도 보세요! 여인은 엘리사가 공연히 거짓 희망으로 충동질 시킨다 생각하고 기대를 걸지도 않았는데 17절 잉태했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희망을 이루었습니까? 아이가 두세 살이 되었을 때 일사병에 걸렸는지 머리가 아프다 하더니 죽어버립니다. 희망도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까지의 희망은 오히려 더 고통스러웠고 희망고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인은 선지자에게 달려가 따집니다.

 

28,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

 

왜 원하지도 않았던 아들을 주어놓고는 가져 가냐, 왜 공연히 희망만 품게 만들어 놓고 이제는 그 희망을 가져가시냐?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왜 나를 고문하느냐, 그런 것입니다. 물론 이 말속에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얻은 아들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다시 살려달라는 요청이 내포되어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원망조의 말에는 희망이 고문이다, 라는 말입니다.

 

인간 세상 무엇에 희망을 두면 그 희망은 더 큰 슬픔과 낙심을 가져옵니다. 결혼이 얼마나 큰 기쁨이고 행복이고 희망입니까? 그러나 부부생활을 하면서 그 장밋빛 희망이 수없이 부서지며 고통을 줍니다. 결혼이라는 희망이 컸던 만큼 결혼생활이 주는 실망은 얼마나 큰 것입니까?

 

우리가 이런 희망에 희망을 걸면 희망을 잡았다 하는 순간에 희망으로 오는 즐거움과 기대감은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기에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희망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희망이 되어야지 하나님이 주신 것에 희망을 걸면 이루어지지 않을 때 희망고문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아들의 죽음을 통해,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만났고 그때부터 여인의 희망은 아들이 아니라 아들의 생사주권자 하나님에게만 둡니다. 이후, 여인은 항상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기대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망의 민족입니다. 아브라함이 선택을 받은 이후로 땅을 주겠다! 대민족을 주겠다! 복의 근원이 되게 하마! 엄청난 희망프로젝트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희망 프로젝트들은 오랜 세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희망을 갖고 살 수도 없고 버리기에는 더 아깝고 그야말로 희망고문입니다.

 

그럼에도 저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희망을 걸던 믿음을 하나님 자신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희망을 걸던 것에서 하나님 자신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그루터기에서도 희망을 보았고 바벨론 70년 포로생활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11:1). 싹에서 희망의 꽃이 피고 구세주가 세상에 오실 것이라는 희망을 저들은 4천년이나 간직하며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메시아 신앙입니다. 그래서 저들 국가는 ‘hope’, 희망입니다. 오늘도 저들은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결국 저들은 자기들의 희망을 자신에게 두지 않고 하나님에게 두고 있기에 희망은 어떤 경우에도 항상 살아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은 희망’(希望)이라는 단어조차 신앙적이고 하나님과 연결합니다. 희망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노끈을 뜻합니다. 희망은 따로 떨어져 있는 두 개를 꼬아 하나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희망은 하나님과 연결된 노끈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이 사라졌을 찌라도 하나님과의 굵은 희망의 노끈이 든든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내는 역전의 삶을 기대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붙잡습니다. 그래서 희망은 다시 돌아오고 희망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의 희망을 사람과 엮어가지 마십시오! 자녀들의 성공과 남편의 성공으로 희망이라 이름하지 마십시오! 그 명예와 성공과 엮어나가는 희망은 사기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자신과도 희망을 엮지 마십시오! 나이가 바래지면 희망도 바래집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노끈! 이것 진짜 희망입니다. 이런 희망을 든든히 간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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