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재림 예수를 맞이할까?
마태복음 2장 1~6절
서론
한국교회를 위기라고 합니다. 왜 위기냐? 이단들의 극성, 무신론의 득세, 이슬람의 확장, 인본주의,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세속화⋯ 등이 교회를 위기의 코너로 내몰고 있지만 이 모든 요인의 근저에는 재림론 상실이라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가 재림론이 없으면 당연히 세속화가 되고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버립니다. 짠 맛이 없으면 소금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직전에 천사들을 통해 분명 다시 오시마 약속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 (천사가 거짓말 하겠어요?)
요한계시록 마지막 22장도 재림이 세 번이나 강조합니다.
7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20절,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재림이라는 단어는 신약에서만도 300회가 나옵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약’(約)은 약속이요 계약이요 언약을 망합니다. 구약과 신약에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모든 약속이 예수님의 초림으로 다 성취되었습니다. 재림만 하나 딱 남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신앙의 중심은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재림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성경 66권 1189장의 마지막 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21절,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모든 자들에게 있기를 축원하는 ‘주 예수의 은혜’가 무얼까요? 여러 내용이 포함되겠지만 재림신앙을 간직하고 살다가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신랑예수를 맞아 천국 혼인잔치에 참여할 자가 되는 은혜입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 순결한 신부의 신앙을 간직하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런 은혜들을 받아 재림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건 컴퓨터를 쓰고 인터넷을 쓰고 핸드폰이 일상화된 우리에게 그걸 쓰기 전의 생활로 돌아가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입니다. 이미 세속의 맛을 알아버렸기에 여기가 천국입니다. 그러니 굳이 천국을 사모할 필요도 없고 재림신앙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차라리 재림하지 말아달라고 막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는 두 개의 신앙이 공존합니다. 재림을 믿고 기다리는 신앙과 재림을 믿지도 않고, 있다하더라도 별로 관심이 없는 믿음입니다.
자동차 면허에 장롱면허가 있습니다. 면허는 땄는데 운전은 안하고 장롱 속에 면허증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면 그 면허증이 10년 20년이 가고 2종에서 1종으로 변경된다한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 신앙이 재림신앙이 빠진 신앙의 면허증이라면 오래 믿어서 중직이 되는 1종 면허신앙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다. 재림론이 빠진 신앙으로는 주님이 오실 때에 맞이할 수 없었던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은 종교인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초림 당시에도 예수 탄생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성탄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공존했습니다. 성탄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서기관, 바리새인, 헤롯 왕⋯ 한마디로 기득권자들입니다.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던 사람들, 세상의 변화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제국의 체재 하에서 무난하게 살기를 바랐던 사람들입니다. 의식주 문제는 로마제국이 책임져 주었기에 새로운 세상을 원하지 않았고 그래서 성탄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성탄예수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예수님과 반대편에 서서 진리에 대적하는 악인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대에도 비록 소수이지만 아기 예수의 초림을 맞이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선, 가난했지만 신뢰심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대표적 인물이 요셉과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와 자매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야고보 요한은 이종사촌지간입니다. 살로메 남편은 세베대, 갈릴리바다에서 배를 가진 선주요 품꾼을 둔 부자였습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목수입니다. 말이 목수이지 문짝이나 짜주고 밥상과 식탁을 만드는 생활목수입니다. 그러니 두각을 나타낼만한 전문가도 아니고 목돈도 벌기 힘듭니다. 만삭의 아내에게 베들레헴에서 방 하나 제대로 만들어주지 못할 위인이니 별로 능력 남자는 아닙니다. 동생은 부자 선주를 신랑감으로 택할 때 마리아는 가난한 목수 청년을 신랑으로 택합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믿음이라고 봅니다.
요셉은 가난한 목수지만 다윗혈통입니다(마11:16). 마리아도 다윗 계보의 혈통입니다. 두 사람은 같은 혈통을 결혼의 조건으로 삼았습니다. 같은 믿음이었기에 결혼을 약속한 것입니다.
동생은 부자남자를 택합니다. 혈통도 좋고 왕가도 좋은데 나라가 없고 왕실이 사라져 버린 시대에 무슨 혈통이며 무슨 믿음이냐, 돈이 최고다! 그래서 선주 세배대를 택했을 것입니다.
요셉 역시 다윗 왕가의 자손으로 ‘의로운 사람’입니다(마1:19). 의롭다는 것은 율법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몰락한 왕손이었으나 율법에 충실하며 하나님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생각할수록 마리아에 대한 배신감으로 괴로웠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 율법에 충실한 사람이었기에 마리아를 사람들에게 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사실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덮으려고 했습니다. 자신의 정결을 지키면서도 남을 생각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남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마음씨, 남의 허물을 덮으려는 따뜻한 마음씨를 봅니다.
하나님께서 구세주를 보내실 때, 육신의 부모를 선택하실 때에는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고운 남자,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뜻이 고운 여자를 택했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 그들도 초림 예수를 영접하는 은총을 누렸습니다. 유대인의 원래 업(業)은 목축입니다. 시조(始祖)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목자입니다. 애굽으로의 이주 후에도 그들의 주업은 목축이었습니다.
예수님 탄생 무렵, 유대인들의 직업은 다양해졌습니다. 어업, 상업, 심지어는 세리라는 직종도 생겼습니다. 목자들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목축업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입니다. 가장 유대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족장들의 삶을 본받으며 항상 하나님과 묵상하는 일을 했습니다. 목자로 살았던 다윗 왕을 흠모하여 그 길을 걸어가려는 사람들입니다. 양들과 생활하기에 도덕적으로도 예루살렘 사람들과 다릅니다. 양들은 짐승 중에 가장 양순하고 연약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보살펴주려니 그들 역시 양순할 수밖에 없고 희생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직업에 귀천은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직업은 자칫 사람을 그 직업의 속성으로 만들어갑니다. 목자들은 항상 양들과 함께 있기에 깨끗하고 세속에 물들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정치가들, 종교지도자들, 상인들은 이미 순수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세속에 물든 사람은 자기중심적이 됩니다. 그러나 목자들은 약한 양들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 타인 위주이고 자기희생적이기에 예수 탄생의 증인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동방박사들도 순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성탄 사건에 등장하는 동방박사들은 서남아시아의 옛 왕국 메디아종족입니다. 메디아는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문화민족이었으나 파사제국에 망한 이후부터는 속국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나라를 잃자 오랜 전설에 기댑니다. 세계의 왕이 탄생할 것이며 그 왕은 파사제국을 망하게 할 것이라는 전설입니다. 파사제국이 망하게되면 저절로 메디아는 독립하고 주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새 왕이 탄생할 때는 큰 별이 나타날 것이라는 말도 함께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메디아종족 중 우수한 사람들은 별을 연구하는 천문학자들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박사들은 별을 보며 조국을 독립시켜 줄 새 왕을 기다리던 천문학자들입니다.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늘 하늘을 쳐다보기에 그들은 순수하고 순결한 영혼을 갖고 있는 자들입니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교육심리학자 콜벅은 도덕발달학이라는 학문을 개척한 사람입니다. 그는 도덕률이 낮고 높음을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의 도덕률이 가장 낮고 자신을 희생하며 남을 위하여 사는 사람의 도덕률이 가장 높다”
콜벅은 도덕률이 가장 높은 사람은 인도 캘커타의 수녀 테레사라고 했습니다. 그에 비하면 바티칸의 그 사람들은 어떤가요? 정말 도덕률이 높을까요? 콜벅은 워싱턴의 정치가들과 시골 농부들의 도덕심을 실험했습니다. 그 결과 시골 농부들의 도덕심이 더 높게 나타났습니다. 세상 학문이 도덕률을 향상시키지 못한다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초림 성탄의 아기 예수를 맞은 사람들이 바로 도덕률이 높은 사람들입니다.
마리아 부부는 일상생활에서 순수함을 간직했습니다.
목자들은 전원생활 세속화를 막아냈고 순수함을 간직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며 세속에서 순수함을 키워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데에는 이보다 더 큰 공통점이 있습니다. 메시아 신앙입니다.
메시아란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유대사회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그 직분을 감당하는 사람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입니다. 메시아는 3직(職)을 모두 받아야 합니다. 3중직을 모두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다윗은 왕이지만 제사장과 선지자는 아닙니다.
사무엘은 제사장과 선지자 2중직이 있지만 왕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 3중직을 받은 사람이 세상에 출현하는데 그가 바로 메시아다, 그게 유대인들의 메시아사상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외국의 지배 하에서 해방하고 지난날의 번영으로 복귀시킬 민족적 지도자
-인간이 최초에 가졌던 낙원의 복음을 회복할 자
-또는 양자를 포함한 대망(待望)의 인물입니다.
유대인의 오랜 역사는 메시아 기다림입니다. 메시아 대망사상은 남이스라엘이 망하고 남유다가 망하면서 서서히 고개들 듭니다. 한 때는 그들의 기대주였던 왕들은 더 이상 그들의 희망이 아닙니다. 왕이 지상천국을 만들어 준다, 라는 생각을 그들은 버렸습니다. 그러자 자연히 바벨론 70년 포로생활을 하면서 메시아대망사상을 낳은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다윗의 혈통이요 후손이며 정통 유대인이기에 당연히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부자남편이 아니라 가난하면서도 메시아 대망사상을 지닌 요셉을 택했고 요셉 역시도 살로메처럼 발랄한 아가씨가 아니라 마리아처럼 순수하면서도 믿음이 좋은 아가씨를 정혼녀로 선택한 것입니다. 메시아사상이 두 사람을 결혼으로 이끈 것입니다.
목자들은 양들의 죽음에서 메시아를 보았습니다. 목자들은 밥벌이만이 아니라 성전 희생 제물로 바쳐지는 양들이기에 정성과 희생을 다했을 것입니다. 말 못하는 동물이라고 함부로 걷어차는 것이 아니라 먹이 하나를 주면서, 잠자리를 돌보아주면서 온갖 정성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 양들은 물건이 아니라 하나님께 바쳐질 거룩한 양들이었습니다. 모든 것들을 대할 때 하나님의 거룩한 성물(聖物)을 대하는 제사장의 심정처럼 양들을 대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양들의 희생을 마음 아파했습니다. 양들이 성전으로 희생 제물로 끌려갈 대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그럴 때마다 메시아의 탄생을 목마르게 기다렸습니다. 그래야 저 불쌍한 것들의 희생을 막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양이 많이 죽어야 수입이 늘어납니다. 성전은 더욱 화려해 지고 신분은 높아집니다. 백성들에게도 짐승의 희생이 필요했습니다. 1년 동안 죄를 짓고 양심의 가책이 있는 데 양들이 대신 죽어주고 그 가책을 없앨 수 있으니 양들의 죽음을 얼마나 반기겠습니까? 그러나 목자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양들의 희생 앞에 가슴이 아픕니다.
동방박사들은 속히 큰 별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등장해야 민족의 해방이라는 희망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들은 그 어떤 일보다도 메시아 대망사상을 가졌습니다. 그랬기에 이방인이면서도 유대 제사장, 서기관들이 놓친 메시아탄생의 현장을 방문하고 경배하는 큰 은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일은 이처럼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그만큼 노력한 것이고 정성을 다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결론
누가 다시 오실 메시아를 맞이할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돌아보는 사람들, 다른 이들의 희생을 가슴아파하는 사람들, 그래서 죽을 것들에게 더욱 잘해주려고 마음을 썼던 목자의 마음을 갖고 있는 이들만이 재림의 예수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누가 재림 예수를 맞을 수 있습니까? 매사에 정성을 다하고 하나님을 대하듯 모든 사람들을 대하는 이들이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온갖 종교적인 냄새는 다 피웠으면서도 정작 메시아가 오실 때 맞이하지 못했던 예루살렘 종교인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재림신앙을 회복하시는 성탄절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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