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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은혜의 여인 마리아처럼(누가복음 1:26~38)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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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여인 마리아처럼

누가복음 1:26~38

서론

 

오늘부터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대림절은 '대강절'이라고도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서의 성탄절과 함께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는 절기입니다. 대림절을 뜻하는 영어 어드벤트(advent)’는 재림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처음 오신 예수님과 다시 오실 예수님을 동시에 기리는 절기가 대림절인 셈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정작 성탄절은 지키지 않고 성탄절에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대림을 대망했습니다.

 

이처럼 대림절은 2천 년 전에 오신 예수님을 맞이하는 기쁨의 기간임과 동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심판을 준비하는 참회의 절기이며 이 세상의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도움으로써 성탄절의 기쁨에 동참케 하는 기간입니다. 그러니까 '찬미' '참회' '봉사'가 대림절의 삼대 화두입니다. 부활절의 사순절과 같은 맥락입니다.

 

대림절에는 초를 밝히는데 성탄절 당일까지 다섯 개를 밝힙니다. 1842년 독일의 요한 힌리히 비헤른 목사가 지역의 가난한 아이들에게 성탄의 의미를 설명하려 초를 밝힘으로 시작입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이 아기 예수라면 부주인공은 마리아일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 여성 최고의 신분으로 대접받습니다. 가톨릭교단 일부에서는 마리아를 여신의 반열에 세우려 작업 중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부성자성령성모-사위일체가 되어 삼위일체 교리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종교를 만들어 내는 것 때문에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가톨릭신자들에게는 현실적으로는 마리아는 이미 여신의 반열에 올라있습니다. 1950 11 1, 교황 피우스 9세는 마리아 승천설을 규정했고 이후 로마가톨릭에서는 매해 8 15일을 성모승천대축일로 보냅니다.

 

한 개인으로서는 상당히 영광스러운 일이요 어떻게 보면 영광이라는 단어도 마리아의 신분을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굉장한 특권과 축복을 받은 마리아이지만 2천 년 그 때는 그건 영광이 아닙니다. 

 

예수 아기씨를 잉태한 그 자체가 축복보다는 하루하루가 고통입니다.

 

-정혼한 여인이 임신했습니다. 마리아의 나이는 대략 15세 정도로 성경학자들은 봅니다. 12세로 성년은 되지만 15세 아가씨가 떡 임신을 한다니, 그 임신 소식이 반갑겠어요? 눈앞이 캄캄합니다. 정혼한 남자는 모르는 일입니다. 부모와도 정혼자와도 이 일을 상의할 수 없습니다.

 

-이건 율법에 처형당하는 죄입니다. 유대 율법은 음풍(淫風)이 불면 안 된다고 혼외 임신에 대해 엄격했습니다. 율법으로 돌 맞아 죽습니다. 현장에서 죽여도 사회법이 제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아기씨를 잉태했습니다. 인간으로 신의 아기씨를 잉태했다는 것은 궁녀가 왕의 씨를 잉태한 것과는 또 다릅니다. 인간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 그건 희열이라기보다는 너무도 두렵고 황송하고 어려운 것입니다.

 

아기 예수의 성탄 이후도 마리아에게 닥친 상황은 한 여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입니다.

 

-만삭의 몸으로 갈릴리에서 베들레헴까지 호적하러 갑니다. 직선으로 가면 약144km, 돌아가면 170km입니다. 베들레헴과 예루살렘은 10km입니다. 우리 강서구에서 대전시청까지 거리는141km입니다. 그래서 일주일 정도 걸렸을 것입니다. 만식으로 힘들었을 거예요! 예수 아기씨를 잉태하지 않았다면 이런 고생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들과 함께 했던 30여년~ 세상 사람들이 의심하는 사생아아들을 볼 때마다 남편 요셉에게 미안했고 의부형제간의 묘한 감정도 어머니는 알았습니다. 교황청은 1962년 제2차 바티칸회의에서 마리아 종신 처녀설을 확정했지만 성경에는 적어도 네 명의 아들과 두 딸 이상이 있다고 합니다(13:55). 물론 가톨릭에서는 요셉의 전처소생이라 하지만 구차한 변명입니다.

 

-아들은 30세 이후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집을 떠나 전도생활하며 노숙도 마다하지 않았기에 그 아들을 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편치 못했습니다.

 

-그 아들을 인간으로 대해야 할지, 신으로 대해야 할지 내 아들로 보아야 할지 하나님의 아들로 보아야 하는 것인지 늘 애매한 경계선에서 마리아의 삶은 평범하지 못했습니다.

-아들이 메시아라 주장하자 동족들, 종교기득권에서 엄청난 핍박을 가해왔습니다. 귀신의 왕이라는 누명을 씌우기도 했습니다. 아들이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는 장면을 다 보았습니다. 어머니로서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래서 유대인의 관례를 따라 출생 8일 만에 성전으로 할레를 받으러 갔을 때 경건한 사람 시므온 노인이 뭐라고 예언합니까?

 

2:35 “이 아이로 인하여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그만큼 마리아의 생애는 아팠습니다.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되었지만 정작 육신의 모친 어머니에게 그 아들은 칼이었고 아픔이고 고통이었습니다.

 

처녀가 아들을 임신하고 낳는다는 가브리엘 천사의 소식은 마리아에게는 청천벽력(靑天霹靂)그 자체입니다. 마리아는 울고불고 할 겁니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잠시 혼란에 빠지고 고민했겠지만 곧 이런 찬송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시려는 일을 받아들입니다.

 

46,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나이다.

 

도대체 마리아가 제 정신이 있는 것입니까? 지금 이런 예고로 장차 자신의 운명이 어떻데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찌 이런 찬양이 나옵니까? 평범한 나사렛 동네의 아가씨가 그 어떤 여인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힘든 운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건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신자들에게도 주어진 운명이며 고통이며 그 시련을 감내하는 비결입니다. 지난 2천년 기독교도들은 박해 당하고 파문당하고 추방당했습니다. 조상제사를 하지 않는다 장손이면서도 재산상속이 거부당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신사참배를 거부당한다, 공산치하에서는 신앙인이라고 무차별적으로 총살 당했습니다.

 

지금도 공산권과 이슬람권에서는 배교를 강요당하고 인권유린을 넘어 인간유린을 당합니다. 지난 2월 이슬람 테러세력 보코하람에 납치당한 크리스천 소녀 레아 샤리브는 이슬람 개종을 거부했기에 평생 노예로 삼고 성()노리개가 되었습니다. 샤리브 나이는 고작 15세였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대한민국에 태어났다, 남한에 태어났다, 1950년 대 이후에 출생했다는 이유 때문에 너무 편하게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면 세상과의 갈등으로 뭔가 불편하고 세상과의 충돌로 피해를 입어야 하는데 오히려 대한민국 1등 종교의 신자로 아무 걱정 없이 조심 없이 불편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작은 일에도 힘들다, 자존심 상한다, 시험에 들었다 마음을 잡지 못합니다. 

 

우리가 도대체 아기 예수를 영접하고 잉태는 한 것입니까? 한 번도 예수님을 임신한 것과 같은 경험도 없이 종교 신자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것은 뭔가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할 아기씨가 없다는 것이며 상상임신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 없는 기독교종교를 믿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나약한 여인으로서 세상 최고봉의 고통을 한 몸에 다 갖고 살아야 했던 비운의 여인 마리아! 예수님을 놓으면 이제라도 석방해 주겠다는 말에도 끝까지 개종하지 않는 레이 샤리브 수많은 순교자들 오늘도 불편을 감수하며 믿음생활 교회생활을 해오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 오랜 교회 봉사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도 불평 없이 섬기고 있는 이들!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헌금하는 분들, 주일성수를 하는 분들! 남을 위한 봉사를 하는 이들을 보면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살지? 저렇게 살면서도 왜 인생을 낭비한다고 손해 본다고 억울하다고 울지를 않는 것인지! 이런 의문들은 마리아의 생애에 큰 해답이 있습니다.

 

은혜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선물처럼 주시는 사랑이요 긍휼이요 자비하심이요 불쌍히 여기는 마음, 측은지심입니다. 마리아가 그런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의 대사잉 되는 연모(戀慕)를 입은 것입니다.

 

28,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마리아는 은혜를 받은 여인입니다. 은혜를 받으니 주어진 운명 감내할 수 있었고 의혹과 조롱의 그 시선들을 견디어 낸 것입니다. 은혜를 입은 자여 평안하라! 그것이 은혜의 힘입니다.

 

30,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

 

마리아는 은혜를 받을 정도를 넘어 아예 은혜의 옷을 입은 여인입니다. 받았다는 것은 쉽게 표현해서 내민 손바닥에 주어진 것이요 입었던 것은 아예 머리에서 발끝까지 은혜의 옷으로 도배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성령에 의해 임신했습니다. 당시의 처녀 임신은 사형감입니다. 그만큼 유대 사회는 신정국가였기에 엄격했습니다. 처녀가 아이를 가지면 그냥 처형합니다. 그 처형의 주도권은 부모와 약혼자 남자에게 있습니다. 맞아 죽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평범한 여자였다면 자신에게 닥친 성모라는 자리의 운명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맨정신으로 그 사실을 알았다면 울고불고 정신이상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처녀에게 임한 잉태의 소식은 순결한 여인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잉태소식을 듣는 순간 그녀는 너무 놀랍니다.

 

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로마가톨릭이 부르는 성모송()에는 이 일을 어찌할꼬 이 일을 어쩌면 좋을꼬!”라고 당황해 합니다. ()선고를 받은 사람이 너무 충격을 받아서 이럴 수가! 어쩌면 좋아 나 어쩌면 좋아 하는 심정입니다. 그러나 천사가,

 

35,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35) 하자. 마리아가 이 말씀에 아멘~하면서 이렇게 응답합니다.

 

38,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38).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이루는 일에는 자신은 고통을 겪어도 좋다는 비장한 각오입니다. 자신의 앞날만을 생각했다면 감히 이런 말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마리아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견디는 힘이었고 비결이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만 나타나는 은혜의 고백입니다.

 

여종이오니 주 뜻대로 내게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항명(抗命)이 아니고 순명(殉名)입니다. 이런 마리아의 여종 마인드의 고백이 그 아들에게로 대물림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기도 내 원대로 마옵시고 주 뜻대로 하옵소서~ 주님의 기도는 바로 그 어머니에게서 대물림을 받은 것입니다. 성탄에는 바로 이런 종의 마인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만 하려는 풍조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뭐를 시키고 임명하려해도 본인들에게 물어봅니다. 그게 정상인 것 같지만 하나님의 일에는 하나님의 권위가 세워져야 합니다. 옛날의 교회가 순수했던 것은 교회에서 시키면 무조건 아멘~ 그게 바로 마리아의, 따지지도 않고 묻지도 않고 아멘~ 신앙입니다.

 

주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내게 주어진 운명을 가겠습니다~”

 

그게 예수님의 삶의 중심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잔을 마시겠습니다!”

 

성탄절의 은혜는, 계집종의 마인드를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는 주님의 여종인 내가 주어진 어떤 인생도 달게 받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잔이라면 주님의 여종이기에 어떤 잔도 마실 것이며 주님께서 가라하시면 주님의 여종이기에 십자가의 길도 마다하지 않겠다, 고백하는 것이 은혜의 힘입니다. 교회가 은혜의 기관이 되려면 우리 모두가 이런 마리아의 여종의 고백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교회는 은혜를 받고 은혜를 입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는 은혜의 사람들이 됩니다.

결론

한 해를 마감하고 정리해야 하는 마지막 달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이 끝자락에 있는 달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내가 지고 있는 짐이 점점 무거워질 때입니다. 내게 왜 이런 고난주시냐고 사는 것이 왜 이리 힘드냐고 그렇게 하소연하고 싶은 심란한 초겨울입니다. 추어지면 마음도 움츠러듭니다. 교회 봉사들이 더 무거워지고 즐거움이 없습니다. 다윗처럼 구원의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자원하는 심령도 사라지고 억지 신앙생활 억지봉사 억지헌금만 남았습니다.

 

내가 왜 이리 된 것입니까? 사는 것이 더 힘들어진 것입니까? 교회 봉사가 너무 세어진 것입니까? 내게 너무도 강한 시련이 온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때도 사는 것이 힘들었지만 즐거웠습니다. 교회에서는 1 3 5역까지 하면서도 행복했습니다.

무엇이 빠졌을까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요? 그래서 모든 것이 짐이 되고 나를 누르게 하는 무게가 되는 것일까요? 은혜입니다. 모든 것은 그냥 남아있는데 은혜만 빠졌습니다. 내가 받았던 은혜! 내가 입었던 은혜의 옷을 버렸기에 내 힘으로 견디려니 힘든 것입니다. 무거운 것입니다.

 

12! 성탄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입니다. 다시 은혜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마리아처럼 주님의 계집종이오니 주님 뜻대로~ 예수님처럼 내 원대로 마옵시고~ 고백할 때 내 짐은 가벼워질 것이며 내 교회봉사에서 상급의 열매들을 보게 되고 그러면 그건 내게 짐이 아니라 힘이 되어 더 성령 충만한 믿음으로 달려갔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은혜가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대림절 첫 주일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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