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초대교회 영성으로(2)
사도행전 2장 43~47절
서론
학교교육에 문제가 많다고 합니다. 실력이 늘고 공부도 잘하고 똑똑한데 뭐가 문제일까요? 인성(人性)교육이 빠졌다고 합니다. 인성(人性)은 ‘사람의 성품’으로 도덕성, 사회성, 정서⋯ 이런 인성교육의 결과는 ‘사람됨’입니다. 학교가 인성교육이 안 된다는 말은, 홍익인간을 키운다 해놓고 성공 출세를 위해 ‘사람됨’의 인성교육을 포기해버렸다는 탄식인 셈입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들의 영성학교입니다. 교회가 영성교육을 제대로 해야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교회는 세상을 정화시키는 영성의 장소가 되는데 한국교회는 이게 약합니다.
영성(靈性 spirituality)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자에게 생성되는 영적성질입니다. 영적 성질,하나님 성품이라면 성령의 열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게 영성인가요? 이것은 영적성품의 열매이지 영성자체, 뿌리는 아닙니다.
영성은 내 성품에 ‘하나님’과 ‘내’가 겹쳐지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영향을 받습니다. 종교성과 영성은 주어(主語)가 누구냐, 차이입니다. 종교성은 ‘나’의 종교심이 주인입니다. 내 안으로 하나님이 들어오는 순간 내 식(式)의 하나님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오래 믿어도 내 성향의 하나님으로 모양이 변질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을 율법으로 정죄하는 준엄한 하나님으로 만들고 그에 맞게 자기를 길들여 가니 평안이 없었지요.
영성의 믿음은 하나님 안에 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어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움직이고 반응하게 하십니다. 정직한 하나님이 겹치면 내가 정직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겹치면 내 안에 사랑이 조성되고 긍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런 부분이 영성입니다. 이런 영성이 우리 인간성을 맑게, 순수하게, 거룩하게 만들어 갑니다. 영성이 우리 안에서 맑지 못하면 내 안에 하나님 감지능력이 약하기에 하나님을 보이지도 못하고 내 성질만 드러냅니다.
이렇게 비유해 볼까요? 호수에 산이 들어와 있습니다. 호수와 산은 완전히 별개지만 호수가 맑으면 산이 호수 안에 겹쳐집니다. 호수는 단풍이 곱게 물든 아름다운 산을 보여줍니다. 내 심성이 신앙심으로 맑아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을 보여주는 그 영적 수준이 영성입니다.
이런 영성수준, 영적지수가 높았던 사람들이 초대교회입니다. 초대교회는 교회다운 교회, 신자다운 신자들입니다. 초대교회는 누가 들어와도 교회의 본질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변질되지 않았고 입교자들이 변화되었습니다. 맑은 영성의 호수가 되었기에 사람들은 그들에게 내려앉은 큰 산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초대교회는 영성이 살아있고 영성이 그들을 움직이며 교회를 움직이던 영성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금년에 이런 주제를 선택한 것입니다.
1. 위로 향하는 영성(성화영성)
하나님께로 자라는 영성입니다. 우리가 영성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면 육체의 본성을 날마다 죽이고 씻고 수련하고 갈고 다듬어야 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과 겹쳐지는 영성이 맑아지도록 영성을 향해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생기, 하나님의 성품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영성수준이 달라집니다.
초대교회에서 최고의 영성을 보인 이는 사도들보다 뜻밖에도 집사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이 순교 직전에 보여준 얼굴은
6:15,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더라⋯
천사의 얼굴은 어떤 얼굴일까요?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천사의 얼굴을 보았을까요? 당연히 보지 못했을 거예요. 그럼에도 스데반을 천사의 얼굴 모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 같았다는 묘사입니다. 스데반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 같았다 쓰고 싶었지만 감히 그렇게 쓸 수는 없었기에 천사의 얼굴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니 진정 하고 싶은 것은 스데반은 하나님의 얼굴이었다는 거예요!
스데반이 지금 상급을 받고 명예를 받는 자리가 아닙니다. 박해를 받아 순교직전입니다. 이런 험악한 자리에서 천사의 얼굴이라는 영성을 만들어 낸 것은,
7:55, ⋯성령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하나님을 보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얼굴이 천사의 얼굴 하나님의 얼굴처럼 빛났고⋯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보니 예수님의 인격영성이 파고 들어와 예수님과 같은 기도를 드립니다.
60절,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건 인성의 기도, 인성의 자세가 아닙니다. 사람으로는 이런 기도, 이런 용서, 이런 얼굴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 충만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으로의 충만이고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은 하나님의 영성의 분량으로 채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빛나는 얼굴이 납니다.
우리가 영성의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자꾸 위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구하고 갈망해야 합니다. 30년 50년 믿으면서도 10년을 믿은 도사만큼도 영성이 되지 못하고 능력이 나타나지 못하면 장소는 예배당에 있고 위치는 교인인데 바라보기는 세상을 보고 세속을 향한 것입니다. 그러니 10년 도(道)를 닦은 도사들은 도인(道人) 분위기가 풍기는데 우리는 경건하고 진실한 분위기가 배어나지 못합니다. 스데반 얼굴이 아니라 스데반을 향하여 비난하고 조롱하고 돌을 던지던 유대 종교인들의 얼굴이 나오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우리의 영성이 성장하려면 집중적으로 하나님을 올려보아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46절, 날마다 성전에 모였고 47절 날마다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바라봅니다. 기뻐도 아버지⋯ 슬퍼도 아버지⋯ 힘들 때도 아버지⋯ 스데반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바라보았더니 그 얼굴에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이 나타났고 하나님의 얼굴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42절, 저들은 모여 떡을 뗍니다.
성찬예식입니다. 성찬을 통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부활로 살아나 의인의 신분을 획득하게 해주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의 인품 인격, 참으며 용서하며 누구도 무시하지 않고 대접하던 그 마음에 연결됩니다. 그럴 때 스데반집사는 저들을 용서하소서⋯ 영성의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충만으로 출발합니다. 성령충만 공급을 위해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입니다. 성령충만은 시너지효과를 내며 소유욕을 버리게 만듭니다. 내 소유물을 내어놓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했습니다. 사랑에 불이 붙으면 무엇이나 주고 싶은 것처럼 성령에 불이 붙으니까 아까운 줄을 모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 위로 향할 때 성장하는 영성입니다. 스데반에게 일어난 영성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의 영성입니다.
2. 안으로 향하는 영성(인격영성)
내 안으로 뿌리를 내리는 영성입니다. 영성은 하늘로만 올라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몸에 생기를 넣어주셨습니다. 아담은 지성과 영성으로 계속 생명과를 따먹으면서 하나님의 영생을 확장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영혼이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선택함으로 하나님과의 영성 탯줄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육신으로는 살아있지만 영으로는 죽은 존재였습니다. 죽은 존재는 하나님이 아바~ 아버지가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그래서 숨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영성이 없거나 미약했기에 감당을 못하고 숨고 만 것입니다. 그는 영성이 아니라 본성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하나님과 성품에 탯줄을 이어주셨습니다. 이 과정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후서 1:4,
“⋯너희가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신성한 성품에 참여한 자⋯ 개역성경에는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었다, 메시지성경은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할 입장권’을 받았다고 합니다. 신의 성품, 영성에 참여했으면 영성이 자라야 하고 영성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로 나타납니다.
이런 열매를 얻으려면 내 안의 영성을 키워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내 안에 하나님의 영성이 있습니다. 내 안에 들어와 있는 하나님의 영성! 이 영성을 키워 열매를 맺으려면 내 안의 영성이 어느 정도인가 살피는 것, 자기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성찰은 자기해체입니다. 교만, 자기 비하, 자기 학대, 낮은 자존감⋯ 이런 것들로 내 영성이 제자리걸음입니다. 자기해체가 없이 30년을 믿으니 똑똑은 하고 알 것은 다 아는데 영성이 자라지 못합니다.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 인성으로 종교생활 중입니다. 맑은 호수가 되지 못하니 아름다운 단풍 산을 보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호수에 있는 더러움을 고정화시키지 말고 날마다 새 물로 교체해야 합니다. 해체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성입니다.
내 안으로 영성이 자라는 또 하나의 자기성찰은 자기긍정입니다. 이것은 자기사랑으로 나옵니다. 거룩한 자존감으로서의 자기 사랑, 하나님 사랑 안에서의 자기 사랑입니다. 자기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기 영성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밖으로 흘러 내보일 수 있습니까?
내 안으로 향하는 영성에 대해 두 인물이 나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입니다. 두 사람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갑니다. 바리새인은 대단한 종교가로 자처합니다. 그는 스스로를 의인이라 자처합니다. 그는 남들과 따로 서서 기도합니다. 남들이 들으라고 기도합니다(눅 18:11, 12).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님께서 판정을 내리셨습니다(눅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바리새인은 타인을 의식했습니다. 자기를 과시하기에 바빴습니다. 하나님을 담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마음호수는 너무 답답해서 하나님을 담아내지 못했습니다. 거짓영성입니다.
세리는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합니다. 자기 가슴을 치며⋯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우리 시대의 영성가 필립 얀시는 자기 내부를 들여다보고 책 한 권을 씁니다.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
없어서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항상 입만 열면 하나님을 달고 살았는데 정작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야 할 때는 내 안에 하나님이 없더라는 탄식입니다.
내 안에서 영성을 찾아야 합니다. 영성을 누르고 있는 돌담들, 잡초를 캐내야 합니다. 그래야 영성이 자라 하나님의 성품이 되고 성령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어느 날 웃는 세리들을 거울 속의 내 안에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안에 들어와 있는 하나님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격영성입니다.
3. 옆으로 향하는 영성(생활영성)
이웃들에게 가지가 자라는 영성입니다. 교회사에서 영성가라면 사막에서 운둔생활을 했던 사막의 교부(敎父)들을 들 수 있습니다. 사도의 제자들을 속사도, 속사도의 제자들을 교부, 교부들은 사도의 손자뻘입니다. 교부(敎父)는 교회의 아버지입니다. 그들은 영성이 깊었습니다. 사막의 영성은 금식과 침묵과 노동입니다.
그들은 이런 일과를 하루 종일 평생 계속합니다. 그러니 잡음이 없는 고요한 사막에서의 수도와 수련을 통해 맑은 영성을 지니게 됩니다. 탐욕도 탐심도 거짓도 이기심도 없는 그야말로 천심(天心), 하늘의 마음이 되고 죄와는 접촉하지 않는 맑은 영성의 소유자들이 됩니다. 사람들은 이들을 교부-아버지라 했고 스승이라고 했고 현자(賢者)라고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사막의 스승을 찾아가서 자기 문제를 상의하며 토로합니다. 그들은 설교하지 않습니다. 맑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다 한 마디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에 문제를 걸어놓고 가십시오! 십자가에 답답한 마음을 내려놓고 가십시오! 그 한 마디에 사막의 순례자들은 마음에 위로를 받았고 해결책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영성의 힘입니다. 고요한 힘의 능력, 깨끗한 힘의 능력입니다. 영성은 이런 영적인 파워입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기독교회사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던 교부들과 수도원운동은 사라지고 기록으로만 존재합니다. 맑고 깨끗한 영성으로 한 때는 세상의 스승이고 현자들이 되었는데 왜 그들은 사라져 버렸을까요? 계속해서 더 큰 영성을 만들어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막의 교부들은 개인의 영성은 우수했습니다. 위로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영성, 내 자신의 내부를 성찰하는 안으로의 영성은 훌륭했는데 아쉽게도 밖으로 나가는 영성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세상과 자신들을 분리시켰고 세상과 자기를 격리시켰습니다. 생활영성이 없는 것이지요!
주님은 너희는 사막의 빛이라 하지 않고 세상의 빛이라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영성의 빛을 비추어야 하는데 영성을 사막이라는 됫박 안에 숨기고 자기들만 비추었습니다. 방문자에게만 비추었습니다. 자기만족의 영성들이 많았습니다. 생활로 나타나는 영성을 만들어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영성이 자기세대에 끝나고 맙니다. 영성의 단절입니다. 아쉬운 일입니다.
옆으로의 영성을 보여주었던 인물은 뜻밖에도 가장 세속적이던 삭개오입니다. 삭개오는 탐심과 탐욕의 아이콘입니다. 영성은 5%도 없는, 속물 인간! 그러던 삭개오가 하늘영성 예수님을 만나 집으로 모십니다. 그의 생애 가운데 예수님을 모신 것입니다.
삭개오는 재산을 팔아 토색했던 자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생활영성입니다. 초대교회의 전신이 삭개옵니다. 그래서 기독교전승은 삭개오가 초대교회 지도자라 합니다. 이런 지도자의 영성이 44절,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절,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는 아름다운 나눔의 영성을 만들어 내는 대단한 초대교회가 되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영성을 키워나가라면 삼위일체처럼 하나님과 나와 너, 세 방향의 영성으로 균형을 이루는 생활영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교회를 교회다움의 교회로 보존되게 합니다.
결론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는 무딘 습관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열정으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날카로운 열정을 깨끗한 영성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금년 한 해, 어설프게나마 우리교회 예배당을 영성의 장소로 만들어 봅시다. 사막 교부들이 침묵과 금식과 노동하던 영성의 장소는 아니어도 하나님과 내 육신이 겹쳐진 부분, 이 부분을 확장시키며 하나님이 내 호수 안에 붉은 단풍의 산으로 내려앉는 영성의 호수를 만들어 내는 공동체를 만들어 봅시다. 할 수만 있으면 남의 말 좋게 해주기, 뒷담화하지 않기, 성질 내지 않기, 내 것만 챙기지 않기⋯ 무례하지 않기, 고요히 하나님의 눈으로 내 안을 들여다보기⋯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나, 남들은 아는데 나는 모르는 나, 나는 아는데 남들은 모르는 나, 남도 알고 나도 아는 나⋯ 나도 몰랐던 나를 만나면 뭉클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그러면 내가 누구라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고 알아가는 것만큼 영성의 자리가 넓혀지고 맑아집니다. 그러면서 하늘영성으로 올라가면 그만큼 맑은 영성이 되고 이웃들을 붙들어 주면 존경을 받는 생활영성이 됩니다. 이런 영성을 조금씩 키워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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