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첫째 날의 축복원리(2)
창세기 1장 1~5절
서론
지난주일 신년설교로, 오늘 본문 창세기 1장 1~5절 ‘창조 첫째 날의 축복원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막 창조할 때는 상황이 아주 안 좋게 출발했습니다.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우주는 생명체가 살만한 정돈된 질서상태가 아니라 무질서, 뒤죽박죽⋯ 아무것도 갖춰지지 않는 적막 상태, 무가치한 상태, 깊은 공허, 빛 자체가 없습니다. 복도 없고 행복은 더 없는 아무 것도 없는 늪⋯ 애물단지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물단지를 놓고 활동을 시작하십니다. 혼돈된 땅에 만유인력으로 질서를 잡으시고⋯ 공허한 땅에 해 달 별들로 채우고 동식물로 채우니 보기에 좋았어요! 어둠으로 냉기가 가득한 땅에 광명체로 온기(溫氣)가 돌고 꽃이 피고 새들이 날고 나비가 춤을 추니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어요! 복된 땅! 복된 공간! 보물단지가 된 거지요.
2016년! 애물단지인가요? 우리 상황! 내 처지! 내게 힘이 되어야 할 사람이 애물단지인가요? 비록 우리 상황이 애물단지로 출발하지만 보물단지로 금년을 마무리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어떻게 애물단지가 보물단지가 될까요? 쓸모없는 늪과 같은 애물단지가 어떻게 복덩이, 보물단지, 낙원(樂園)이 되었을까요? 지난 주일에 이어 ‘창조 첫째 날의 축복원리’를 찾아봅시다.
하나님께서 혼돈과 공허와 냉기어린 우주를, ‘보시기에 좋은 땅’으로 만들어 내는 과정은 보시기에 좋은 땅을 열심히 만들어 내신 결과물이에요! 창조과정이 말씀으로만 된 것이 아닙니다.
3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었고⋯
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과 땅이 생겼고⋯
11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채소와 식물들이 생겼고⋯
금 나와라 뚝딱~ 너무 쉽지요? 명령하는 대로 척~ 척~ 생기니 아름다운 모습에 보시기에 좋아하시는 행복하신 하나님⋯ 이런 하나님을 생각하기에 우리도 복이라면 비나이다 비나이다! 손 모아 빌던지 기도로 빌던지 헌금으로 빌던지⋯ 복을 불러들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2절, 땅이 혼돈, 공허, 어둠의 냉기⋯ 여기에 대해 빛이 있으라! 명령하시니까 빛이 있고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보시기에 행복한 세상이 열렸을까요? 아닙니다. 혼돈이 질서라는 아름다움, 공허가 채움의 풍성함, 냉기어린 흑암덩이가 온기로 생명의 땅이 된 것은 2절,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이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운행하시니라⋯.
히브리어 원뜻은 '알을 품다', 암닭이 새생명의 탄생을 열망하며 알을 소중히 품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성령이 우주를 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지성경>은 이 구절을, ‘하나님의 영은 물의 심연 위에 새처럼 내려앉으셨다’고 번역합니다. 무질서한 우주에 성령이 우주를 품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닭이 달걀을 품고 있으면 21일 만에 병아리가 나옵니까? 히브리어 성경에는, 운행이라는 단어는 암탉이 병아리를 깨기 위해 품안에서 알을 굴리고 굴리는 행위입니다. 영어성경에 “운행하시니라”는 단어가 하버링(hovering)-‘배회하다’로 나옵니다. 성령께서 혼돈과 공허함, 흑암에 빛을 불러들이기 위해 계속 배회했다는 것입니다. 어둡고 공허한 세상, 어둔 세상에 “빛이 있으라!” 하니까 빛이 들어온 것이 아니라 명령 이전에 성령 하나님께서 빛의 창조를 위해 여인의 해산처럼 얼마나 수고하시고 노력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건 무얼 말합니까?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은 원래는 보기에 좋지 않았는데 보기에 좋은 것으로 만들려고 수고하고 그렇게 만들어 놓고는 보기에 좋다⋯ 아름답다 하시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은 우주가 없어도 삼위 하나님만으로도 서로 간에 사랑이 되고 서로 간에 영광으로 충만합니다. 우주가 필요하거나 인간세상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주천체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있었다면 왜 그러시냐고⋯ 삼위하나님으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영광이 되는 것으로도 족할 텐데 왜 거룩하신 분이 혼돈을 품고 있냐고⋯ 충만하신 분이 왜 공허를 품고 있냐고⋯ 빛의 근원이신 분이 왜 어둠 위에서 운행하시냐고 할 거예요! 사랑할 대상 삼위(三位)들이 있는데 왜 늪과 같은 곳에 생명을 만들려고 사서 고생하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근원은 사랑입니다. 사랑스럽기에 사랑하기도 하지만 사랑할만한 조건이 없는 이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정하고 사랑으로 품으며 굴리며⋯ 결국은 사랑의 대상으로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입니다. 그 과정에서 수고와 고통, 상실이라는 하나님의 아픔도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무질서와 공허와 어둠을 품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고통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상처를 받을 각오를 하셨습니다. 혼돈 속에 들어갈 작정을 하셨습니다. 이유는 사랑입니다.
그래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해 상처받을 각오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내가 교회를 위해 희생하고 상처를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사랑에는 상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선택하신 하나님, 얼마나 그들 때문에 사랑의 상처가 많았습니까? 상처를 각오하고 선민으로 택하신 것입니다. 아직 죄인되었을 때 우리들을 사랑하셨습니다(롬5:8). 그 사랑의 조건에는,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그야말로 팔 하나 떼어주는 고통의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인류를 얻었지만 그 어간에 독생자를 잠시나마 잃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희생이요 아픔입니다. 나를 희생시키면서 상대방을 사랑의 대상으로 만들어 사랑하는 사랑! 그것이 창조 첫 날, 애물단지를 보물단지를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방정식입니다.
그래요, 사랑할만한 조건을 갖춘 이들만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조건을 다 갖춘 이들만을 사랑한다면 성숙이 없습니다. 성숙해지는 사랑에는 희생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아픈 만큼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기에 희생을 기꺼이 지불합니다.
시각장애인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남자친구만이 유일한 벗이고 희망입니다. 남자친구는 언제나 곁을 지켜줬고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소녀는 남자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세상을 볼 수만 있다면, 너와 당장 결혼식을 올리겠어~”
어느 날, 뜻밖의 희소식을 듣게 됩니다. 누군가 두 눈을 기증했다는 거예요. 마침내 이식수술을 받은 소녀는 그토록 원하던 세상을 봅니다. 손으로만 만져보던 남자친구 얼굴도 보게 됐습니다. 기쁨에 벅찬 남자 친구가 무릎을 꿇고 구혼을 했습니다.
“눈을 떴으니 이제, 나와 결혼해주겠니?”
소녀는 기겁을 합니다. 안 돼~ 눈을 뜨고 보니 남자친구가 시각장애인입니다. 소녀는 냉정하게 잘라 거절했고 청혼하는 남자친구를 끝내 내쳤습니다. 남자친구는 눈물을 흘리며 떠났고 며칠 뒤 편지 한 통이 배달돼왔습니다.
"내 두 눈만은 언제까지나 아끼고 사랑해다오."
진정한 사랑은 수고의 대가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천지가 사랑할 대상이 아님에도 사랑의 대상으로 만들어 가며 사랑했습니다. 남자친구는 사랑의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눈을 희생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조건을 찾는 여인에게 배신당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우리가 사랑할만한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즐겁기는 하겠지만 진정한 행복은 없습니다. 하나님처럼, 남자친구처럼 상대방을 사랑의 대상으로 만들어 내려고 자기를 희생하고 포기하면서까지 사랑하려 할 때 우리는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고 계속적으로 창조언어! 긍정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사랑스런 대상~ 아름다운 대상을 만들어 냅니다.
어둠을 향해 빛이 있으라⋯.
하나님의 작명입니다. 창조언어는 긍정언어입니다. 해 달 별들아 있으라~ 채우는 긍정언어입니다. 긍정언어에는 창조성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5절, 어둠은 밤이라 부르십니다.
어둠을 어둠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어둠은 공포, 두려움, 실패, 위기⋯ 등의 개념, 그것은 부정의 개념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어둠이라고 하고 좋지 않는 상태를 어둠이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둠을 밤이라 작명합니다. 밤이 주는 개념은 휴식이요 안식이요 가정입니다. 사람들은 낮에는 가정 밖에서 활동하고 움직입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집으로 돌아오고 일손을 놓고 쉽니다. 밤은 휴식시간이요 재충전입니다. 그래서 어둠을 어둠이라 하지 않고 밤이라 작명합니다.
어떤 의미로 단어를 선택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단어의 뜻이 180도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내 인생의 어둠을, 어둠이라 합니다. 어둠은 불행이요 파괴입니다. 그것은 외로움이요 고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둠을 밤이라 작명합니다. 밤은 쉼이요 재충전의 시간입니다. 어둠은 작동정지이지만 밤은 생산적입니다. 식물은 낮보다는 밤에 더 왕성하게 자랍니다. 태양이 자라게 하는 성장속도보다 밤이 가져다주는 성장속도가 더 빠릅니다.
낮에는 태양이 하나뿐이지만 밤은 해와 달과 수많은 별들로 아름다움의 수를 놓습니다. 그만큼 밤하늘도 아름답고 밤하늘이 내려주는 이슬은 생산성이 높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둠을 어두움이라 하지 않고 밤의 지혜, 생산성, 밤의 은혜⋯ 들을 보셨기에 어두움을 혼돈과 흑암이라 하지 않고 밤이라 칭하시면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빛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는 어둠도 밤이라 명명하시며 좋아하십니다. 이것이 세상을 보며 좋아하시는 하나님의 행복비결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은 무엇일까요? 빛이 드는 대낮만 복일까요? 그러면 우리에게 햇볕이 들 날이 얼마나 될까요? 복있는 사람들은 단어선택을 잘해야 하고 단어 해석능력이 좋아야 합니다. 어둠을 1절의 흑암으로 보지 않으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그걸 밤이라 고쳐 읽으십니다. 그래서 그 밤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긍정의 밤이 된 것입니다.
솔로몬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형통과 고난으로 엮어 나가시기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합니다(전 7:14).
형통이 낮이면 고난은 어둠입니다. 형통은 복이고 곤고함은 불행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어둠이라 부르지 않고 밤이라 부릅니다.
밤은 어떤 시간인가?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이건 개역성경이고 개정판에는 “되돌아보아라”로 나옵니다. 자기 성찰이요 자기반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회상입니다. 번영할 때는 이게 안 됩니다. 자기 잘난 맛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둠이 왔을 때 사람은 자기를 돌아보게 됩니다. 이때가 인생이 성숙해 집니다.
욥기 35:10 이하, “나를 지으신 하나님 곧 사람으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며”
밤중-슬픔, 고통, 절망, 좌절을 통해서 우리에게 진정한 영가를 부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흑인 여가수가 노래할 때 기립박수를 했습니다. 누구에게서 사사를 받았냐 했더니 “나의 스승은 고통입니다! 고통이라는 스승께서 나를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배우게 하셨습니다!”
그녀는 어둠의 학교가 아닌 밤의 학교에서 수학한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119: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은 어둠입니다. 시편기자는 고난을 불행의 어둠이라 보지 않았습니다. 고난은 나를 성장시키고 성숙시키고 강력하게 만드는 밤의 사관학교로 본 것입니다. 그러기에 쓰기는 고난이라 쓰고 읽기는 밤의 사관학교로 읽습니다. 밤의 사관학교가 내게 유익이라 내가 밤의 사관학교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 성장했기 때문이라⋯.
이것이 밤을 제대로 해석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작명을 잘합니다. 그래서 고난을 은총으로 읽고 위기를 기회라 작명하고 문제를 기도제목이라 작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밤낮으로 5절, 빛으로 걸어가는 시기를 낯이라 하며 그 형통함에 찬송하고 비록 어둠이 왔을 때 어둠을 어둠이라 규정하지 않고 재생산의 밤, 안식의 밤으로 삼으면서 자기를 성찰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로 푹 적시면서 성장의 기회로 삼기에 그때도 은총이라고 말하면서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런 세계관을 가진다면 우리는 어떤 세계를 보면서 걸어가게 됩니까?
5절,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유대인의 역사, 성경 역사는 역설의 역사입니다. 그들은 어둠에서 시작하여 밝음으로 나갑니다. 저녁에서 비롯하여 아침으로 나갑니다. 안식일도 금요일 저녁부터 하루가 시작됩니다.
사회학자들은 이 독특한 세계관이 유대인을 처참한 고통 속에서도 굳세게 살아남게 한 원동력이라 합니다. 눈물에서 시작되어 웃음으로, 상복(喪服)으로 시작되어 드레스로 끝나게 해 준다는… 유대인의 성경적 세계관이 우리 세계관이 될 때 우리는 복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
주전 753년에 건국된 고대 최대의 로마제국은 3천명으로 시작된 작은 도시국가입니다. 그들은 호전적이고 음탕하고 방탕했습니다. 그러던 국가가 어떻게 세계 최고의 법을 만들고 번영을 이루었습니까? 여기에는 순결했던 초대교회 여인들의 아픔과 눈물이 있습니다.
로마의 남자들은 놀기는 방탕한 여인과 놀고 결혼은 초대교회 아가씨들과 했습니다. 교인들은 순결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여인들은 강제로 결혼했고 로마야만인들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아기를 임신했습니다. 어머니의 자궁은 모두에게 긍휼입니다. 애물단지 같은 씨들이었지만 아기들을 품고 믿음으로 키우고 자라서 신실한 정치가들이 되고 군대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자라서 로마제국을 기독교국가로 뒤집었습니다. 눈물로 품고 하나님의 자녀라 작명했더니
"저녁에 되매 아침이 되고⋯"
바울이 그렇게도 원했던 기독교 로마제국이 된 것입니다.
바이킹-해적의 섬나라 영국, 해적들이 기독교인 아가씨들을 납치해서 아내로 삼았습니다. 해적의 아내가 된 크리스천 여인들이 애물단지 같은 아기들을 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 작명했습니다. 아기들이 자라서 신사의 나라 영국, 기독교국가 영국을 세운 것입니다.
긍정심리학의 권위자 소냐 류보머스키 캘리포니아대(UC) 교수는 “행복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며 노력한 만큼 쟁취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행복하지 못하게 하는 상황을 행복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 행복에 대한 수고요 노력입니다.
-애물단지 상황이라도 품으십시오! 품은 것만큼 아프고 아픈 것만큼 보물단지가 됩니다.
-작명하십시오! 너는 어둠이 아니라 밤이라고! 우리를 교훈하고 성숙시키는 밤이라고!
-어둠에서 밝음을 보십시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세상은 밝음으로 시작하여 어둠으로 끝나지만 우리는 저녁으로 시작하여 아침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창조 첫째 날이 주는 행복의 비결입니다.
금년 한해, 행복을 만들어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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