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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부활, 변화의 시작(누가복음 24:30~35)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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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변화의 시작

누가복음 24장 30~35절

서론

설교 중에 절기설교가 어렵습니다. 같은 본문들을 계속해야 하고 청중들이 이미 그 내용에 대해 충분히 선행학습이 되었기에 자칫 뻔히~ 아는 이야기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설교에서 성경에서 선행학습은 없습니다. 성경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기에 언제, 어떤 방식으로 성령님께서 말씀에 역사할 줄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늘 알던 말씀들도 어느 날 강력하게 나를 강타하고 터치하고 내 가슴을 뛰게 만듭니다. 이것이 삼국지와 성경이 다른 의미이며 강연과 설교의 차이점입니다.

 

우리는 부활에 대해 너무 잘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부활 이후에 대해서는 제대로 모릅니다. 부활은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이고 부활 이후는 내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믿음생활은 교회 다니기 이전과 이후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를 다니면서도 예수를 제대로 몰랐던 B.C와 제대로 예수님을 믿게된 A.D를 나눠보세요!

 

본문에 두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살려고 도망을 가는 중이지요! 이랬던 사람들이 33, 죽음의 도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갑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기에 도망가다가 다시 죽으러 돌아갈까요? 어떤 변화가 일어났던 것일까요?

지식의 변화

두 사람은 70인 제자 일원, 글로바, 다른 사람은 무명입니다(18). 두 사람은 기적을 보았고 환호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열광했습니다. 그러던 사람들이 왜 도망치고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3일 전에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예루살렘은 계엄령 분위기입니다.

 

안식일이 지나 일요일, 예수님 부활소식이 제자들 사이에 빠르게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증인들은 대부분 여자들입니다. 당시 여인들의 증언은 법정에서 채택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도 빈무덤은 보았는데 부활의 주님을 직접 대면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이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목으로 체포 될 것입니다. 검거령이 내리기 전에 도망가는 것이 유리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셨다는 말도 예루살렘에서 달아나도록 만들었습니다.

 

도망을 가면서도 두 사람은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모든 일은 예수님에 관한 지식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탄생 비화, 산상수훈을 비롯한 훌륭한 교훈, 용서와 축복… 기적을 모두 알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까지 압니다. 생생하게 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그 이상의 예수님은 알 수 없습니다. 지적인 앎의 한계입니다.

 

15,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왔으나 

 

16,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길게는 3~1년 이상을 지냈기에 예수님에 대해 훤히 안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죽음은 이해하지 못했고 믿지 못했습니다. 부활은 더 믿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교훈들은 알고 믿었지만 죄를 위해 내어주심이 되고 의인됨을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은 동행중에 있었지만 몰라봤습니다.

 

예수 생전(生前) 가까이서 지내 얼굴을 잘 아는 그들이 정작 예수님을 옆에 두고 왜 몰라보았을까요? 부활의 예수님은 영 다른 얼굴로 변했을까요?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랍오니여! 선생님이여! 외쳤습니다( 20:16).

 

두 제자는 왜 알아보지 못했습니까? 16,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눈이 '가리어져'는 고정되고 변동이 없음을 뜻합니다. 십자가 처형에 쇼크가 커 그렇게 죽은 존재가 결코 살아날 수 없다는 현실과 논리, 과학적 근거에 시선이 고정된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만 생각했지 사흘 만에 부활한다는 주님의 예고는 종교적 수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30, 떡을 축사하시고 떼어주셨습니다. 그제야 31, 알아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자신을 보여주셔야 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도 얼마든지 주님을 설명합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님, 주일학교부터 들은 예수님을 지식적으로는 얼마든지 설명 가능합니다. 그러나 지식으로만 아는 주님은 우리 인생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 이론을 제시한 마르크스는 신학교 출신입니다. 그 비상한 머리는 성경을 빠삭하게 압니다. 성경시험을 보았다면 A+이겠지요. 그러나 그는 예수를 버리고 힘과 무력의 계급투쟁을 통한 평등사회 건설을 위해 공산주의를 만든 것입니다.

 

세례요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과 친척 지간이었고 동갑내기로 친구처럼 지냈지만 예수의 메시아됨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30세가 되어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다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때 성령이 눈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저를 육신으로만 알았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고백합니다.

 

우리가 아는 예수님은 어떤 예수입니까? 교과서적인 예수입니까? 33년의 예수님입니까? 33년의 죽은 예수는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두 제자처럼 엠마오로 내려가는 하향적인 삶으로 추락시킬 것입니다. 도마와 같은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나의 주인, 나의 삶의 주인, 나의 통치자,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 인생으로 하여금 고생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신 좋으신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믿게 될 때 비로소 영적으로 주님을 경험하며 우리 인생에 부활의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감정의 변화

글로바와 한 제자가 선생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눈이 가려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눈이 가려졌나요? 성령의 역사이지만 슬픔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구세주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21, “우리는 그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예수님에게 걸었던 기대감! 이제 그들에게 예수님은 20, 못 박힌 예수님입니다. 죽은 예수님은 더 이상 기대주가 아닙니다.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대제사장들은 예수만 못 박은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꿈도 기대도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이 죽을 때 그들의 꿈도 기대도 함께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17, 그들은 슬픈 빛을 띠고…

 

슬픔은 상실입니다. 3년 전, ‘목적이 이끄는 삶을 쓴 새들백교회 릭 워렌 목사의 아들이 자살했습니다. 27세 매튜는 다정하고 친절한 성품의 청년이지만, 우울증과 자살 충동으로 오랫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아오다 극복을 못하고 자살한 것입니다. 워렌 목사는 아들이 죽던 날 새벽아침 교회 신도들에게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나의 가장 어린 아들이자, 새들백교회 성도였던 매튜가 죽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워렌 목사는 53세입니다. 교인들이 2만 명이 넘지만, 아직도 남매가 살아있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평생 상실감으로 슬픔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껍데기만 사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런 상실감에 빠져있습니다. 치유될 수 없는 상실감으로 엠마오를 향해 내려가는데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오셔서 말씀을 전합니다. 25, 성경예언은 물론 예수님의 부활을 더디 믿는 믿음을 나무라며 말씀을 풀어주십니다. 26, 27. 부활에 대한 말씀! 말씀은 약속이고 그 약속은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32,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불타지 않더냐! 슬픈 빛, 슬픈 감정이 뜨거운 마음이 됩니다. 기대감이 살아난 것입니다. 진정한 감격과 영적 흥분은 말씀에서 나옵니다. 손바닥에서도 나오고 입술에서도 나와야 하지만 말씀에서 나와야 영적 뜨거움입니다. 말씀에서 나온 뜨거움만이 생애를 변화시킵니다. 감정의 뜨거움은 곧 식어버립니다. 인생을 변화시키는 것은 말씀입니다.

 

교우 여러분! 무엇 때문에 슬픈 빛을 띠고 있습니까? 어떤 기대감이 무너져서 그렇게 슬픈 얼굴입니까? 말씀과 만나세요! 말씀 안에서 심장을 뛰게 하실 예수님을 만나세요!

베드로로 하여금 물속에 뛰어들게 만든 것은 예수님께서 그를 감동시켰기 때문입니다. 배신한 자기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믿어주고 재활용하려고 갈릴리까지 오셨다는 사실 앞에 베드로는 감동합니다. 그 감동이 물속에라도 뛰어들게 했던 것입니다. 사람은 감동하면 일을 냅니다. 일을 내지 못한 것은 가슴이 뜨겁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국 카네기공대 졸업생들에게 성공하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물으니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은 15%이고, 나머지 85%는 감동을 통한 좋은 인간관계를 꼽았다고 합니다.

설교자들은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기대감들이 살아나기를 바라며 말씀을 전합니다. 상실감에 빠졌던 사람들,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며 슬픔의 빛을 띠고 있는 사람들이 전해지는 말씀을 듣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그 심령들을 기대하며 준비할 때 가장 행복합니다. 그것이 오늘 저를 이렇게 힘 있게 합니다.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 것! 말이 안 됩니다. 이건 지식입니다. 그러나 지식과 현실은 다릅니다. 고추장에 찍어먹으면 이중으로 매운 것이 아니라 덜 맵습니다. 지식에만 의존하면 제대로 고추 맛을 모릅니다. 성경도 지식으로만 채워가지 말고 마음에 뜨거움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뜨거워지면 그때부터 말씀은 나를 움직이는 에너지가 됩니다.

물속이라도 뛰어들려는 베드로의 열정이 다시 쓰임을 받습니다.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자신을 본 모세는 80세라는 난관을 뚫고 위대한 지도자가 됩니다. 주님은 식은 사람이 아니라 가슴에 불이 있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말씀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지식으로 인도되고 그 말씀으로 심령이 뜨겁게 달아오를 때 우리에게서 부활의 변화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행동의 변화

두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 방향으로 두 사람이 가고 있습니다. 길은 방향을 알려줍니다. 경부선은 부산으로 가는구나, 호남선을 타면 광주 쪽으로 가는구나, 길은 방향을 보여줍니다. 지금 예루살렘에는 부활소식이 전해지는데 두 제자는 엠마오로 갑니다. 예루살렘이 뒤숭숭해지니 사명을 포기하고 달아나는 길입니다. 공동체에서의 이탈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 인생의 하향 길로 나선 사람들 앞에 부활의 예수가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올라가는 자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려가는 자들에게도 나타나십니다. 죽음을 향해 내려가는 나인성 청년에게 관을 세우며 청년아 일어나라!” 명령하신 분입니다. 인생의 공허함에 빠져있는 삭개오에게 뽕나무에서 내려오라! 내가 뽕나무가 되어줄께! 이제 너도 나처럼 세계를 품을 수 있는 영적 거인이 될 것이다!“ 고 하십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마리아에게는 더 이상 귀신의 조종을 받지 말고 새사람이 되자고, 남자들을 전전하던 수가성 여인에게는 더 이상 육신의 욕심에 끌려 다니지 말고 내가 주는 영생의 물을 마시자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항상 내려가는 자들의 편이 되십니다.

그 예수님이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결과는 당연하지요! 33,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당연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예루살렘에 무슨 영광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죽음의 길입니다. 그러나 부활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니까, 부활 앞에 가슴이 뛰니 더 이상 달아날 수 없습니다. 부활의 사실을 알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달아나던 예루살렘으로, 혼자 살겠다 버렸던 공동체로 유턴합니다.

 

부활은 우리의 삶을 항상 유턴시킵니다. 죽음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분열서 화합의 길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실패의 길에서 성공의 길로, 베옷에서 드레스로의 길로 돌아서게 합니다. 그것이 부활이 주는 유턴의 삶입니다. 부활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기에 하나님 쪽으로 자석처럼 전기처럼 끌어당기는, 끌어가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유턴되고 힘을 잃었던 삶은 새로운 힘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별로 유능하지 못한 축구선수가 공에 맞아 잠시 실신을 했습니다. 병원에 실려 간 축구선수! 더 이상 축구선수의 삶은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요, 얼마 동안 치료를 받고 다시 운동장으로 복귀한 선수~ 훨훨 납니다. 최고의 골게터가 됩니다.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별볼없는 선수가 실신하고 난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나도 모르겠어요! 실신에서 깨어나자 자꾸 내가 누구냐 묻길래 귀찮아서 너는 누구냐? 너는 차범근이지! 그러니 진짜 지가 차범근인 줄 알고 저렇게 날뜁니다.

 

부활 예수님을 만나 이후의 제자들은 펄펄 뛰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저 속에 예수가 산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부활 이후의 우리의 사람입니다. 예수가 우리를 능력있는 삶으로 나가도록 만듭니다. 이렇게 되어야 우리는 제대로 예수를 만났다! 믿는다 할 수 있습니다.

결론

카터 콜론은 두려움에 속지 말라는 책에서 “21세기의 주류종교는 느낌이 좋은 종교가 된다고 합니다. 포시스는 느낌이 좋은 종교를 십자가가 삭제된 종교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없이 아무리 힐링하고 위로해도 그건 눈속임입니다. 예수님만이 진정한 희망이고 위로이고 힐링입니다. 그 예수님 안에서 뛰는 가슴만이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윌티 모빌리는 <대학의 위기>에서 "만일 당신의 믿음이 십분의 일만 진실이라면 당신은 현재보다 열 배는 더 흥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 내려가고 있습니까? 왜 침체상태로 있습니까? 예수님을 제대로 몰라서 그런 것은 아닙니까?

성경의 예수님은 알아도, 33년 예수님은 알아도 부활하시고 여기 나와 함께 동행하는 예수님을 몰랐기에 달아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부활의 주님을 확실히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내 가슴은 식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도 슬픈 빛을 띠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말씀을 가까이 하세요! 말씀을 사모하세요! 말씀이 나를 뜨겁게 달라고 갈망하십시오!

엠마오로 내려가는 삶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부활의 유턴이 있기를 기도하십시오!

그런데도,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이 설교는 몇 차례 했습니다. 내용을 조금씩 바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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