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초대교회 영성으로(1)
사도행전 2장 43~47절
서론
2016년도 우리교회 사역주제를 “다시 초대교회의 영성으로!”라고 정했습니다. 왜 이런 주제가 필요할까요? 한국교회가 너무 세속화 되고 인본주의 믿음들입니다. 초대교회는 영성이 살았습니다. 그러니 43절,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영성에 대한 존경심입니다. 47절,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영성으로 칭찬을 받으니, 초대교회가 크게 부흥된 것입니다.
우리시대에는 영성이라는 단어들이 풍성합니다. 그러나 대홍수에 먹을 물은 없듯이 영성은 있으나 그 영성이 교회다움을 이루지 못하고 존경 받는 인격 성도로 향상시키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교리로서의 영성, 종교로서의 영성, 자기도취에 빠지는 영성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영성은 무엇일까요? 무아지경의 깊은 세계다, 성령의 은사다, 말합니다. 케네스 리치는 “기독교영성은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할 수 있는 깊은 내면의 힘! 옳고 그름을 식별하고 선한 쪽으로 영향력의 힘이 영성입니다.
우리의 영성은 자기계발의 성질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본능적인 종교성은 있어도 영성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영성은 내 안에서 찾아내고 계발하고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1차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내려야 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입니다. 이걸 공급받아야 영성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사람은 동물과 함께 흙으로 창조했습니다. 여기서 끝났으면 인간은 동물 중의 하나입니다. 먹고 싸우고⋯ 교미해서 새끼들을 낳고⋯ 유인원이지요!
유인원(類人猿)은 신체구조가 원숭이류보다 더 사람에 가까운 동물에 붙여진 명칭입니다. 유전학적 분석에 의하면 침팬지, 피그미침팬지는 원숭이보다는 계통적으로 사람에 더 가깝고 DNA의 98% 전후를 사람과 공유합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이 되다만 원숭이가 유인원입니다. 인간 DNA를 98% 공유하는 유인원은 사람이 되지 못해 동물로 살고 유인원과 염색체가 거의 흡사한 아담은 지성과 이성, 종교성 인간으로 달리 발전하며 사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2장 17절,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생기(生氣)는 '영혼'(잠 20:27), '호흡'(사 2:22), '기운'(욥 33:4)으로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입니다. 하나님의 생명기운을 푸우~ 흙덩이 육체로 넣었을 때 지성과 이성, 종교성, 영성을 지닌 하나님의 형상이 된 것입니다. 이런 생기가 없는 유인원이나 동물들에게는 하나님의 형상, 영성이 없습니다.
그러니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두 성질이 공존합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육체에는 동물 DNA가 있습니다. 인간은 노동하고 먹거리를 찾고 남녀가 본능적으로 제 짝을 찾고 자식 낳고⋯ 치열한 생존경쟁, 양육강식의 법칙에서 땀 흘리며 살아갑니다. 이걸로 끝나면 유인원 짐승이지요!
사람에게는 동물 본능 안에 하나님의 생명기운, 영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처럼 착하게 살고자 하는 양심이 있고 짐승처럼 악하게 살고자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이 양면성이 내 안에서 평생 싸웁니다. 짐승이 이기면 짐승 같은 인간, 천사가 이기면 천사로 존경을 받습니다.
초대교회가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이루며 천사 같은 존재들이 됩니다. 혈통과 민족을 초월했습니다. 박해하던 원수들이 옥에 갇혔을 때 음식을 갖다 주고 변호해 주었습니다. 일반인의 상식을 뛰어넘는 천사 마음씨였고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측은지심이고 영성입니다. 이런 영성 앞에 백성들이 놀랐고 칭찬이 자자하면서 교회가 부흥된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영성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으면서 몸 밖으로 흘러나왔습니다. 세상은 내 안에 있는 심성, 종교성을 계발해서 생각이 깊은 사람, 가르침이 깊은 사람, 행동이 깊은 사람을 영성이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다릅니다. 기독교는 사람 머리에서 나온 종교작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에서 나온, 하늘 종교입니다. 그러니 영성은 내 안의 종교성 함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기운입니다. 우리가 영성이 되려면 하나님의 생명기운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말씀, 기도, 찬양, 예배, 헌금, 헌신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정규적으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기운도 일종의 세포와 같이 계속 생성하고 소멸됩니다. 지난날 믿음과 은혜로 지금도 견디려 해서는 종교인이 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내 안의 동물근성은 소멸되고 하나님의 생명기운이 생성되도록 계속 기도하며 영성을 구해야 합니다. 내면을 살피며 영성지수를 높여야 합니다. 이거 없이 교회 일을 하려니 힘들고 불평 투성이고⋯ 영성이 없으니 설교가 심심하고 예배에서 영적기운, 하나님의 생명기운을 공급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노량진에 아름다운교회라는 고시생 중심교회가 있습니다. 10년간 이 교회출신 사법시험 합격자가 507명, 지난해만도 36명 합격생을 배출했습니다. 이번에 고시합격생 33명이 ‘아름다운교회-고시 합격한 청년들의 신앙이야기’라는 책을 냈습니다. 이곳에서 어떻게 공부하고 기도하며 신앙생활을 했는지 보여주는 간증수기입니다. 인치승 담임목사가 강조하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의 맛을 모르고 무의미하게 교회를 다니지 말라! 만약 그런 식으로 교회에 다닌다면⋯”
“교회생활이 바리새인처럼 굳어지기 쉽다.”
“교회 다닐 필요성을 못 느끼기에 언젠가는 그만 둔다.”
“교회 다니는 동안 바람직하지 않는 일만 경험하고 안티 노릇을 하게 된다.”
이런 현상이 흙덩이 종교성으로 남을 때 나타나는 신앙생활의 역기능입니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생기로 부풀림을 받지 못하니 생령이 아니라 육체로 자라고 흙덩이끼리 세속에서 노는 물이 같은 것입니다. 내 안에 신앙의 순기능, 영성지수를 높이려면 초대교회 영성으로의 환원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어떻게 영성지수를 올렸습니까?
4절,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성령을 충만히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받으라! 푸우~ 생기를 그들의 심령 속에 불어넣으신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걸 유지하려고⋯
42절,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계속 배웠습니다.
42절,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영성의 성장에 대한 기도, 복음 확장에 대한 기도입니다.
46절, 성전예배에 부지런히 참석했습니다. 성전출입회수와 영성지수는 같이간다 생각했습니다.
47절 오직 하나님만을 찬미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갈망하고 감사하며 기뻐합니다.
그러니 계속적으로 인풋(in put),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들였고 육체본능의 영역은 줄었습니다. 성령의 영역은 확장됩니다. 속사람이 강화됩니다. 흙덩이가 성령덩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향력으로 채워지는 영성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인격, 하늘에서 입히는 영성입니다.
우리가 이런 영성을 구하지 않으면 세속주의 인본주의 기독교를 다음세대에 물려주게 되고 칭송의 대상이 아닌 조롱의 대상이 되는 애물단지가 됩니다. 그러니 교회에서는 내 영성지수가 어느 정도인가,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받아 영성지수를 높이는 일에 올인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배의 1차 목표입니다. 예배시간에 우리는 어디를 향합니까?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실까? 내가 무엇을 받을까? 자신입니까? 저 사람들 왜 저래?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주목하세요! 영성을 공급받으세요! 성령의 기름부으심에 전념하세요! 우리교회가 초대교회의 영성의 장소가 될 줄 믿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재현이 될 줄 믿습니다. 금년에 이걸 힘써야 합니다.
초대교회에 영성이 강력한 또 하나의 교회가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입니다. 어느 교회보다 탁월하게 은사가 나타났습니다. 교회활동이 활발했고 크게 부흥되었습니다. 그러나 형제들끼리 반목과 대립을 가져왔습니다. 은사들은 풍성했지만 그것은 거짓 영성, 가짜 영성이었습니다.
진짜 영성은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보여주었던 영성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계속적으로 생기를 공급받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교회생활을 보세요!
43절,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영적 권위가 세워진 것입니다.
44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절,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믿는 이들이 예수의 피로 한 형제가 됩니다. 혈육보다 더 귀한 형제가 됩니다.
46절,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취미생활의 사역에나 지위와 계급을 만들어 내는 어떠한 제도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냥 서로가 좋았습니다. 사역에서 남들이 더 높아지기를 축복했습니다.
47절,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그러니 부흥은⋯
47절 하반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저절로 됩니다.
여기서 세상과는 다른 교회만의 진정한 부흥이 나옵니다. 진정한 부흥은 프로그램이 만들어 내는 억지 부흥이 아닙니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얼마나 인위적인 부흥운동을 했습니까? 무슨 물건을 준다, 무슨 경품을 준다⋯ 그래서 무슨 전도니⋯, 백화점식 세일홍보를 해왔습니다. 그런 일로 몇 몇 교회는 세상에서 말하는 재미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 전체는 그 결과 세속화라는, 신도수 하락세라는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로마 가톨릭, 전도프로그램 돌리지 않습니다. 직분선거도 없으니 직분에 욕심 낼 일도, 성당 안에서 싸울 일도 갈등도 없습니다. 어차피 뭔가 얻을 열심이 없으니 싸울 일도 없는 것이지요! 세상 사람에게는 싸우지 않으니 거룩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당을 선호합니다.
한국교회는 교회마다 분란입니다. 왜 싸울까요? 때로는 열심이 문제입니다. 하늘에서부터 임하는 성령기운으로 열심을 내지 못하면 교회활동이 개인의 취미생활이나 자기 만족도를 높이기 위한 사역에⋯ 때로는 직분에 욕심을 내게 되면서 불협화음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러면서 교회를 부흥시키면, 냉랭한 사람 100명이 200명으로 배가된다면 이게 부흥일까요? 무슨무슨 전도주일로 너그러움이 없는 사람 100명이 너그러움이 없는 200명으로 늘면 부흥일까요? 배려가 없는 사람 100명이 200명으로 부흥되면 부흥일까요? 웃지 않는 사람 100명이 웃지 않는 200명으로 부흥한다고 부흥입니까? 영성의 성장도 아니고 영적부흥도 아닙니다.
교회의 진정한 부흥은 영성이 부흥되며 더 많은 영성의 신자로 배가되는 부흥입니다. 프로그램을 통한 전도도 필요하고 부흥도 중요하지만 그거 일시적입니다. 그거 되는 교회도 있지만 교회를 오히려 세속화시키고 교회를 무슨 백화점으로 전락시킵니다. 교회의 본질을 놓칩니다.
진정한 부흥은 초대교회에서 찾아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하나님으로 생기를 인풋(in put) 하더니 그게 풍선처럼 점점 부풀려서 교회 안의 사람들에게 배출-아웃풋(out put)을 했습니다.
서로 사랑했습니다. 이해했습니다. 너그러웠습니다. 어떤 조직이나 시스템, 직분보다 사람이 더 소중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행복했고 하나님을 맛보았고 친정아버지의 너그러운 품에 안겼습니다. 박해 받으면서 오해 받으면서 추방당하면서도 예수 이름으로 그런 일을 겪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상급으로 삼았습니다. 빡빡한 생활에도 여유가 있고 웃음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의 사는 모습에 비신자들이 놀란 것입니다.
‘아~ 사는 것은 저런 것이구나~ 사람은 저렇게 살아야 하는구나~ 저렇게 사랑하며 저렇게 배려하며 저렇게 관대함을 보이는 것이 진짜 사는 것이고 진짜 사람 노릇을 하는 것이구나~’
그래서 교회 안으로 들어왔고 우리교회를 부흥시키려는 일념의 전도가 없어도 교회가 교회답고 성도가 성도답고 예배가 예배다우니 불이 있는 곳에 불나방이 찾아오듯이 그렇게 찾아오더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먹을 것이 있으니 배고픈 심령들이 찾아오더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우니 부흥되더라는 것입니다. 왜 간단한 방법들을 놔두고 어려운 동원방법을 쓰면서 억지 부흥을 꿈꾸는 것인지⋯. 우리가 교회의 사랑의 본질을 회복하는 일에 주력해야 합니다.
교회의 구성원 모양새는 생쌀이 아니라 떡입니다. 생쌀은 한 알씩 존재합니다. 그러니 맛난 음식을 만들 수 없습니다. 아무리 생쌀이 많아도 밥도 될 수 없습니다. 쌀은 흩어져 있지만 새롭게 한 덩어리가 되는 게 떡입니다. 교회는 쌀이 아니라 떡입니다. 하나씩 흩어져 있지 않고 떡처럼 하나로 뭉쳐집니다. 내 문제가 네 문제고, 친구의 기쁨이 내 기쁨이요, 슬픔이 내 슬픔이 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생쌀이 떡이 되려면 물로 씻어 뜨거운 불로 찌고 떡메로 두들깁니다. 이런 연단의 과정을 지나면 생쌀이 떡으로 뭉치면서 하나가 됩니다. 이전에는 누구와 있는 것도 싫고, 모이기도 싫었지만 기름부으심을 통해 더러운 것을 씻어 버리고 뜨거운 불을 가하면 변하면서 옆 사람이 사랑스러워지고 너무 좋아 떨어지지 않으려 찰싹 붙습니다.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 십자가에서 죽으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신 사랑의 불에 옛 심성은 없어지고 하나가 됩니다. 사람들이 사랑스러워집니다. 옆 사람이 예뻐 보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가 되는 영성, 교회 부흥을 일으키는 영성입니다. 이런 초대교회 영성으로, 하나가 되는 영성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너그러운 영성으로 돌아갈 때 우리교회가 부흥됩니다!
결론
큰 규모를 자랑하던 수도원이 있었습니다. 17, 18세기 수도원 박해운동과 19세기에 세속주의의 영향을 받아 폐허가 된 수도원에는 5명의 수도승이 남았습니다. 70이 넘은 고령들입니다.
수도원이 위치한 깊은 산 속에는 초능력을 가졌다는 유대교 랍비가 살았습니다. 답답한 수도원장이 방문해서 다시 영광을 회복할 비결을 물었습니다. 랍비는 탄식하며 말했습니다.
“우리 회당도 발길이 끊어졌습니다. 지금은 영성의 시대가 아닙니다. 방법이 뭐 있겠어요?”
수도원장이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올 때 랍비는 이상야룻한 말을 했습니다.
“아무런 조언도 드릴 수 없어 미안하지만, 한 가지! 당신들 가운데 메시아가 있습니다.”
그 후, 시간이 지나면서 늙은 수도사들은 웃긴다던 랍비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우리 중에 메시아가 있다고? 그럴 일은 없지만 그래도 있다면 원장이겠지. 그는 한 세대도 넘게 지도자였어. 어쩌면 토마스 형제? 그는 성스러운 사람이잖아. 엘러드? 변덕은 있지만 옳은 이야기는 했어. 필립은 아닐 거야. 그는 두드러진 게 없거든. 그러나 우리가 필요한 때이면 나타나 도움을 주었어. 나? 나는 절대로 아니야. 그럴 가능성은 없어. 나는 평범하니까. 그런데… 오, 하나님! 저는 절대로 아닙니다.’
늙은 수도사들은 만에 하나, 메시아일지도 모르는 서로에게 깊은 존경으로 대합니다. 가능성은 없지만 내가 메시아 일지도 모르기에 스스로에 대해서도 특별한 존경심을 지닙니다. 수도사들 사이에 존재하는 특별한 존경심에는 사람을 잡아끄는 힘이 있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그 힘에 끌려 입문했습니다. 이어 젊은이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수도원은 다시 번창했고, 빛과 영성의 중심지가 됩니다. 몰락해 가던 수도원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간단합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와 깊은 존경심, 이것이 영성입니다. 영성이 있으니 전도하지 않아도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하늘에서 영성을 계속 공급받으면서 서로에게 흘러 보내야 합니다. 생쌀이 아니라 신뢰와 존경으로 떡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그런 곳입니다.
다시 영성의 장소가 되는 것! 이것이 금년 우리 교회생활의 목표입니다. 바닥이 된 영성! 하나님의 긍휼로 우리의 영성이 회복되기를 기원합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와 존경으로 다시 사랑의 교회, 영성의 장소가 되기를 위해 더욱 노력합시다! 금년도 사역주제를 읽고 마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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