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의미
갈라디아서 2장 20절
서론
젊은이 신자가 나이 지긋한 성도에게 물었습니다.
“어르신,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어르신은 잠시 생각하더니 그 의미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건 두 가지를 의미한다네. 우선,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오직 한 방향만 향하게 되지.”
1. 십자가, 한 방향을 보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한 방향만 바라봅니다. 십자가형벌은 더 이상 내 생애가 없다는 종말선언입니다. 내 꿈이나 성품, 생활, 사상이 없는 것입니다. 남은 건 오직 한 방향-죽음뿐입니다. 나는 죽는다! 죽었다! 그것뿐입니다. 더 이상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십자가에 포개 죽었다는 것입니다.
옛날 십자가형틀에는 죽은 사람 위에 산 사람을 포개 못 박는 잔인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누구를 생각할까요? 자나 깨나 먼저 십자가에 달린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서 헤어 나오려야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냥 그 사람과 함께 죽을 때까지 함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은 주님과 함께 죽었다고 합니다. 내가 살아있는 것 같지만 이미 과거의 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자신 안에는 예수가 산다고 했습니다. 예수와의 연합입니다.
연합했다는 것은 결혼했다는 것입니다. 결혼은 한 방향을 보는 것입니다. 한 방향은 ‘서로’를 바라보는 것과 다릅니다. 남편과 아내가 같은 방향을 보아야 합니다. 한 방향을 보지 않을 때 한 지붕 밑에서 부부는 남이 될 수 있습니다. 부부는 한 방향만을 보아야 합니다. 공유하는 부분이 많을수록 부부는 행복합니다. 교회에 다녀 좋은 것은 공유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과 같은 방향만을 바라보며 산다는 것입니다. 나의 방향은 없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방향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은 방향을 보았습니다. 언제나 하나님만을 주시했습니다. 십자가에서도 자기 죽음이나 다른 것은 보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에 대해 예민했습니다. 그래서 12시쯤 사방에 어둠이 깔려오자 외치셨습니다.
“어찌 나를 버리십니까?”
오직 하나님에게만 시선을 모았습니다.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그랬고 33년 생애도 그렇고 십자가에서조차 그랬습니다. 죽음의 순간에도 “내 영혼을 부탁합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방향에서 한 번도 시선이 어긋난 적은 없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방향을 보아야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것은 내게 아무리 하찮게 보여도 귀하게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찮게 여기는 것은 아무리 내 눈에 크게 보여도 하찮게 여길 수 있는 믿음의 배짱, 믿음의 눈들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성화의 방향을 보아야 합니다. 일보다 더 중요한 것, 성화입니다. 성화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면 모든 문제들, 인간관계들, 죄악에 관계된 것들이 저절로 해결되고 극복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방향, 성화의 방향을 바라보려면 성령 충만한 삶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려면 계속적으로 성령에 대해 호흡해야 합니다. 교회가 성령을 들이킬 때 교회는 예수님과 반대되는 모든 것들을 밖으로 내쉬게 됩니다. 성령이 충만하지 못하게 하는 내 속의 비성령의 내용물들이 있습니다. 그걸 내쉬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 충만이 되고 예수님과 한 방향이 될 수 있습니다.
토저는 <이것이 성령님이다>라는 책에서, “성령충만은 우리의 도덕수준을 높이며 우리의 지성을 날카롭게 하며 성화된 감정을 고양시킨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내용입니다.
노인의 말을 곰곰이 묵상하던 젊은이가 다시 여쭈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두 번째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어르신이 대답합니다.
“그건,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이미 다시 돌아 올 수 없다네.”
2. 십자가,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돌아올 수 없습니다. 고대사회에 십자가는 최고의 형틀입니다. 로마인은 로마시민권자들에게는 십자가 형벌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십자가는 치욕적입니다. 한 사람의 죽음만 아니라 한 가문의 죽음이고 한 마을에서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 나오면 마을 전체가 죽음입니다.
십자가에 올라가면 살아서 내려오는 법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달리려 집을 나서면서 아내에게 “오후 5시쯤에는 돌아올 수 있겠소!” 말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죽기 위해 집을 나서는 사람은 영원한 작별을 고해야 합니다. “여보, 잘 있구료!” 마지막 말입니다. 그걸로 끝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과 작별입니다. 익숙한 것들과 작별입니다. 내게 익숙했던 것들은 무엇일까요? 대인관계도 되고 여가선용의 모든 취미들이 포함됩니다. 집안과의 영영한 작별일 수도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주초문제를 말할 수도 있고 제사문제도 포함이 됩니다.
이것들은 정말 익숙한 것들이고 즐거운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와 같이 익숙한 것들과의 작별을 뜻합니다.
교회에 나온다고 전부가 아닙니다.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 주님과 함께 가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자신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과의 작별입니다.
이것이 퇴로를 차단한 길 떠남입니다. 돌아갈 길이 없으면 용감해집니다. 퇴로가 없는 쥐는 고양이도 쉽게 공격하지 못합니다.
왜 용병 10명이 향토방위군 1명을 못 감당합니까? 용병은 달아날 길이 있어도 향토방위병은 도망갈 길이 없습니다. 도망가면 자식들이 죽고 아내들이 유린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퇴로가 없는 배수진을 치고 있기에 무섭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퇴로(退路)가 없습니다. 오직 앞으로만 나갈 수 있습니다. 돌아가려는 마음은 어중간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러기에 세상과 교회의 연합은 실상은 불가능합니다. 세속화된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가련한 잡종(雜種), 잡족(雜族)에 불과합니다.
결론
십자가의 두 의미는 슬픔과 고통입니다. 예수님은 앞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보시며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했습니다.
루터는 갈라디아강해에서 “즐거운 교환”이란 말을 처음 사용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의(義)가 교환되기에 즐거운 거래라는 것입니다. 루터는 말합니다.
“즐거운 교환으로 그 분은 우리의 죄된 인격을 자신에게 입히시고 자신의 무죄하고 승리하시는 품격을 우리에게 허락하시었다. 이것을 입고 단장한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다.”
십자가는 신비한 교환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인간에게는 항상 이익이 되나 하나님께서는 항상 손해가 되는 거래면서도 십자가장터에서는 아름다운 교환, 거래가 이루어집니다. 십자가에서는 독생자와 죄인이 서로 교환되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한 방향만 바라보며 살고 다시 돌아올 수 길을 가면서도 후회하거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충분히 보상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찬예식을 통해 이런 사실에 대한 자부심과 새로운 결단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주일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리마대 요셉의 부활절(마가복음 15:42~47) (0) | 2023.08.12 |
---|---|
부활, 변화의 시작(누가복음 24:30~35) (0) | 2023.08.12 |
예수님의 도제(徒弟)교육(누가복음 14:25~33) (0) | 2023.08.12 |
모세나무에 불이 붙다!(출애굽기 3:1~5) (0) | 2023.08.12 |
열등감에 눌리면 영성도 눌린다!(출애굽기 4:1~7) (0) | 2023.08.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