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아기의 이름(1)-예수
마태복음 1장 18~25절
서론
지난 목요일에 라디오방송을 듣는데 성탄찬송이 흘러나왔어요! 극동방송이 아니라 일반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성탄찬송,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그 찬송이 얼마나 반갑고 흥겹던지⋯ 그 날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정말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기뻐하고 있을까? 기독교국가 미국에서 '메리 크리스마스'란 연말인사가 사라지고 있답니다. 성탄 인사 대신에 '즐거운 휴일(Happy Holidays)'이나 '새해 복 많이(Season's Greetings)' 등의 인사를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간답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그건 비기독교국가인 우리나라에서나 듣는 연말연시의 인사입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세속적 연말연시의 인사를 나누다니, 왜 그럴까요? 수니파 급진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와의 ‘전쟁’이 확대되면서, 특정 종교의 색채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입니다. 아시아나 중동, 유대계 명절도 있는데, 크리스마스만 유독 강조해 종교 간의 갈등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속셈입니다
미국이 기독교국가됨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청교도들이 세운 미국도 성탄을 예수님이라는 종교가의 출생으로 봅니다. 그러니 성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봐야 성탄이 기쁠 텐데, 천국을 믿어야 성탄이 감사의 날인데 한 종교의 교주 탄일로 보니 굳이 이 날만을 기쁘다고 할 수 없고 특별한 대접을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성탄을 구세주의 탄생으로 보지 않고 선물을 주고받는 날, 상인들에게는 대목 시즌으로 알았으니 무슬림 고객들, 공자의 고객들, 단군자손의 눈치들을 보느라 성탄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가 탄생하시던 날, 들에서 양을 치던 목사들에게 나타난 천사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전해주면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했습니다. 성탄을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한 것입니다. 천사는 왜 유대인들에게 온 백성-온 세상을 위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했을까요? 지금 유대인들은 그들만의 해방자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성경을 흐르는 중요한 물줄기가 인간은 죄인이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죄 이전에 원죄가 있는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죄인이다! 장로교 중심을 이루는 칼빈주의의 교리입니다.
바울은, 온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합니다(롬3:10).
23절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천국에, 하나님께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100% 거룩한 곳입니다! 죄가 1%라도 있거나 흔적이라도 있으면 천국은 어림없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서로가 반대편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靈)이시고 우리는 육(肉)이어서 그런 면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완벽하게 거룩하신 분! 우리는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 양자는 부자지간이 아니라 원수지간입니다. 하나님은 죄는 용납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래서 죄만 보면 하나님의 본성은 심판하고 처리해야 합니다. 죄와 공생-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서로 간에 적대시하고 심판할 대상으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요 축복의 대상입니다. 그런 대상이라도 하나님의 본성은 죄인이라면 인간 아니라 천사라도 공생할 수 없고 아들 아니라 손자라도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고 공생하려면 죄의 문제, 본성까지 타락한 암덩어리 죄성을 뽑아내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생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세상에서는 모두가 죄인이기에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처리할 존재가 없습니다. 인간의 죄의 문제는 사람들에게서 해결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님께서 세상에 성탄하셨어요! 죄없는 하나님의 독생자도 남자와 여자의 결합이라는 과정에서 남자의 정자, 여자의 난자의 결합의 산물이라면 죄에 오염되고 죄인이 됩니다. 그래서 독생자를 마리아라는 동정녀에게서 잉태하시고 출생토록 하신 거예요!
남자를 알지 못하는 동정녀가 아기를 낳는다? 인류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고 그런 사람은 예수님이 유일합니다. 당연히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비상식, 비논리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아세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하려 아들을 보내시는데 사람의 이해를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초자연적 출생이 아니면 죄인의 죄를 씻을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그들의 가르침을 잘 따르면 죄가 없어진다고 합니다. 물론 가르침을 잘 따르면 죄를 덜 짓거나 안 짓겠지요! 깊은 산속에서 수도하고 고행하는 승려들은 죄를 지을 기회도 없고, 죄를 지을 대상도 없기에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죄가 없겠지요. 로마가톨릭에서는 영세만 받으면 그 순간에 죄가 없어진다고 해요! 그러나 수행과 가르침을 통해 윤리적인 죄들은 없어지고 영세를 통해 가톨릭 회원은 될 수 있어도 원죄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일학교 교사가 이런 문제를 어린이들에게 잘 설명하기 위해 방법을 썼습니다. 잉크가 들어있는 잉크병의 겉모양을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반질반질하게 잘 닦은 다음에 마시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마시겠어요? 선생님이, 내가 잉크병을 깨끗하게 닦았다, 그러니 깨끗한 줄 믿고 마셔라! 해도 아이들은 마시지 않습니다. 겉모양만 씻었고 겉만 깨끗할 뿐 속에는 잉크가 있습니다. 잉크병 겉을 씻었다고 잉크병 속까지 깨끗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몇 방울의 물과 세례로 인간의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착하게 살고 선을 행했다고 죄를 씻어낼 수 없습니다. 죄는 우리의 몸 밖이 아니라 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내 행동과 선행의 손이 미치지 않는 내 마음에 깊숙이 박혀있고 에덴동산에서 첫사람으로 모든 인간들에게 전가된 죄들이기에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속수무책이 바로 원죄입니다.
인간의 윤리와 도덕과 종교의 한계가 여기에 있습니다. 종교나 도덕들이 인간의 겉모양의 죄만 씻지 속까지 씻을 수 없고 속내에 있는 원죄를 씻어낼 방법이 없습니다. 천국에서 걸리는 것은 헌법이나 사회법,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자범죄가 아니라 원죄입니다.
우리에게 오장육부가 있는 것처럼 죄가 DNA로 붙어 있으며 그런 부패 상태로 출생하며 하나님 앞에서는 검정연탄처럼 죗덩이 처지입니다. 그러니 검은 연탄을 비누로 씻고 알코올로 닦아봐야 연탄은 연탄일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윤리의 한계, 도덕적인 한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남녀와의 결합을 통해 세상에 출생한 자는 누구도 죄의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런 범주 밖에서 세상으로 들어오셨기에 유일하게 의인입니다. 의인이기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의 문제를 해결할 자격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피를 통해 인간의 죄들을 씻어낼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외에는 우리 죄들을 사할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하신 구세주입니다. 그래서 천사는 육체관계가 없었던 마리아의 임신소식에 갈등하며 괴로워하던 약혼자 요셉에게 말합니다.
20절,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이름을 지어줍니다.
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예수라는 이름의 뜻까지 알려줍니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죄에서의 구원-예수님께서는 근본적인 죄의 문제에서 건져주러 오신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런 가르침을 전해준 도덕이나 종교는 없습니다. 모든 종교, 모든 가르침들은 죄의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종교의 가르침을 따르고 성현들의 도움을 받지만 근본적으로는 내가 내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너무도 지당한 말씀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당사자가 해결해야지요? 그래서 용서가 있고 옥살이를 하고 어떤 분들은 법에 의해 처형되기도 하지요! 이걸 누가 대신 옥살이를 해줄 수도 없고 대신 사형장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지은 죄는 자기가 죄 값을 감당하고 열심히 도(道)를 닦고 선행을 하면서 스스로 자기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지요! 이것이 정당한 죄 값을 치르는 것이고 인간세상의 도리입니다. 누가 내 대신에 죄를 해결해 줍니까?
하나님의 원리는 다릅니다. 죄를 논할 때 근본적인 문제를 다릅니다. 죄라는 것! 그것은 겉모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죄성은 의사들의 수술용 매스가 들어갈 수 없는 영역에 있습니다. 의사들이 오장육부에 들어있는 악성세포들을 도려내도 죄는 도려낼 수 없습니다. 죄는 엑스레이에 찍히지 않는 영역, 마음에 생각에 박혀있기 때문에 그것을 떼어내고 제거하고 태워버릴 수 있는 참된 의사는 구세주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죄를 지었는데⋯ 그가 용서해 준다고 했는데⋯ 그게 스스로에게 용서가 됩니까? 그걸 생각만하면 미안하고 죄송하고 수치스럽고⋯ 죄 값으로 옥살이를 하고 나왔지만 내가 살인한 그 사람, 그 가족들에게 내가 죄 없다, 할 수 있습니까? 법적으로는 죄 값을 치렀지만 그들을 대할 면목이 없고⋯ 창피하고⋯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서 살 수가 없습니다. 이게 죄가 가하는 형벌이요 죄의 대가(代價)입니다. 죄가 없으면 양심이 나를 떳떳하게 하지만 죄가 있으면 나를 가장 힘들게 합니다. 죽어야만 이 양심의 죄 가운데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다가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문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죄의 문제는 사람에 대한 죄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대한 것이며 죽음을 지나 하나님 앞에 설 때의 그 죄들⋯ 하나님은 완벽하게 거룩하신 분이기에 그 거룩하신 심판주 앞에 서게 될 때의 그 죄의 문제⋯ 이걸 다루는 것입니다. 세상의 죄와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그 기준이 다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죄 없다 할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커트라인이 너무 높고 너무 완벽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천국문에서 보시는 것은 죄가 없는 완성품입니다. 누가 죄 없는 완성품이 있나요? 죽음으로 죄가 없어지나요? 죄와 함께 죽은 것이고 죄와 함께 기억됩니다. 그런 인생이 죽어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죄 없다 할 수 있나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래서 종교가 있고 도덕이 있지 않냐고⋯ 종교를 믿어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면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냐고⋯. 세상 도덕으로는 가능한 주장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의 이야기를 말하는 있고 천국 문에서의 일종의 도핑테스트를 말하는 것입니다.
수영스타 박태환씨가 대한수영연맹에서는 도핑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다 해도 더 엄격한 국제수영연맹(FINA)의 도핑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나요? 결국 통과하지 못해서 금지약물인 양성 반응 결과로 18개월간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습니다.
인간세상에서의 도핑테스트를 통과해서 죄가 없다하여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죄의 도핑테스트는 100% 완벽합니다. 그걸 통과할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스스로의 노력과 수행과 고행으로 의인이 될 수 있다고요? 그러면 우리 자신들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구세주인가요? 그건 가당치 않은 일이라고 예레미야는 이런 예로 말합니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그 말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기 구스인은 에디오피아 사람, 곧 흑인입니다. 검은 피부가 원한다고 흰 피부가 될 수 없고 표범의 얼룩점들이 바뀔 수 없는 것처럼 죄악은 변할 수 없는 제2의 천성이 되고 습관이 되어 뿌리를 깊숙이 내렸기에 스스로 겉은 씻지만 속은 건드릴 수 없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나이아가라 폭포가 거꾸로 올라가는 것보다 더 큰 기적입니다. 그런 가능성은 0.0001%도 없는 것처럼 윤리와 선행으로 스스로를 깨끗하게 거룩하게⋯ 그래서 천국 심판대 앞에서의 도핑테스트를 통과하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은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독생자를 동정녀의 몸으로 세상에 들여보내시고 성탄의 구세주로 죄의 문제를 온 몸에 퍼져있는 원죄의 부패한 죄성을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외에는 죄를 사할 방법이 없고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설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침례교목사 로버트 로우리는 찬송합니다.(252장)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를 정케하기는 예수님의 피밖에 없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구세주로 믿고, 기독교는 독선주의라고, 배타주의라는 온 세계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예수 외에는 구원자가 없다, 기독교복음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진리를 사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걸 포기하는 순간 기독교는 복음이 아니라 종교요 도덕이요 윤리로 떨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전도-선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근본적인 원죄-죄성을 위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달리셨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100% 완벽하게 지불했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예수님께서 깨끗하게 청산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예수님을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며”(미 7:9) 우리를 죄없다 하시고 자녀로 받으시며 우리의 하나님되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성탄의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세주가 되시기에 성탄 인사를 하며 기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론
제가 즐겨 사용하는 예화 중에 현길언의 단편 ‘흔적’이 있습니다. 불량배 아들이 잘못하고 들어올 때마다 아버지는 문기둥에 못을 하나씩 박습니다. 몇 년 후, 기둥은 못으로 가득 찼습니다. 술에 취해 귀가하던 아들은 문득 못을 보고 “웬 못이오?” 시비를 겁니다.
“아들아, 이 못 하나 하나가 네 잘못이란다. 네가 잘못하고 돌아올 때 못을 받았다!”
“내가 이렇게 많은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요?”
아버지는 슬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들은 박힌 못을 세어보다 너무 많아 다 셀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이 눈물 흘리며 절망할 때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울지 말아라, 아들아. 앞으로 네가 착한 일을 하렴. 그러면 하나씩 못을 뽑도록 하자!”
“그렇게 한들 이 많은 못들의 흔적은 어떻게 해요?”
아버지는 기쁜 얼굴로 아들의 손을 잡았습니다.
“아들아, 안심하렴! 죄의 흔적은 예수님의 피가 다 없애주실 거야.”
그래요! 이게 예수님께서 해 주신 일입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가 구세주로 세상에 들어오신 날이 성탄입니다. 그래서 온 세상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복음입니다. 이런 귀한 성탄복음을 무슬림 고객들 때문에 공자님 고객들 때문에 없는 둥 지나겠다는 것은 죄에 대해 무관심이고 아니면 스스로의 힘으로 죄를 해결하겠다는 무대뽀입니다.
우리만이라도 성탄복음을 잘 간직해서 성탄절이 내 생일보다 자녀들의 생일보다 더 행복한 날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성탄에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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