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곡신자입니까?
마태복음 13장 24~30절
서론
보름 전에(15일) <위험사회와 교회의 역할>을 주제로 한 포럼이 열렸습니다. 사회 곳곳에서 발생하는 위기에 대응해 한국교회가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 논의하자는 취지에서 열린 포럼입니다. 이 날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한국교회의 책임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국교회의 근본적 위기는 교인 수나 예산 감소가 아니라 ‘권위 상실’에 있다⋯ 한국교회가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 우선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정답입니다. 한국교회가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권위 상실이 문제입니다. 목사들의 칼부림은 기억조차 싫은 악몽이고 목사들의 몰카 사건이나 성추행 사건⋯ 등으로 권위가 실추되고 신앙인푸라를 형성하는 교인들은 너무 이기적이고 세속화되어 신뢰를 얻지 못합니다. 교회가 거룩한 영적 울림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 자신들이 영적 울림이 없는데
어떻게 거룩한 울림을 세상에 전하겠어요? 영적울림이 뭐겠어요? 감동이지요! 교회가 감동이 되고 교인들이 감동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똑똑은 해도 감동이 되지 못하니 세상이 감동을 받겠어요?
그만큼 사람들이 교회를 인생의 동반자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 교회 안에 가라지가 너무 많다!
교회라는 뜻은, 헬라어의 에클레시아, ‘밖으로 불러 모으다’, 세상에서 하나님 안으로 불러 모아진 성별(聖別)된 자들의 모임, 거룩한 하나님에 소속된 성도들, 예수님을 주(主)로 고백하고 따르는 신자들의 고백공동체, 예배공동체, 성찬공동체, 모임입니다.
신약성경을 헬라어로 쓸 때 예배공동체 모임을 어떤 단어로 기술할까? 그러다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보고 아, 우리 공동체는 에클레시아다, 라고 했어요. 에클레시아는 헬라의 어떤 도시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논의하고 그 문제에 대해 투표하거나 행동방침을 정하기 위한 모임 단체였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의회나 구의회 성격입니다.
처음 에클레시아라는 단어에는 종교적 색채가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구의회로 모여 공무원을 임명하고 전쟁을 수행하고 건물을 짓거나 보수하고⋯ 그 지역에서 사용되는 재정적인 문제를 논의하였습니다. 이렇게 의견이 모아지면 그걸 해당지역으로 가서 알렸고 실행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모임을 보았습니다. 예배공동체 모임을 나는 내 교회 에클레시아를 세운다, 라고 에클레시아-의회라는 단어를 교회라는 단어로 정한 것입니다.
교회가 뭐냐? 다양한 인생사를 갖고 와서 예배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아뢰고 설교 듣고 서로의 간증을 통해 해법을 찾습니다. 이걸 갖고 가정으로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들은 말씀대로 살면서 문제를 풀어가도록 하는 모임이 교회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얼마나 좋은 모임입니까? 인생의 다양한 문제와 죽음너머의 해법을 주니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 에클레시아입니까? 그런데 교회가 외면당하는 것은 교회가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교회 안에 비교회적 요소들이 들어와 있고 직분과 사역에만 치중하다보니 교회 기능이 많이 상실된 것입니다. 자질이 없는 의원들도 있으니 에클레시아에서 멀어진 거지요!
교회는 두 종류가 있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교회와 눈에 보이는 유형교회⋯. 무형교회는 하나로 존재하는 세계교회입니다. 여기에는 장로교도 감리교도 성결교도 없어요! 목사, 장로⋯ 이런 저런 직분도 없어요!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만 있어요! 100% 구원 받은 교인들로 구성원을 이룹니다. 가짜 짝퉁교인들은 구성원이 될 수 없습니다.
이에 비해 또 하나의 교회가 눈에 보이는 유형교회입니다. 유형교회는 교인들이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는 일정한 장소, 모임입니다. 눈에 보이는 예배이기에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참석합니다. 전도대상 구원대상을 초대하다보니⋯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도 구성원이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유형교회에는 알곡과 가라지신자들이 섞이게 됩니다. 3장 12절에는 알곡과 쭉정이로, 13장에는 곡식과 가라지로 나옵니다. 교회 안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있다는 거예요! 여기에 의도적으로 사단이 가라지 이단들을 심어놓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정체가 모호한 사이비들입니다.
바로 이 가라지 때문에 교회는 교회답지 못하고 거룩한 영적 울림들이 약해지고 이상한 종교집단이 됩니다. 삯군목자들로 에클레시아가 제 역할을 못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알곡교회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만 보고 교회라는 에클레시아를, 저런 의회, 저런 구회의가 왜 필요한가, 그 주인을, 그 종들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2. 알곡 안에 가라지가 있다.
그러면 우리는 알곡신자입니까? 요즘 알곡신자라면 신천지로 오해받습니다. 신천지는 자기들은 알곡이고 정통교회 신자를 가라지라 합니다. 일반교회를 추수밭이라 부르고⋯ 일반교회 신자를 가라지라, 전도를 추수한다, 전도해온 신자를 알곡이라 부릅니다. 가라지들이 알곡을 가라지라 하니, 어이도 없고 요즘 이단에게 정통교회가 핍박을 받는 그야말로 말세입니다.
알곡은 쭉정이나 잡것이 섞이지 아니한 곡식 낟알입니다. 좋은 알곡은 알맹이가 있지만 가라지는 껍질만 있지 알맹이가 없습니다. 그러니 양식이 될 수 없습니다.
농경사회에서는 보리나 밀을 타작할 때는 도리깨로 털어서 바람에 날렸습니다. 가라지는 속이 없으니까 바람에 날아가고 알곡은 속이 단단하니까 그 무게로 아래로 떨어집니다.
우리가 이런 알곡신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보고 당하고⋯ 텔레비전이 한국교회의 좋은 모습은 보여주지 않고 작심해서 비난하고 공격해도 그런 선동의 바람, 공격의 바람에 믿음이 날아가 버리는 가라지신자가 아니라 굳건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곳간에 들어가는 알곡신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생명의 영생의 씨앗을 심어주시고 늘빛교회라는 좋은 밭에 심어주셨고 좋은 지도자들과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신앙생활하기에 알곡신자가 될 줄 믿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만 가라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알곡신자 속에 가라지 요소가 있습니다. 가라지는 거친 땅이나 밀밭에서 자라는 ‘독보리’입니다. 껍질만 있고 속에 알맹이가 없어요. 알곡처럼 보였지만 가짜 밀입니다. 가짜인데 그럴듯해 보이는 짝퉁입니다. 그러니 쉽게 분별이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단이 성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교회 안에 가라지들이 있다고 합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단의 아들입니다.
38절,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이요⋯.
그러니까 악한 사단에 의해 세상에 흩뿌려진 자들입니다. 멸망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자들로 어둠의 특성에 맞게 사악한 속성을 지닌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가라지로 만들려는 강한 근성이 있습니다.
41절, ⋯불법을 행하는 자들⋯.
문자적으로 '법을 무시하는 자들'로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들을 지키지 않는 자들입니다(7:23). 사단의 부류 가라지 신자들입니다.
사단들이 교회 안에⋯ 세상에 은밀하게 뿌리는 가라지, 쭉정이의 특성은⋯
-위장성(僞裝性).
곡식과 가라지는 초기에는 밀이나 보리와 흡사하여 이삭이 패기까지는 분별이 어렵습니다. 그때까지는 보리처럼 밀처럼 위장합니다!
-잠복성(潛伏性).
이삭이 나오기까지 곡식처럼 생장 과정을 보이는데 일단 이삭이 패면서부터 알곡과 차이를 드러냅니다. 평소에는 잠복했다가 결정적 순간에 해를 끼칩니다.
-해독성(害毒性).
가라지는 알곡만 아니라 인체에도 피해를 안깁니다. 중동비장의 가라지는 잘못해서 먹었을 경우 급한 설사와 구토⋯ 등의 증상이 있으며, 심하면 목숨을 잃게 합니다.
이런 가라지가 많을수록 한 해 농사는 망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거룩한 에클레시아에 왜 가리지 의원들이 있나요? 왜 가라지들이 좋은 씨와 함께 자랄까요? 25절, 원수들이 알곡씨앗 위에 덧뿌리고 갔더니⋯ 밭주인이 뿌린 씨 알곡에 원수들이 가라지를 덧뿌린 것입니다.
모세 율법에는(레 19:19, 신 22:9) 다른 종류의 씨앗을 섞어 뿌리지 말라는 규정이 있습니다. 어느 한 열매조차도 올바로 수확할 수 없기에 생겨난 조항이며, 여호와신앙의 순수성과 비타협성을 교훈하는 계명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신앙과 혈통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가나안 이방종교를 가진 원주민들과의 혼혈 결혼을 철저히 배격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곡식의 씨앗 사이에 가라지를 덧뿌려 놓은 원수의 행위는 도덕적으로나 율법적으로 모두 부정한 행위입니다.
원수들은 왜 이런 부정한 행위를 비밀리에 저질렀을까요? 농사를 망치려는 것이지요. 한 해 농사가 망하면 재산이 없고 영향력이 없고 성공 못합니다. 원수는 상대방이 잘 되는 꼴을 보지 못하기에 자기에게 유익이 없으면서도 공연히 심술을 부립니다.
이런 요소들이 알곡 신자 우리들에게도 있어요! 알곡인데 가라지 속성이 있어 가라지 노릇을 하는 거예요! 이걸 찾아내고 뽑아내고 제대로 관리해야 알곡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가라지 노릇만 하다가는 알곡이 됩니다. 당연이 인생 소출 천국 창고의 소출이 없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은혜로 알곡이 된다.
원수들이 가라지를 뿌린 데에는 더 큰 목적이 있습니다. 상대방 명예에 손상을 입히고 수치를 안겨주려는 불순한 의도입니다. 물론 물질적인 손상도 있어요! 풍작 되지 못하면 그만큼 역할도 축소되기에 가라지를 뿌렸겠지요. 그보다는 유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질이나 재산이 아니라 명예입니다. 명예란 당시 사회에서 가장 가치 있는 개념으로 자기 명예에 최선을 다합니다. 명예는 스스로 구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주변이 인정해야만 얻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명예를 추구하는 행위에 열심을 냅니다. 바리새인들이 공공장소에서 기도생활을 하는 것은 종교적인 명예 때문입니다.
본문도 그런 명예를 위해 밀이 잘 자라고 가라지가 없도록 밭을 돌보고 가꿉니다. 잘 가꾸어진 곡식밭은 동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고 ‘좋은 농부’라는 평가를 얻지요. 농사를 잘 짓는다는 칭찬을 사람들에게 들을 때 돈을 버는 것보다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인식했습니다.
이렇게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고 그 명예를 얻으러 최고의 씨앗을 고르고 밭을 잘 갈고 종들을 시켜 돌보게 했는데 어느 날부터 가라지가 보입니다. 원수가 몰래 뿌리고 간 것입니다. 처음에는 몰랐어요! 가라지는 1년생 잡초이기에 초기에는 보리와 밀과 잘 구별되지 않지만 어느 정도 자라서 이삭이 피면 키도 웃자라고 색깔도 짙어져서 식별이 쉬워집니다(26절). 그랬더니 종들이 너무 놀라기도 하고 당황도 하고 죄송하기도 해서 주인에게 묻는 것이지요!
27절,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은 대번에 알아차립니다. 28절, 원수들의 짓이다!
종들이, “가서 뽑겠습니다! 가라지 때문에 주인님의 명예에 손상이 옵니다.”
그러자, 29절,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저는 이 구절에서 은혜를 받습니다. 주인과 종들이 가라지의 위장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들 때문에 주인의 명예가 손상되고 종들은 열심히 수고했음에도 게으른 사람으로 오해받고 가라지를 가려내지 못한다는 비웃음을 받습니다. 그래서 이제라도 가라지를 뽑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냥 두라고 합니다. 이유는?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가라지는 보통 곡식보다 뿌리가 더 강하기 때문에 가라지를 뽑다보면 어리고 약한 곡식이 함께 뽑힙니다. 그래서 곡식 하나하나에 대한 애정과 염려 때문에 가라지를 뽑지 못하게 합니다. 주인의 세심한 배려 때문에 어린 곡식들은 잘 자라서 알곡이 됩니다. 곡식에 대한 주인의 관심이 가라지에 대한 종들의 열정보다 우선되었기에 알차고 맛있는 알곡들이 생산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과의 차이점이며 부패와 타락에서도 교회가 망하지 않고 구원 사명을 감당하는 비결입니다. 바다에 많은 쓰레기들 흘러와도 3% 소금이 바다의 오염을 막아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성이 내려와 있습니다. 그러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적인 무형교회는 완벽하게 거룩한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가라지라고는 단 한 개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로, 알곡신자들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무형교회 교인들이 모여 예배하는 유형교회 에클레시아는 거룩한 공동체이지만 알곡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난 신자들로부터 거듭나지 못한 신자들로 구성됩니다. 거듭난 신자들도 생활이 온전히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온전하지 못한 어느 부분이 가라지가 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가라지들로 종종 거룩성들이 훼손됩니다. 시대마다 가라지의 수효나 모양들이 다릅니다. 요즘 같은 교회는 더더욱 한국교회에 가라지들이 무성합니다. 누구누구를 가라지로 지칭하기보다는 우리 안에 가라지적인 요소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라지가 보인다고 가라지교회고 가라지신자냐? 아닙니다! 단원구의 한 초등학교에는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30%, 다문화권 아이들이 70%입니다. 우리노회 00교회도 그런 구성 비율입니다. 그 교회가 조선족교회인가? 한국교회입니다. 그 초등학교는 한국 초등학교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 가라지가 있음에도 교회는 하나님의 알곡신자들이요 알곡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이라도 100% 완벽한 알곡교회, 100% 깨끗한 유형교회를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도 뽑힙니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가라지 속성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의 악한 기질들을 너무 억지로 빼어내다 우리의 좋은 성품들이 손상될까봐 하나님께서는 우리 스스로 가라지를 제거하기를 기대하며 기다려 주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가라지가 될 소지들이 많은 우리가 알곡신자로 이만큼이라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 눈에 뭔가 거슬린다고 여기 종들처럼 28절 하반절, 뽑아버릴까요? 성급하게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항상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가만 두어라~ 그러다가 오히려 너희들이 다칠까 걱정되니 너희들이 뽑으려 하지 말고 때가 되면 내가 뽑을 테니 가만 두고 기다려라! 그런 음성에 늘 순종하는 신자가 알곡신자요 교회가 알곡교회입니다. 너무 쉽게 눈에 보이는 에클레시아교회를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
우리 동네 출신 시의회의원이 살인을 사주하여 무기징역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서울시는 나쁜 의회-나쁜 에크레시아입니까? 한 두 사람의 시의회의원이 부패하고 비리를 저질렀다고 서울시의회 에클레시아를 없애야 합니까? 그러면 얼마나 서울시가 강서구가 손해입니까? 안 좋은 의원이 있어도 그때그때 제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다 다른 의원들도 다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다립니다. 좋은 의원을 보고 계속 성숙하도록 서울시 에클레시아를 그냥 두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래요! 가라지 같은 교회가 있어도 하나님은 놔둡니다. 그 안에는 알곡신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가라지 같은 요소가 많아도 하나님께서는 기다립니다. 내 안에 알곡요소들이 더 많이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다시 한 번 더 알고 11월 마지막 주일에 알곡신자, 알곡교회가 되기 위해 더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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