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아기의 이름(2)-임마누엘
마태복음 1장 18~23절
서론
<기네스북>에 의하면, 크리스마스카드를 한 해 동안 가장 많이 보낸 사람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워너 에어하드입니다. 1년에 성탄카드를 62,824명에 보냈습니다. 카드 1장에 1000원을 잡으면 6천 3백만원입니다. 굉장하지요? 거기다 시간과 노력은 말할 것 없습니다. 저도 30주년 때 감사편지를 260통 쓰느라 참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워너 에어하드가 왜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을까요? 워너에게 성탄은 ‘온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빅뉴스(Bignews), 그레이트뉴스(greatnews), 굿뉴스(goodnews), 구세주의 탄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죄에서 구원해 주실 이름, 죄인된 인류에게 구세주가 필요치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력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에 나를 위해 구세주가 탄생했다! 라는 소식은 ‘온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라는 이름은 굿뉴스입니다.
오늘은, 성탄 아기의 두 번째 이름입니다. 두 번째 이름도 천사가 알려줍니다.
23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걸 누가 알려주었다고요?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알려주셨어요!(사7:14)
아기의 이름 임마누엘은? 23절 하반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임'은 '함께'(with), ‘마누’는 '우리와'(us), ‘엘’은 '하나님'(God)⋯ 그래서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입니다. 성탄의 아기는 이름을 통해 그가 누구인가를 보여줍니다.
성탄의 아기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에게는 익숙하지만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시다, 이방인은 물론 오랫동안 메시아를 기다려왔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가당치 않는 선포였습니다.
그러면 임마누엘은 이 아기가 어떤 아기요, 성탄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라는 것입니까?
1. 성탄 아기 임마누엘은, 눈에 들어온 하나님이시다!
인간역사가 시작되면서 지성과 영성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고 눈으로 보기를 원했습니다. 고대인들은 하나님-하늘님의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다산(多産)을 원하는 이들은 유방이 큰 여인으로 하늘님을 형상화했고 전능한 하늘님을 원하는 이들은 황소… 등의 강한 동물로 형상화했습니다. 가나안주민들은 풍요와 다산(多産)을 위해 암소나 송아지의 하늘님 형상-신의 형상을 만들어 눈에 보이는 하늘님 형상에 복을 추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게 부러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보이는 형상, 인간 시야에 들어오는 물질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이후 광야생활을 시작하면서 금송아지 하나님 형상을 만들어 예배축제를 벌였습니다. 금송아지 형상이 하나님 심벌로 생각하니 흥분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작 예배의 대상이던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시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행태에 분노하시고 신성 인격을 모독한 그들을 심판해서 여럿이 죽었습니다. 그러면서 십계명을 통해 어떤 형상으로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라, 엄명하셨습니다. 그랬지만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결과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은 형상이 없습니다. 형상이 없는 자신을 어떤 형상으로 만들어 숭배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신데 금송아지 형상으로 물질화했습니다. 이건 하나님을 왜곡하는 일이요, 인격 모욕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형상을 만들어놓고 숭배할 때마다 그들의 진정성과 거룩성과 열정에 관계없이 하나님께서는 예배받기를 거절했으며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던 하나님께서는 예배만 받던 자리에서 성탄아기와 함께 인간 구원을 위해 세상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인간 역사 안으로, 인간 시야(視野)의 가시권으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탄 아기를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 보기를 원했습니다. 성탄 아기는 동정녀 탄생이라는 비화에서부터 부활이라는 기적을 통해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성탄 아기가 점점 성장하면서, 하나님의 사랑, 공의, 전지전능성⋯을 보여주기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아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구나⋯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저런 것이구나, 하나님의 계획은 바로 이런 것인구나⋯’
성탄 아기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보여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주세요~ 했더니 예수님께서 "나를 보는 것이 아버지를 보는 것이거늘 어찌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이라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신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의 눈에 하나님을 보여준 성탄!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 성탄! 하나님의 실재를 보여준 성탄! 이런 성탄만이 하나님께는 영광! 사람들에게 평화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2. 성탄 아기 임마누엘은, 사람들과 함께 살겠다고 오신 하나님이시다!
임마누엘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으로 데려오셨습니다. 하나님도 에덴동산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창 3: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 아담부부와 함께 사셨던 임마누엘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형상을 따로 만들 필요도 없고 우상을 세울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을 느꼈습니다. 그만큼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영(靈)의 존재, 하나님을 인지할 감지능력, 영적 안테나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 따먹고 난 후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피해 나무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늘에 계시기만 한 하나님이라면 왜 나무 아래에 숨겠어요?
아담부부는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서 에덴동산에서 추방됩니다. 단지 장소의 이동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영성이 제거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인간은 단지 육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존재하는 영역이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령한 세계에서 살고 인간은 눈에 보이는 인간세상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 아담의 아들 셋이 아들을 낳고 이름을 에노스라 짓습니다. ‘에노스’는, ‘사람’(man), ‘인류’(mankind)란 뜻으로 그 의미는 ‘아담’과 동의어입니다. 사람의 한계성, 병들고 늙고 고생하다 마침내 죽게 되는 인간의 연약함을 자인(自認)하는 이름입니다. 아담이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선악과를 따먹었다가 이 사단이 났습니다. 그러니 호리라도 하나님이 될 생각은 꿈도 꾸지 말고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하면서 그 분을 잘 섬김으로 다시 에덴동산으로의 복귀를 희망했습니다. 그들의 에덴 복귀 갈망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창 4:26,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나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정확한 뜻은 '이름을 불러 그에게 말을 걸다'. 셋 시대에 바른 신지식(新知識)을 소유한 자들이 자신들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고백하며 기도와 찬양, 감사와 경배가 있는 공적예배를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이 드리는 예배가 시시했으면 하늘에서 그냥 보시며 받으시면 되는 것이고 어쩌다 한번씩 드리면 어쩌다 한번씩 사람들에게 내려오면 됩니다. 그런데 셋과 에노스의 계보들은 수시로 예배드리고 예배를 정기화하면서 계속 말을 거는 것입니다. 찬양으로 말을 걸고 기도로 말을 걸고⋯ 희생제사로 말을 겁니다.
‘우리의 죄를 사해달라⋯ 우리들에게 노여움을 풀고 우리에게 에덴동산으로의 복귀를 허락해 달라⋯ 이제는 노여움을 거두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게 해달라⋯.’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에노스의 후손들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습니다. 에노스의 자손들도 점점 세속화되면서 죄를 짓고 다시 범죄의 길로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창세기 6장 3절,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아예 사람들에게서 떠났고 대홍수가 터져 인간세상이 멸망 받게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원수지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사람들은 한시적으로 왕, 제사장, 선지자들입니다. 그들과 함께 하는 것보다는 그들 위에 거하였고 그들의 사역에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다 그들이 잘못하면 그들을 버렸고 떠나갔습니다. 구약에는 이렇게 간헐적으로 임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때가 되매 성탄절에 하나님이 아기로 오셨고 그 이름이 임마누엘입니다. 그 뜻은 이후에는 항상 사람들과 함께 하겠다! 예수의 이름을 믿고 예수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하는 교회와 함께,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제자들과 작별하면서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되심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성탄의 아기가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임마누엘 하나님과의 동행은 불편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도 마라! 저것도 마라! 이것도 해라! 저것도 해라!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보다는 저 위에 계신 하나님~ 우리가 아쉬울 때만 찾아오시는 하나님! 내가 기도를 드릴 때만 내려다보시고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 스페어타이어와 같은 하나님⋯ 그런 하나님을 기대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건 아니야, 나는 너는 너와 함께 있을 거야. 그래서 내 이름이 임마누엘이잖아?’
우리가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믿어야 점점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으로 상향평준화됩니다. 하나님은 함께 하시면서 최고의 사람들로 만들어 주려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죄를 씻겨놓으시면서 평생을 우리를 다듬어주고 일류로 만들어 냅니다.
우리의 하나님되심을 부끄러워하지 않기에 최고의 하나님께서 최선의 자녀로 만들어 냅니다. 그 일을 매우 기뻐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점점 성화됩니다. 단번에는 안 되지만 세상 끝날때까지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결국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성화 목표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오셨기에 가능한 사건이자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3. 성탄 아기 임마누엘은, 사람들의 필요를 공급하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에는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해 수도 없이 나옵니다. 방주 속에서 노아의 일곱 가족은 377일을 살았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밖에는 천지대변동이 일어났습니다. 모두 죽고 물위에는 시체들만 떠 있습니다. 방주 속은 무섭고 지루하고 막연했습니다. 살아서 세상의 멸망을 목격하는 입장은 어떻겠어요? 대홍수 사건 중에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창 8:1)
‘권념’은 기억하사, 돌보사, 보호하사, 새기다, 입니다. 대홍수 일으키고 상황을 살피느라 까맣게 잊어버렸다가 어느 날 문득, 아~ 노아네 가족이 방주에서 어떻게 지내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1년이 넘는 시간에도 마음에 새기고 보살피신 임마누엘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을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너무도 긴 세월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어버리셨나? 언약이 취소되었나? 아니지요! 여기에도 임마누엘의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출 2:25)
여기서의 권념은 '자세히 살피시고 돌아보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침묵 속에 계셨으나 노예 신분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숨, 눈물, 상처를 일일이 기억하셨으며 그들을 구원하실 계획을 세워놓고 계셨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 40년 세월은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입니다. 먹이시고 입히시고 보호하시고 앞서가시며 길을 찾으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입니다. 그럼에도 그 좋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놔두고 왜 금송아지 형상을 하나님으로 대체합니까? 성육신으로 그들에게 오신 하나님이 아니시기에 저들은 힘들 때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가나안에서 원주민들에게 얻어터질 때마다 하나님이 계시면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생기나, 의문을 품었고 섭섭했고⋯ 그래서 눈에 보이는 우상에 중독된 것입니다. 성육신의 임마누엘이 없어서⋯.
그에 비하면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는 얼마나 좋은 조건에서 믿음생활을 합니까? 예수님의 일생과 구속사역, 성령의 강림, 교회라는 고백공동체, 완성된 성경⋯ 많은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임마누엘이 되심을 압니다. 성탄아기로 오신 후에 내 죄를 씻어주시는 구세주 예수가 되었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며 24시간 밀착 보호하시며 공급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선택이었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우리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안요한 목사님, 시각장애인입니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는 책과 영화의 모델로 유명한 분입니다. 그는 목사의 아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시름시름 앓다 실명이 되었고 아내와 딸까지 그를 떠납니다. 실명 중에서 그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 이청준이 작품을 이장호 감독이 영화로 찍었고 그 동생 이영호가 주연을 맡았습니다. 이 감독의 동생도 실명 단계입니다. 동생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이장호 감독이 영화화한 것입니다. 영화의 주제가는 이런 것입니다.
“그는 나를 만졌네 내 영혼을 나는 그를 느꼈네 그 숨결을⋯ 그는 나를 버리지 아니하고 나는 그를 떠나지 아니하리”
"그의 사랑 있으면 나 외롭지 않아 그의 사랑 안에서 나 두렵지 않네 그는 나를 버리지 아니하며 그는 나를 떠나지 아니하리…"
안요한 목사로 출연한 이영호는 실제적인 삶에서 컴퓨터 화면을 최대한 확대하여 5자 내외의 글자를 놓고, 눈이 빠질 듯한 고통 속에서 자기 이야기를 담은 책 한권을 씁니다.
<보이지 않는 삶이 더욱 소중하다>
육신의 눈으로는 보지 않더니 육신의 눈을 감으니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되고 그 분의 돌봄을 체험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신앙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고백입니다. 우리 인생에 이런 고백들이 나와야 성탄아기의 탄생을 제대로 맞이하고 축하하는 것입니다.
결론
야반도주로 정처 없는 길을 가던 야곱, 벧엘에서 외로움과 두려움으로 돌을 베고 잠을 자다가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야곱이 잠이 깨어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임마누엘로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했도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기 전,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보장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힘들고 어려웠던 2015년, 성탄 아기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은 임마누엘의 하나님!
“많이 힘들지? 내가 함께 해줄게! 앞으로도 힘들 거야~ 그래도 내가 있잖아? 힘을 내!”
우리가 임마누엘의 하나님과 함께 2015년을 마감하고 임마누엘의 하나님과 2016년에 도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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