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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비(非)은혜를 개혁하라!(에스겔 47:1, 2)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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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非)은혜를 개혁하라!

에스겔 47장 1, 2절

서론

오늘 종교개혁 498주년 기념주일입니다. 2년 후 2017년에는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500주년을 맞습니다. 종교개혁은 로마교황청의 부패와 타락, 돈으로 죄를 사하고 구원까지 얻을 수 있다며 면죄부를 판매하던 교황청에 반발해서 마르틴 루터를 중심으로 일어난 개혁운동입니다. 물론 루터 이전의 개혁가들이 있었지만 운동으로 세력화할 만큼 응집력, 폭발력이 약했습니다.

 

그러다가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수도사이자 신학대학 교수였던 마르티 루터가 96개조항의 대자보를 내걸며 교황청의 쇄신을 요구했고 교황청의 부당한 간섭과 횡포에 불만이 팽배했던 유럽 제후(諸侯)들이 동조하면서 개혁요구는 운동이 되고 혁명이 된 것입니다.  

 

종교 개혁가들이 일으킨 종교개혁운동은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제도 개혁:교황청의 부패와 타락을 쇄신하라!

 

-교리 개혁:돈이나 행위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이행득의를 버리라!

 

-종교 개혁:교황청이 세상 정치를 좌지우지 하지 말라! 종교와 정치의 불간섭을 선언하라! 

 

이런 개혁을 요구하며 시작된 종교개혁은 500년을 코앞에 둔 지금은 아쉽게도 완성품을 내놓지 못하고 절반의 완성! 미완의 완성! 오히려 개혁의 주체였던 개혁교회가 개혁의 대상이 되는 도루묵의 원점, 1517년으로 돌아가 버린 느낌입니다.

 

미국의 월간 화보잡지 <라이프>는 지난 1천년~2천년을(밀레니엄)을 만들어 낸 100대 사건으로 1위는 1455년 독일 대장장이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성경을 인쇄한 일, 2위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1492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1517년)을 꼽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이 지난 1천년 동안 인류역사에 미친 공헌이 3위에 선정된 것을 보면 종교개혁이 종교계,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세계사에 얼마나 위대한 운동이었는가?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개혁의 대상이던 로마가톨릭은 갈수록 더 융성하고 개혁의 주체였던 개혁주의는 오히려 개혁의 대상이 되는 현실은 어디에서 꼬이고 말았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종교 개혁가들이 개혁운동을 기존 제도나 전통양식을 타파하는 투쟁으로만 몰아갔기 때문입니다. 사실 종교개혁은 혁명보다는 환원운동입니다. 환원(還元)은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복음으로 돌아가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성경과 복음은 무엇을 가르치고 초대교회는 무엇을 전했습니까? 한 마디로 은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죄인에게 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 이방인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 이 은혜와 사랑을 나누고자 전도했던 것이 초대기독교입니다. 은혜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중세기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고 제도를 만들고 직분을 만들었습니다. 성직을 돈으로 매매했고 역대교황들은 유럽교회들의 표를 매수해서 교황자리에 올랐습니다. 구원은 돈과 행위에 비례했습니다. 돈을 많이 내면 조상들이 구원 받고 성지순례나 성당을 건축해서 봉헌하면 집안대대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라지고 의무감이나 행위만 요구되었습니다. 이렇게 은혜가 사라져버린 중세교회에 하나님의 은혜 저수지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에 흘러 보내자고 막힌 곳을 뚫으려는 심정으로 일어난 것이 종교개혁운동입니다.  

 

그럼에도 개혁운동 발발 500주년을 눈앞에 두고도 왜 완성되지 못하는가, 막힌 곳만 뚫으려고 망치를 휘두르다보니 정작 본인들도 은혜에서 멀어져 버린 것이지요! 망치를 휘두르는 사람들이 눈이 독으로 올라서 은혜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같은 부류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와는 사상이 다른 니체, 그가 개혁에 대해 그런 일침을 합니다.

“괴물과 싸우다가 괴물이 되어간다!”  

아버지를 미워하면서 아버지를 닮아버리고 독하게 시집살이 시키는 시어머니 미워하면서 시어머니를 닮아가는 모양새를 꼬집는 말입니다.

 

교회의 분쟁과 싸움이 시작할 때는 옭고 그름이 있습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르고⋯ 선이 분명히 그어지는데 서로 싸우다보면 같은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싸우면서 나쁜 것만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은혜를 끝까지 견지하는 이는 살아남고 은혜를 포기하는 이는 아무리 옳다는 명분을 갖고 있다 해도 더 나쁘게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한국교회는 은혜가 없는 사람들이 교회가 잘못되었다고 부정하고 비판하고 개혁하려고 달려드니 그런 이들로 교회는 더욱 더 싸우는 집단! 이기심으로 뭉친 종교집단! 그래서 개혁의 대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비(非)은혜는 항상 개혁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예루살렘이 망하고 성전이 사라져 버린 상황에서 바벨론에서 포로신세가 되어 살아가던 에스겔 선지자가 보았던 환상 성전입니다. 말은 선지자지만 원래 제사장 집안이고 여차하면 제사장 일을 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전이 없으니 실업자 제사장이 되고 만 거예요!

 

얼마나 갑갑하겠어요? 그때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찾아오셔서 진로를 정해줍니다. 바로 선지자 사역이고 우리가 에스겔을 제사장이 아니라 선지자로 부르게 된 이유입니다.

 

제사장과 선지자 사역은 다릅니다. 제사장은 백성을 위(爲)하고 선지자는 백성을 책(責)합니다. 제사장은 활동공간이 상당히 안정적입니다. 제사장에게 나오는 백성들은 죄사함과 축복을 기대하기에 철저히 순종하고 복종합니다. 선지자는 백성들을 책망하고 싸워야 합니다. 진실한 백성들에게는 존경을 받지만 대부분의 백성들에게는 자기들을 공격하기에 인기가 없습니다. 그러니 에스겔은 세상 말로 팔자에 없는 선지사역을 하면서 힘들고 지친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하나님께서 환상으로 에스겔을 예루살렘으로 이동시키고 환상으로 새롭게 조성된 성전을 보여주십니다. 그가 기억하는 예루살렘 성전은 황폐하고 우상숭배로 가득하던 성전입니다. 제사장들의 죄악으로 하나님께서 떠나버리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가고 비(非)은혜만이 가득했던 성전입니다. 그런데 환상의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1절,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2절, “⋯물이 그 오른쪽에서 스며 나오더라”

 

단순하게 물이 배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세차게 솟구쳐 나오는 것을 묘사하는 말로 1절의 '흘러내리더라'와 비교해볼 때 물의 양(量)이 성전 안에 상당하게 불어 있다가 문 틈새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 물이 얼마나 쏟아지는지 3절, 천 척(尺)을⋯ 이건 500m입니다. 발목에⋯ 천 척(尺)씩 측량하니

 

4절, 무릎⋯ 허리⋯

5절에는 물이 가득하여 헤엄 칠 강이 됩니다. 성전에서 나온 물이 큰 강을 이루고

 

6절, 강(江) 좌우편으로 나무들이 자라고

강물은 8절, 멀리 아라바로 흘러가면서 바다와 합쳐지고

 

9절에는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로 고기가 심히 많아지는 놀라운 환상을 보았습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가 없는 성전을 무너지고 은혜의 물이 쏟아지면서 나무가 살고 생물들이 떼를 이루었습니다. 은혜의 물이 나오니 살아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환상을 보여주셨나요? 성전은 은혜로만 산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전제도가 훌륭하고 일급제사장들이 있고 모양새들이 깔끔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말라버리면 성전은 아무 역사도 일으킬 수 없는 건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난 세기의 교회들이 이걸 놓친 것입니다. 중세교회, 교황청은 은혜의 요소들을 교황청의 권위를 위해, 베드로대성당의 건축을 위해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군림했고 교황청 안에 온갖 부패와 비리로 타락한 종교가 말았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나올 수 없지요! 그래서 종교개혁가들은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로 돌아가자고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도 종교개혁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개혁을 부르짖는 분들을 보면 교회 안의 죄들을 공격하는 선에서 끝납니다. 교회건물이 너무 크다, 헌금을 강조한다⋯ 교회와 교단의 부패와 타락, 세속화⋯ 대형교회화, 목회자들의 권위의식 내지는 귀족화⋯ 교회의 제도⋯ 등을 개혁의 대상으로 삼아 비판운동을 벌입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개혁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개혁하려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죄에 대한 개혁으로만 완성품 교회를 만들 수 없습니다.

 

교회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어찌 죄가 없겠어요? 사람들이 만들어낸 시스템에 죄가 없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차피 우리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도 죄인이고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지금도 신분은 의인이지만 행동은 죄인입니다. 이런 죄들은 성화되면서 엷어지겠지만 죽을 때까지 죄의 흔적이 있습니다. 이런 죄들을 마냥 공격하면 자기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들을 공격하는, 위선자 개혁입니다. 위선은 드러난 죄보다 더 교묘하고 음흉한 죄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개혁해야 하는가? 교회 안의 죄가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하면서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의(義), 자기의(義)가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나만 옳고 남들은 틀리다는, 내 방식은 옳고 남의 방식은 틀리다는⋯ 이런 자기 의(義)로움들, 고정관념이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죄의 문제는 해결해 놓고 정작 나만 의롭다는 교만 바이러스에 노출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 대상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다시 교회 안에 스며야 합니다.

 

에스겔의 선지사역은 책망이고 지적입니다. 그걸로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만 정당하고 남은 틀렸다는 자기 의(義)에 빠지고 맙니다. 이사야가 그런 경우입니다. 그가 선지자로 나설 때에 백성들의 죄에 대해 6회나 화있을진저⋯ 외쳤습니다. 그러다가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뵙게 되었을 때 이제는 자기를 향하여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도 같은 사람인데 하나님인척 사정없이 남들을 정죄했다는 통렬한 자기 고백을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그것이 바로 은혜의 사상이고,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사 49:8) 53장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엑기스인 우리 죄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는 메시아사상을 예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교회는 죄 때문에 아파하는 것만 아니라 은혜가 없음을 아파해야 합니다. 비판과 지적만이 있는 개혁은 교회의 죄들을 없앨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죄에서 완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죄를 이겨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불의한 제도와 인간의 욕망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은혜가 죄를 녹이고 은혜를 받으면 자기 의(義)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의(義) 앞에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문제들은 해결되는데 자기 의(義)에 중심한 개혁을 외치니 누가 그 싸움에서 물러서려고 하겠습니까?

 

아들은 아버지어머니의 책망과 강요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아버지어머니의 사랑으로, 은혜로 자식들은 변화를 받고 새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은혜가 주는 힘입니다. 교회는 무엇을 개혁해야 하는가? 교회 안에 은혜가 없음을 개혁해야 합니다. 비(非)은혜들을 개혁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은혜의 기관으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돈을 줄 수도 있습니다. 집을 세워줄 수도 있습니다. 먹을 것도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줄 수 없습니다.

 

마크 러틀랜드는, 사람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세 가지 말을 설문으로 조사한 것을 그의 책에서 인용합니다. 너를 사랑해⋯ 너를 용서해줄께! 밥 먹자⋯. 모두가 은혜의 방식입니다. 사람들은 은혜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은혜가 없으면 인간은 얼마나 초라한 존재입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은혜의 말을 듣고 싶어하고⋯ 은혜로운 표정을 보고 싶어하고⋯ 은혜로운 복음을 듣고 싶어합니다.

 

베드로는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벧전 5:10), 바울은 “내가⋯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합니다.

 

은혜의 복음! 그건 세상과 연결하는 교회만의 방식이고 세상이 교회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인데 교회는 갈수록 비대해지고 빅사이즈가 되는데 오히려 은혜의 강수는 점점 말라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교회란 잘못을 청산한 후에 가는 곳이지 있는 모습 그대로 가는 곳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은혜보다 도덕이 먼저입니다. 은혜위의 도덕! 그것이 개혁의 대상입니다.

 

세상에서도 은혜가 없고 교회 안에도 카리스, 기쁨의 은혜가 없습니다. 비은혜들만이 교회 안에 가득 차 있습니다. 오늘의 종교개혁은 비(非)은혜와 싸워야 하고 은혜가 없는 제도, 은혜가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개혁운동을 벌려야 합니다. 은혜에 대한 목마름,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 이유입니다. 사람들이 은혜를 만날 수 있도록 비은혜적인 요소들을 개혁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 자신의 구원의 즐거움, 카리스 은혜의 바다에 머리끝까지 잠겨야 은혜가 쏟아지고 은혜로 세상에 기쁨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설명하는 자들이 아니라 은혜를 전달하는 자들입니다. 은혜가 있어야 전달이 됩니다. 그러기에 종교개혁은 비은혜에서의 개혁으로 방향을 바꿔야 완성도가 높은 한국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

4세기 신학자 중에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가 있습니다. 펠라기우스는 도시 출신에 점잖고 구변도 좋아 누구에게나 호감을 샀습니다. 반면 어거스틴은 젊은 시절에 방탕했고 허물이 컸습니다.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에 대해 상당히 당당했습니다. 자기 자신 정도이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만큼 경건했고 엄격했고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에 비해 어거스틴은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도 죄송해서 얼굴을 내밀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늘 미안해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결국 경건했던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원죄, 그리스도의 구원, 세례⋯ 등을 부정하는 펠라기우스 설을 제창하고 이단이 됩니다.

 

어거스틴은 허물이 컸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신앙과 신학으로 성자(聖者)가 됩니다. 결국 은혜에 의지하는 사람은 성자가 되었고 자기의(義)에 의지한 사람은 이단이 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위대성을 보여줍니다.

릭 웨렌은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두 번째 종교개혁을 기대하고 있다. 5백 년 전 교회의 첫 번째 종교개혁은 신앙에 관계되었다. 이번의 종교개혁은 행동에 관계될 것이다. 교회가 ‘믿는 것’이 아니라 ‘행하고’ 있는 것에 관계될 것이다.”

 

그래요! “믿음은 더 이상 언어를 통하여 돌아다니지 않고 행동을 통해 움직입니다.”(존 마크스). 그것은 은혜의 행동입니다. 교회 안의 비은혜를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비은혜를 제거해야 합니다. 내가 도덕경찰이라도 되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 행세했던 비은혜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교회가 점점 개혁주의교회로 완성품이 되어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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