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락의 낙담(落膽)
예레미야 45장 1~5절
서론
지난 수요일(7일)에 우리 동네 일가족 3명이 죽었습니다. 남편은 58세, 아내는 49세, 고등학생 딸(16세)…. 생활고(苦)에 시달리던 남편이 아내와 딸을 수면제로 죽이고 자신은 검정 비닐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자살했답니다. 아내는 암환자이고 빚이 많았답니다.
외고생 딸이라면 얼마나 자랑스럽고 희망적이겠어요? 그러나 딸이 주는 희망보다는 아내의 병과 부채가 한 가장을 낙담하게 만들고 결국에는 가족을 살인하고 자살하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사연은 있겠지만… 그러면 안 되잖아요? 낙담이 결국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낙담과 낙심은 어떻게 다를까요? 낙심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실망하는 것이고, 낙담은 실망 외에 떨어질 낙(落) 쓸개담(膽) 너무 놀라서 간이 떨어질 뻔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낙담에는 2가지 뜻, 낙심-놀램이 있고, 낙심에는 한 가지 뜻만 있습니다.
그렇다면 좌절(挫折)과 낙담은 어떻게 다른가요? 좌절은 어떤 계획이나 일이 실패하거나 사람에게 상처를 받아 마음이나 기운이 꺾이는 것이고 낙담은 너무 충격을 받아 아예 무너져 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낙담은 낙심보다도 심하고 좌절보다는 더 심한 것입니다.
잠언 24:10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네 힘이 미약함…. 낙담으로 오는 의기소침, 의욕상실, 피해망상, 침울, 자아상실, 패배주의, 자격지심, 자신감 상실, 자기비하, 절망, 자기연민, 죄책감, 짜증, 침체… 등입니다. 그러니까 크게 낙담하면 도무지 살아갈 용기가 없기에 살 소망이 끊어지고 자살을 택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바룩이라는 사람의 낙담 이야기입니다.
1. 바룩, 낙심하다.
바룩은 예레미야의 서기관이면서 개인 비서입니다. 예레미야가 잘 되었으면 성공가도를 달릴 텐데 예레미야는 제대로 되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친(親)정부 편이 아니라 반(反)정부 편으로 오해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서기 바룩도 공연히 미움을 받고 고생합니다.
3절, “네가 일찍이 말하기를 화로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하도다”
화로다… 이 말에는 자신의 처지와 형편에 대한 좌절감과 하나님에 대한 섭섭함⋯ 예레미야를 만나 생고생 한다는 불평⋯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낙심천만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낙심, 의기소침, 그로 인해 죽고 싶다던 이들은 뜻밖에도 믿음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노예백성을 조직된 국가로 만들고 40년이나 광야에서 2백만 명을 먹이고 살린 위인입니다. 바다를 가르고 반석에서 샘물이 터져 나오게 한 능력자입니다. 엄청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변덕으로 심한 중압감과 배신감으로 낙심천만이 되어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민 11:15) 죽음을 간청합니다. 실패한 사람들, 보잘것없는 나사로 같은 사람이나 할 기도인데 뜻밖에도 모세의 입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요나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성읍을 구원한 사람입니다. 도성에 어린아이들이 12만 명이라 했으니(4:11) 줄잡아 50만은 되었을 것입니다. 큰 도시입니다. 요나는 40일을 분투하면 백성들을 회개시킵니다. 대단한 열정입니다. 그 정열로 성읍이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던 성공적인 전도자가 막상 원수나라가 재앙에서 피하는 것을 보고는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욘 4:3)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물과 불을 불러오고 거짓선지자들 850대 1의 대승리를 거둔 사람입니다. 마차 앞에서 당당히 약 13마일을 달려간 사람이지만 이세벨이 그를 죽인다는 말을 듣고 그 형편을 보고 멀리 달아나 로뎀나무 아래서 의기소침해져서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여호와여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왕상 19:4).
낙담의 미사일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잘 나가는 사람들, 성공가도를 달리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낙담 미사일은 발사됩니다. 봉사 잘하던 사람들, 기도의 용사들도 의기소침이라는 미사일을 맞고 우울증에 걸립니다. 신경이 쇠약해지고 정신적으로 눌림을 당합니다. 현대인들은 남의 평가에 예민하게 반응하기에 낙담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지금 바룩이 그 낙담의 광야에 있습니다. 바룩이 낙담을 치료 못하면 하나님에 대한 반발로 애굽으로 피신해서 피난민들의 지도자 노릇으로 생애를 마감하겠지요. 애굽에서 명예와 돈과 세력을 얻으며 살아갈 거예요. 그런 유혹을 받으리만큼 지금 바룩은 낙담 중에 있습니다.
2. 바룩, 왜 낙담할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승리를 거두던 믿음의 영웅들, 왜 초라한 모습으로, 죽여 달라는 세상살이의 벼랑에 설까요? 왜 이런 우울증이 왔을까요? 바룩은 왜 낙담 병에 걸리고 말았을까요?
㈀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피로가 겹쳤습니다.
사람은 무쇠가 아니기에 사역이 너무 힘들고 능률이 오르지 않으면 지치고 낙담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열심이 특심한 분들 보면 걱정됩니다. 열심내지 않는 사람들 걱정이 아니라 열심하는 사람들을 걱정합니다. 너무 열심 내다 지치지 않을까, 함께 열심내주지 않는 것에 섭섭해 하고, 낙담하지 않을까? 라는 걱정입니다.
지금 바룩이 그런 상황입니다. 그는 육체적으로 지쳤습니다. 그래서 3절…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하도다”
㈁ 곤고한 상황이 계속되자 넉아웃됩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그다랴가 미스바에서 총독이 되면 바벨론세력에게 좋은 시절이어야 하는데 웬걸 왕족 이스마엘이 총독을 암살했고 바룩은 인질이 되고 요하난 총독 친위세력이 구해주지만 암살을 저지하지 못했던 책임 추궁이 무서워 애굽으로 인질로 데리고 갑니다. 그러니 힘이 빠져버리고 지쳐버린 것입니다.
이런 경험은 우리에게도 많지요. 어려움이 끝나 숨 좀 돌리면 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문제를 어떻게 해서 해결해 놓으면 또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러면 “또냐?” 힘을 놓게 됩니다.
㈂ 사람들의 위협이 더 크게 보였습니다.
바룩은 포로 신세도 아니면서 인질처럼 끌려가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요하난을 비롯한 지도자들에게 공격의 대상이 됩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요하난 일행에게 애굽행 금지를 말하자 총독 친위세력들은 대뜸 뭐라고 말합니까?
“이는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너를 부추겨서 우리를 대적하여 갈대아 사람의 손에 넘겨 죽이며 바벨론으로 붙잡아가게 하려 함이라”(렘 43:3)
아사랴를 지도자로 하는 반(反)바벨론 세력들은 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을 얼버무리고 관심을 다른 데로 전환시키려 예레미야의 예언을 부정하며 바룩의 궤계에 말려든 것이라 공박합니다. 총독 친위세력들에게 위험인물로 감시를 받는 것이 너무 힘들고 억울했습니다.
㈃ 조기에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데 섭섭함을 키웠습니다.
3절, “…네가 일찍이 말하기를 화로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일찍 말하기를… 마음에 말한 것이지요. 여호와가 고통의 원인제공자라는 것을 계속 키워온 것입니다. 죄도 작은데서 시작하지만 섭섭병도 하찮은 데서 시작합니다. 병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조기치료를 못해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섭섭하거나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있다면 더 이상 굴려 덩이가 되기 전에 제거해야 합니다. 이렇게 바룩은 낙담에 빠집니다.
3. 바룩, 하나님을 보다.
더 큰 문제는 바룩 자신에게 있습니다. 바룩은 야망이 큰 사람입니다. 바룩은 유다의 유력한 가문 출신입니다. 조부(祖父) 마세아는 요시야 당시 예루살렘 성읍을 관장하던 왕의 고관이고(32:12, 대하 34:80) 동생 스라야는 시종장입니다(51:59). 바룩도 높은 관직이나 유명한 선지자로 세움 받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개인비서는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큰 일을 하고 싶었고 더 큰 사명을 감당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뜻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심각한 회의와 좌절감을 맛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룩은 예레미야의 개인 비서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더 이상은 자기 욕심입니다. 5절을 보세요!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큰 일은, ‘위대한’ 일입니다. 바룩은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하고 싶다고, 예루살렘을 위해 큰일을 하고 싶다 했지만 사실은 ‘네가 너를 위하여…’개인을 위한 큰일을 도모했던 것입니다.
바룩은 예레미야를 능가하는 사역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개인비서로 만족하기에는 자기 그릇이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큰일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5절, “…그것을 찾지 말라…”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것’이 아닌 ‘사람의 것’입니다. 그다랴를 암살한 이스마엘에게는 ‘그것’이 암몬행이고 요하난에게는 ‘그것’이 애굽행입니다. 바룩에게는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오는 섭섭함입니다. 또한 뭔가 크게 업적을 남기려는 그 무엇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찾지 말라 하시고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어떤 하나님입니까?
4절,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진행되므로 일신상의 영달에 연연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만유의 주(主)시며 인류 역사의 흥망성쇠를 좌우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믿으면서 맡겨진 소임에 만족하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날이 임하게 되는가?
5절,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
바룩에게 주는 위로와 보상의 말씀입니다. 바룩이 시련과 고통을 극복하면 그의 생명은 노략물보다 더 소중한 것으로 안전하게 간직될 것이니 낙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룩이 이걸 알고 자기를 내려놓으면 다시 힘이 생길 것이지만 자기를 내려놓지 못하면 화로다⋯ 자기를 시시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예레미야에게 모든 섭섭함을 돌렸을 것입니다. 그러면 바룩의 인생이 어찌되겠어요? 서기관이라면 말씀을 빠삭하게 알고 있는 사람인데⋯.
세계적인 성악가 조수미, CCM 찬양사역자 테너 박종호다. 모두 성악 천재라고 했습니다. 같은 예고를 다녔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각종 콩쿠르에서 상(賞)을 휩쓸었습니다. 조수미는 서울대 성악과 실기수석으로 입학하고 박종호는 성악과 실기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조수미는 세계인이 주목하는 올림픽무대에 서고 박종호는 시골교회에서 노래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박종호는 CCM가수로 활동하다 미국으로 유학 갔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 한인교회 집회 찬양에서 모두 울었습니다. “왜 울지?” 목회자 친구가 설명했습니다.
“미국 어느 소도시나 한인교회가 있어. 미군 부대 주변 기지촌에서 일하다 미 병사 만나 여기까지 시집 온 한국 아줌마들도 많아. 영어 못하고 가족도 없고…. 한국인이 얼마나 그립겠냐.”
하나님의 은혜에 충만해서 미국의 50개주 한인교회를 다 돌기로 했습니다. 뉴멕시코주 앨버커키 한인교회에 갔는데 집회 후 담임 목사가 부탁했습니다.
“알라모고도에 저희 지교회가 있어요. 거기 좀 가주시겠어요?”
5시간 비행기를 타고 몇 시간씩 차타고 갔더니 25명이 모였습니다. 그를 보려 인구 7000명 소도시 한인들이 다 왔습니다. 반경 100㎞에 한국인 23명이 사는 곳입니다. 그들은 다 소시지 공장에서 일합니다. 하루 종일 방망이로 천장에 걸린 고깃덩어리 두들기다 왔습니다. 집회 후 척추장애인 여집사가 다가와서 10달러를 내밀었습니다. 점심 두 끼 굶고 갖고 온 돈이랍니다. 미 병사의 아내로 시집 왔던 그 집사는 전 세계 미군 기지가 있는 곳을 열거했습니다.
“일본 오키나와, 독일 프랑크푸르트… 거기 가서 저희같이 외로운 사람 위해 찬양해주세요.”
이후로, 박종호는 하나님을 위하여 찬양하고, 영혼을 달래는 노래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명성을 잃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구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하다 돈을 잃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비량으로 전도하는 예수전도단 친구들에게 2002년부터 매년 10만4000달러를 기부하며 삽니다. 탄자니아와 인도에 에이즈를 앓고 있는 어린이를 위한 고아원 2곳을 지었습니다. 그는 거액기부자지만 자신은 마포구 한 아파트에서 월세로 살고 있습니다.
찬양집회 인도 후 얼마 되지 않는 사례비마저 깎는 교회가 종종 있었습니다. 바로 그 교회가 2∼3주 뒤 대중가요 가수에게 수천 만원을 줬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 박종호는 액수보다 태도에 상처받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세상 영광과 명예를 놓았는데 정작 교회에서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박종호는 교회의 장로로(53·동탄지구촌교회), 전국교회 주소록을 들고 농어촌교회를 찾아다니며 찬양하는 삶을 사랑하며 행복해 합니다. 세 딸들이 믿음으로 자라는 것을 기뻐합니다. 바룩의 낙담이 자족과 행복으로 바뀐 것입니다.
결론
10월 중순입니다. 어제 비가 왔더니 오늘은 날씨가 스산하고 쌀쌀합니다. 마음도 스산하는 계절입니다. 이런 시기에 계절이 주는 인생의 마음앓이를 조심해야 합니다. 엘리야나 세례요한의 낙담은 영적인 성공 후에 누구에게나 공격해 오는 우울증, 낙담, 의기소침입니다. 그러나 바룩은 성공조차 없이 다가오는 낙담이기에 더 고통스럽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낙담의 요소와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힘을 얻도록 하십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상황이 옵니다. 그럴 때에 바룩을 반면(反面)교사로 삼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하나님의 약속으로 새 힘을 얻고 다시 힘을 내고 힘차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너무 큰 것들 바라보지 말고⋯ 남들과 너무 비교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 고백하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편이 된다면 하나님도 항상 우리 편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모두 힘을 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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