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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성전을 버려두지 않겠다! (느헤미야 10:39)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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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중고서적에

 

성전을 버려두지 않겠다!

느헤미야 10장 39절

서론 

미국 유명잡지 <라이프>지는 서기 1000년~2000년의 밀레니엄을 만들어낸 100대사건 중 1위는 1455년 독일 대장장이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성경을 인쇄한 일, 2위는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1492년), 3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1517년)이라고 선정한바 있습니다.

 

콜럼버스가 2위 사건으로 올라간 것은 이해가 갑니다. 신대륙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미국이라는 나라도 없었을 것이고 미국이 없는 세계역사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미국이 세계사에 끼친 영향을 좋던 안 좋던 거의 절대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금속활자로 성경을 인쇄한 일이 1천년동안에 1위이며 종교개혁이 3위냐는 것입니다. 처음 들으면 상당히 기분이 좋은 일이지요! 1천년 1~3위가 모두 기독교와 연관이 있습니다. 1위는 성경, 2위는 청교도가 세운 기독교 국가 미국, 3위는 개신교의 탄생이니까요! 그러나 여기에 인류의 영악함과 위기가 함께 숨어 있습니다.

 

특히 종교개혁은 그 단어 선택에서부터 잘못된 냄새가 납니다. 마르틴 루터 칼빈 츠빙글리 위클리프… 등의 종교개혁은 원래는 종교를 개혁하자는 것이 아니라 교회개혁,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바티칸 교황청 개혁운동입니다. 그런데 좋은 뜻의 개혁운동을 각자들은 자기의 구미와 이익에 맞게 왜곡 내지는 둔갑을 시켜버렸습니다.

 

서구사회는 종교개혁을 빌미로 교황의 절대적 권력을 비판하다 아예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시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르네상스, 문예부흥입니다. 르네상스라는 말은 재생, 부활을 의미합니다. 신에 의해 억압당해 왔던 인간의 정신생활이 독립적으로 부활돼야 한다는 것으로 휴머니즘(인문주의자)을 낳았습니다.

교황에게 억눌림 당한 것을 신에게 억눌림 당한 것으로 엮어놓고 신에게서의 독립이 인간의 참된 정신을 구현한다는 사상운동입니다. 그 결과는 휴머니즘이 아니라 오히려 1차 2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반(反)휴머니즘과 함께 도덕적인 타락과 자본주의 부패를 불러 왔습니다.

 

로마교황청은 종교개혁운동에 놀라 처음에는 자체 정화작업을 펼치는 것처럼 요란을 떨었지만 제도와 교리에서, 특히 마르틴 루터가 요구했던 95개조항의 쇄신을 전혀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비성경적 교리와 교황청의 부패와 타락을 교황이라는 인물브랜드로 포장을 했고 그게 대단한 성공작이 되었습니다.

 

사실 교황의 행태를 보세요! 교황이 누구에게 전화 한 통 하고 편지 한 통 쓰면 세상이 감동을 받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차례나 위로와 문안과 축하의 문자를 보내도 교회성장을 위한 당연한 일로 압니다. 교황이 누구를 찾아가서 뺨에 키스 한 번만 해줘도 엄청 겸손하고 거룩한 행동으로 떠받듭니다. 교황청은 이미지의 중요성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중들에게 교황은 우리와는 종자(種子)가 다른 무오한 분이지만 서민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키스를 보내니 오늘의 예수님이다, 라는 이미지로 종교지도자의 엄청난 특권과 비성경적 부분들을 가장 성경적 인물로 멋있게 포장하는 마술을 부립니다.

 

그 결과, 부패와 타락이라는 로마가톨릭의 부정적 이미지를 교황이라는 신성한 캐릭터를 만들어내어 지금 그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교황청의 개혁은 물 건너 간 것이지요!

 

소위 개신교라고 하는 종교개혁의 후손들은 어때요? 우리들은 교회의 개혁만을 주문합니다. 제도의 개혁, 교리의 개혁, 교단의 개혁만을 말하면서 자신들은 개혁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을(乙)이 되어 버립니다. 사실 종교개혁의 출발은 교황청의 제도와 교리와 신분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원래 루터의 주장은 모든 이들이 매일 자신을 개혁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개혁, 자기중심적으로 굳어져 가는 것에 대해 개혁하자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개혁의 주체만 아니라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 95개항의 1번이,

“만유의 주님이시며 영원한 지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회개하라고 선포하신 그 골자는 성도들의 생애가 참회의 요소가 있어야 함을 의미하노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의 개혁 교단의 개혁만을 요구하고 비난하지 우리 자신들에 대해 개혁은 생각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개혁교회라는 말이 무색하고 만 것입니다. 종교개혁, 교회개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개혁의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매년마다 종교개혁주일을 지켜왔습니다. 종교개혁이라는 그 개혁은 기독교에 덧씌워진 것들! 복음에  덧씌워진 것들! 그걸 걷어내자는 것입니다. 성경에 교황청에 관한 언급이 있나요? 베드로가 교황이라고 했나요? 고해성사나 사제들의 사면권이 있습니까? 성경권위보다 교황의 권위가 우위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로마에서 교황청 왕국이 나오고 예루살렘 어머니교회를 놔두고 동로마교회가 자기네가 어머니라고 우길까요? 로마에 들어간 기독교가 주후 3백년 경 콘스탄틴대제의 기독교 공인을 계기로 로마의 주류종교인 바벨론종교와 빅딜합니다. 카타콤 기독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순교도 불사하는 충성심이 있었지만 예배당이 없었습니다. 바벨론종교는 신전은 있는데 황제의 개종으로 힘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두 종교가 합병을 하게 됩니다.

 

기독교는 바벨론제도들-승정원(교황)제도 고해성사…를 받아들이고 바벨론교단은 기독교 교리를 채택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와 바벨론종교의 교묘한 통합으로 새롭게 태어난 로마가톨릭은 말씀중심에서 신전중심의 미사종교가 되고 종교에 정치를 덮은 것이 바티칸입니다.

 

종교개혁은 이런 잘못된 ‘덮어씌우기’를 걷어내자는 사상입니다. 비복음적 요소들이 제도에 덮어씌웠다면 그 제도를 걷어내고 교리에 덮어씌웠다면 교리에서 걷어내고… 그래서 예루살렘교회의 가르침으로, 사도들이 전한 복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게 개혁주의입니다.

 

우리 개혁주의교회가 제도에서의 개혁, 교리에서의 개혁, 생활에서의 개혁 등을 부르짖으며 빠져나왔는데 그만큼 개혁되었나요? 교회의 부패, 권위의식, 물질중심, 신전보다 더 화려한 예배당…은 개혁되었나요? 496년이 지났지만 개혁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개혁의 요구에 놀라 자체 내의 개혁을 시작했던 바티칸은 지금은 더 인본주의 다원주의 종교가 되었고 개혁주의 기독교는 개혁교회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도루묵이 된 것은 아닌가요?

 

지금 우리는 개혁의 후손이라 자처할 만한 명분이 없습니다. 특히 한국교회는 교회 스스로의 쇄신과 자정으로 개혁되기보다는 언론에 의해 개혁되고 인터넷을 통해, 개혁하라는 요구 앞에 직면해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개혁하고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이 교회에 개혁을 요구합니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해야 하는데 세상이 교회를 걱정한다? 너무 자존심상하는 말입니다. 그래도 이게 현실이라는 사실에 민망하고 창피한 노릇입니다.


우리가 개혁주의라 하면서 세상을 향해 개혁을 외치고 교황청을 향해 개혁을 요구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보겠어요? 너나 잘 하세요~ 개혁의 갑(甲)과 을(乙)이 바뀌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한국교회는 입만 열면 개혁이요, 무슨 교회개혁시민연대… 한국교회바로세우기연대… 등으로 집중 포화를 맞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교회가 억울한 것들도 많아요!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점도 많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害)가 되는 종교입니까?  

 

노무현 정권 때 복지부 고위직을 역임했던 분이 그랬답니다. 한국교회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었는데 복지부에 들어가 사정을 알아보니 한국교회가 복지에서 빠져버리면 엄청난 혼란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다, 한국교회는 알게 모르게 한국사회를 위해 큰일을 한다…고요. 

그런데도 99% 작은 손들이 하나의 큰손의 실수 앞에 퇴색되어 버리고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언론과 인터넷은 이를 대서특필하며 한국교회를 나쁜 종교로 만듭니다.

 

지금은 한국교회를 너무 많이 때리면 안 됩니다. 세상은 때리고 공격하고 돌을 던져도 우리는 함께 돌을 던져서 되는 것이 아니고 막아서야 합니다. 왜냐?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고 교회는 우리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나를 때려도 나는 내 몸을 보호해야 합니다. 남들이 우리 어머니를 욕해도 나는 막아서야 합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오늘 교회는 자학이라는 더 큰 상처로 우리 스스로에게 자상을 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만이라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공격하고 비판하기보다는 아프지만… 마음에 들지 않지만… 분노하지만 지금은 던지던 돌을 내려놓고 한국교회를 위해 울며 대신 회개의 기도를 하며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감싸 안으며 일으켜 세우려는 애정을 보여야 합니다.   

 

제가 원래는 종교개혁주일 설교에 다른 본문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한국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개혁시민연대 식(式)의 설교입니다. 그런데 10일 전쯤에 새벽기도회에 이 본문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구절입니다.

 

39절,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려두지 아니하리라….

 

<쉬운성경>은,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돌보지 않은 채 내버려두지 않겠습니다.

 

<메시지> 성경은,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지 않는다.

 

 하나 같이, 하나님의 전을 버려두지 않겠다! 눈물이 팍 나오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한국교회를 보면서 나쁜 것만 보았어요! 나쁜 목회자들만 보았어요! 세상이 들추어내는 추문의 속살들만 보았지 우리가 얼마나 좋은 일을 많이 하는가, 일생을 걸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자기희생적인 삶을 사는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것은 생각하지 않고 세상이 보여주고 싶어 하는 교회의 추문만 우리도 듣고 보고 분노하고 때로는 교인이라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하나님의 전(殿)은 버려두고 만 것입니다. 

 

느헤미야서, 개혁가 느헤미야도 그래요! 설득에 강한 지도자, 백성들을 통합시키는 지도자, 투명하게 관리한 지도자… 이런 개혁적 성향만 말했지 오늘 30절의 본문은 놓쳤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려두지 아니하리라…. 느헤미야는 개혁을 하면서 성전을 허는 개혁을 하지 않았습니다. 성전을 헐어버리면 개혁도 뭐도 없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거 있지 않아요? 아기가 더럽다고 대야에서 씻으니 대야의 물이 더러워졌어요? 물이 더럽다고 물을 버린다는 것이 대야의 아기까지 던져버렸어요? 그러면 아기를 씻은들 무슨 소용이 있어요?

 

한국교회를 개혁한다고 한국교회를 박살내 버리고 한국교회를 뭉개버리면 개혁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지금은 한국교회의 잘못된 부분을 쓰다듬어주고 어루만져주고… 위로해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교회가 건강을 회복하면서 개혁주의로 나아가면서 건강한 교회가 됩니다. 그로기상태에 있는 어머니교회를 두들겨 패면 개혁이 아니라 죽고 맙니다.

 

한국교회가 죽어버리고 약화되면 누구만 좋아할 것입니까? 사단이 좋아하고 타락한 문화, 저질의 예술만 좋아합니다. 그러니 병든 한국교회를 때리고 욕하기 전에 우선은 건강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만이라도 욕하지 말고 내가 바르게 살아 한국교회가 바르고 건강한 교회가 되어야 진정으로 개혁교회가 되고 교회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52일 만에 성벽을 재건하고 이방인들과 결혼한 유대인들의 통혼문제를 정리하고 안식일을 성일(聖日)로 회복하겠다는 다짐을 받습니다. 그런 후에 이제는 언약 내용대로 살기 위해 성전수호를 다짐합니다.

 

32절, “우리가 또 스스로 규례를 정하기를 해마다 각기 세겔의 삼분의 일을 수납하여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쓰게 하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년 성전세를 바치겠다는 맹세입니다. 이런 결정은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힘이 있는 국가로 있을 때는 막대한 왕의 수입(收入) 중 일부가 성전 재정에 충당했으나 페르시아 정복 하에 있던 당시에는 재정난으로 성전 운영이 심히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레위 사람들이 성전봉사를 통해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니 성전 봉사로부터의 이탈 현상이 있었습니다.

 

성전 제사장들은 더 타락하고 장사꾼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성전이 꼴도 보기 싫고 성전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발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마다 세겔의 삼분 일을 바치는 법을 만들면서 이런 다짐을 합니다.

 

31절,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려두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전(殿)을 버리지 않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전을 거절하지 아니하겠다! 하나님의 전을 버려두지 아니하겠다! 고 선언합니다.

 

너무 좋은 선언입니다. 요즘 한국교회는 여러 모양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외부로부터의 공격이 아니라 내부에서의 무관심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공격을 당하고 융단폭격을 당할 때 교회에 대해 실망하고 열정과 관심을 끊어버리면 하나님의 교회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를 키워내고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크게 도움을 받았던 하나님의 성전! 우리도 선언합시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려두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전(殿)을 버려두지 않겠다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성전을 깨끗하게 하겠다! 여기에 개혁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남들이 비난해도 우리는 성전에서 돌아서지 않겠다!

 

이런 마인드로 종교개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교회는 참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자랑스러운 교회입니다!

결론

지난날 2%의 기독교인들이 98%의 국민들을 이끌고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신임을 얻을 수 있습니다. 원래 독립선언문 발표는 고종 황제의 장례식(3일) 전날인 3월 2일에 하게 되었습니다. 그 날이 주일이었어요! 33인 중의 16인이 기독교인입니다, 크리스천 서명자 16명이 주일은 힘들다, 하니까 하루 앞당겨 3월 1일에 거사를 일으킬 정도로 신임을 얻고 영향력이 강한 한국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개독교라고 돌을 맞고 있습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나 때문입니다. 내가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나만 빼버리고 한국교회를 욕한다면 한국교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내가 개혁의 대상이고 나의 생활을 개혁해 합니다. 조정민 목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스무 살에는 세상을 바꾸겠다고 돌을 들었고, 서른에는 아내 바꾸어 놓겠다고 눈초리를 들었고, 마흔에는 아이들 바꾸고 말겠다며 매를 들었습니다. 쉰에야 바뀌어야 할 사람이 바로 나임을 깨닫고 들었던 것 다 내려놓았습니다.”

 

세상을 개혁할 생각 말고 교회를 쇄신할 거창한 구호 외치지 말고 조용히 나 자신의 개혁과 쇄신을 이루어가는 사람들이 진정한 종교개혁, 교회개혁의 후손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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