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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성도의 죽음이 귀한 까닭(시편 116:15)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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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죽음이 귀한 까닭

시편 116편 15절

서론

개역성경은 본문을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라고 합니다. 죽음을 귀하게 보시는 분도 있네요? 하나님께서 귀중히 여기시는 죽음은 있을지 몰라도, 유족들 입장에서 귀중한 죽음은 없습니다. 원통하고 슬프고 오죽했으면 따라 죽기까지 합니까?

 

목요일 원로목사님 사모님 10주기예배에서 이 본문으로 설교했습니다. 찬양대 지휘자가 계속 울어요. 유족인 딸과 며느리는 울지 않는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지휘자가 계속 우는 거예요! 예배 끝나고 물었어요. 왜 며느리처럼 우냐고? 작년에 별세하신 어머니 생각에 계속 울었다는 거예요. 교회 일 열심히 하다, 연세도 지긋해서 가셨을 텐데 복된 죽음이라 하겠지만 어머니를 잃은 딸의 입장은 귀한 죽음이 아닙니다. 슬프고 죄송한 죽음입니다.

 

전직 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했습니다. 한 편에서는 애석하다, 억울한 죽음이다 하고 다른 쪽은 검찰 수사를 모면하기 위한 무책임한 도피다, 그렇게들 말해요. 어느 편도 그 죽음이 귀하다, 그렇게 말하지는 못합니다. 죽음의 성격이 그런 것입니다.

 

지난 주간 교회 성도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경찰서장을 두루 역임하시고 쌍방울 방계회사 사장도 회장도 지내시고 훈장도 많이 받으시고 날씨도 좋은 날 골라서 가셨어요. 87세면 옛날 어르신들 수명으로는 장수하신 거지요! 그러면 호상인가요? 삼자들에게는 호상이지만 유족들에게는 100수도 호상은 없습니다. 죄인이고 죄송하고 슬픈 죽음입니다. 그래서 호상입니다, 는 인사는 조문객끼리나 할 말이지 유족들에게 건넬 위로인사는 아닙니다.

 

이렇게 모든 죽음은 귀하다, 아름답다, 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위로가 통하지 않는 인생의 유일한 슬픔과 아픔이 있다면 죽음입니다. 죽음은 전혀 위로가 듣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15,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보시기에 귀중하다, 라고 하십니다.

 

문자적 번역은 성도의 죽음은 여호와의 눈에 귀중하다입니다. 죽음을 보는 우리 눈과 하나님의 눈은 다르군요. 

죽음을 보는 우리 눈에는 눈물, 슬픔, 고통이 있는데 죽음을 보는 하나님의 눈에는 잘 죽은 죽음이야, 귀한 죽음이야 그렇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설교는 그동안 장례식 때, 주일설교 때 했던 예화들이 여럿 나올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준비 사별에 대한 사전 지식 이런 상황에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성도의 죽음이 귀한 까닭은, 가는 주소지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나 형제 자식 교우를 보내면서 왜 웁니까? 헤어짐, 그냥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헤어지니 울지 않고 보내는 것이 이상합니다. 그런데 유독 우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주 효자가 울고 아주 불효자가 웁니다. 적당히 잘 했던 분들은 적당히 웁니다.

 

효자는 잘 해 드렸는데, 못해 드린 것만 생각나서 웁니다. 불효자는 청개구리 짓을 했으니 울 수밖에 없지요. 저는 어머님의 임종도 보지 못했는데 임종이야 봤지요. 장남인 제가 오기까지 산소호흡기로 연명하고 있었으니까. 제가 가서 떼어드렸어요! 제가 어머니 산소호흡기 떼기 전에 10시간을 울었어요. 30년 객지생활에, 고학하고 교회개척하고 어머님을 섬길 시간과 여유가 없었어요! 지금 살아계셨다면 매일 업고 다닐 거예요! 부모님 살아계실 때 잘하세요! 나처럼 시신 붙들고 울지 말고. 전형식 이한재 장로님 잘하세요. 장로님들이 11분인데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두 분만 어머님이 살아계시니 참 부러워서 그런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미안해서 죄송해서 우는데 3 4년이 지나면 신기하게도 부모님의 죽음이 귀중하게 여겨지고 갈수록 더욱 또렷해지고 소망이 생깁니다. 비신자들은 갈수록 더 막막해지고 괴로워하다 마음에 지워버립니다. 제사상으로 추모한다지만 저들도 알아요, 아무리 좋은 음식을 채려놓아도 돌아가신 부모님이 한 숟갈도 뜨지 못하신다는 사실을.

비신자들 부모 죽음에서 황망한 것은,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니까 장례식 치르면서도 아득한 거예요. 혼이 있다고 믿고 어디론가 떠난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로 갔느냐 말이에요.

 

사람의 혼이 떠나면 구천(九天)을 헤맨다잖아요? 구천은 불교용어인데 아홉 하늘이에요! 아홉 하늘 어디에도 갈 수 없어 이리저리 떠도는 혼을 구천을 헤맨다는 거예요! 그러니 아무리 성공하고 권세와 명예 누리지만 죽으면 흙이 되고 한 줌의 재가 됩니다. 뭐가 남아요? 혼이 구천을 떠돌고 있으니 죽음은 귀한 것이 아닙니다. 허망한 거예요! 허망한 죽음이고 인생이 풀처럼 연기처럼 가벼운 것입니다. 떨어져 시든 풀과 꽃이 귀한 것이 아니잖습니까?

 

헨리 나우엔은 <죽음, 가장 큰 선물>에서 공중 곡예사 이야기를 합니다. 공중 곡예사가 줄을 놓는 것은 날아 갈 곳이 있기에! 받아주는 상대방이 있기에! 틀림없이 잡아준다는 믿음이 그 공중에서 줄을 놓도록 하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비신자들은 어느 하늘로 날아가 어느 하늘에서 헤매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니 괴로움이고 나중에는 체념하고 잊어버립니다. 물론 구천을 헤맨다는 것은 그들 생각이지 성경 가르침은 아닙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비신자들이 가는 곳의 정확하게 문패가 있어요! 지옥이라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죽음의 줄을 놓을 때 혼이 날아가는 거예요! 어디로? 번지수가 분명해요! 날아가는 곳이 분명해요! 천국! 번지도 나와요! 3927번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손을 붙잡고 정확한 방면으로 날아가는 거예요! 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미사일이 나를 태우고 날아가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우는 것은 가는 곳을 몰라서가 아니라 헤어짐 때문에 우는 거예요! 그러다 어느 정도 지나면 가 계신 곳을 아니까 그리움과 함께 만날 생각으로 소망이 생깁니다. 그러니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눈에 귀하게 보입니다.

2. 성도의 죽음이 귀한 까닭은, 천국을 실감해 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을 믿고 있습니까? 남자 분들이 왜 이리 소리가 작아요? 믿습니다! 큰소리로 아멘! 해봐요! 천국을 믿는다, 아멘! 했지만 그 천국믿음은 교리적이고 종교적이고 상당히 관념적입니다. 천국을 일본 중국 미국처럼 실재하는 나라로 믿는다는 게 실감이 안가요. 아무리 제가 천국 설교하고 장례식에서 천국 설교해도 믿고는 있지만 실감은 가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님이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사정은 달라집니다. 갑자기 천국이 분명히 있는 거예요! 성경에서 그렇게 천국이 있다고 했고! 천국이 있다고 설교를 들었을 때도 그냥 심드렁했어요! 천국을 믿기는 하지만 막연하고 나와 관계가 없는 거예요!

 

저 아프리카에 나이지리아가 있다는 것은 알았어요. 그게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때요? 지식은 있었는데 별로 관심도 없고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어요! 그런데 정인태 장로님이 나이지리아로 갔어요! 나이지리아는 더 이상 지도가 아닙니다. 그 나라는 남편 생각할 때마다 믿어지고 가고 싶고 내게는 프랑스나 이탈리아보다 더 정답고 가까운 나라입니다. 왜 그런가요? 남편이 가 있고 아버지가 가 있고 우리 장로님이 가 있으니까 실감나는 것입니다.

 

천국! 하늘나라! 성경을 읽고 설교도 들어서 알고 믿기는 했지만 실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계신다, 생각하니 그건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는, 죽어봐야 아는 그런 장소가 아닙니다. 천국은 분명히 있습니다. ? 어머님이 계시니까! 천국을 부인한다는 것은 어머님의 믿음과 생애! 어머니와의 약속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머님이 계신다, 하면 저절로 천국이 들어옵니다. 설교 갖고도 제대로 믿어지지 않고 성경공부해도 안 되는 것을 어머님은 단 한 방의 죽음을 통해 천국믿음을 소유하는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성도의 죽음! 어머님의 죽음이 어떠하겠어요? 당연히 귀하게 보십니다.

 

비신자들은 어때요? 고인이 천국에 가셨다는 확신이 안 들어요! 그러면 어디로 가신 거예요? 죄송하지만 지옥입니다. 지옥이 괴롭지요! 나도 괴로워요! 아버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어요! 지옥에 계신 부모님 생각하면 괴로워요! 그러니 천주교회에서는 연옥을 만들어 냈어요! 다 부질없어요! 그런 식의 천국이라면 기독교의 다른 가르침이 거짓이 됩니다. 왜 그런 비성경적인 교리를 전하는지 모르겠어요! 돈 때문에! 성당 부흥 때문에 그런 걸까요?

 

부모님이 지옥에 계신다! 괴롭지요? 괴로우니까 차라리 잊어버리고 맙니다. 세월이 지나면 잊어집니다. 부모님 사후(死後)를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겪느니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천국에 가 있는 분들은 세월이 지날수록 더 그립고 이제 만난다는 소망이 생기고 지옥에 가 있다고 생각하면 방법이 없으니까 잊어버리고 사는 거예요! 그러니 자식에게 고통을 주는 비신자의 죽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귀중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 잘 믿어야 합니다. 돌아가실 때 꼭 천국에서 만나자고 유언 남기세요! 꼭 기독교식으로 장례식해라~! 그러면 예수님 더 잘 믿고 안 믿어지던 천국이 믿어집니다. 

천국은 부모님의 고향이 되었으니까! 내가 죽어서 우리 자식들 천국을 돌아갈 고향으로 실감하는 믿음이 되었으니 그 죽음이 당연히 귀한 죽음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눈에 성도의 죽음은 귀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3. 성도의 죽음이 귀한 까닭은, 유족들의 슬픔을 덜어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열아홉에 고향을 떠났습니다. 눈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그런 속설이 있답니다. 백눈이 내리는 날 고향을 떠나 객지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다고.

 

우리 어머니, 마음이 어땠을까요? 제가 서울이 처음이에요! 두 번째네요.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한번 와봤으니까! 지금은 서울역하고 청계천 삼일빌딩 밖에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서울에 아는 이가 없어요. 아는 이라고는 고향교회 집사님 한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의 번지수 하나 들고 올라가는 거예요! 어머니 마음이 찢어지겠지요? 전화나 제대로 있어요?

 

세월이 지나니까 같은 서울에 올라가는데 이번에는 하나도 애처롭지 않습니다. 집안에 무슨 일이 생겨서 아들이 내려왔다 서울로 올라가는데 결혼해서 아내가 있어요! 두 아들이 있어요! 여객선이나 비행기 타는 아들의 뒷모습은 늘 미안하고 애처로운 것이 어머니 마음이잖아요? 그러나 잘 가라~! 하면서도 옛날 같지 않아요! 맞은편에서 어서 와요! 여보! 하고 맞아줄 며느리가 있기에 떠나보내면서 섭섭은 하지만 괴로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들을 떠나보내는 그 이별은 귀한 거예요? 절망이에요? 당연히 귀한 이별입니다. 서울에 가야 아들의 가족을 만나니까 그 이별은 슬픔이 아니라 귀한 것입니다.

죽음이 그래요. 남편이 아내가 죽어 천국에 먼저 올라가 있습니다. 부모님이 천국에 가 있습니다. 죽음의 배를 타고 망망대해로 떠나가는 죽음을 향해, 아버지 잘 가요! 여보 잘 가요~ 인사하잖아요! 참 슬픈 인사말이지요! 그런데 아버지가 먼저 가 계신 거예요! 아니면 남편이 저쪽에서는 뭐라고 해요! 어서 와요! 어서 오세요~ 어서 오너라!

 

내 쪽에서는 보내는 슬픔의 환송이지만 저쪽에서는 반가움의 환영식이에요! 나는 택배로 시신을 보내지만 반대편 천국에서는 영화의 영체로 택배 받아요! 그걸 생각하고 자식들이 슬픔 중에서 위로를 받아요! 아내가 위로를 받아요! 목사 설교로도 위로받지 못했는데 돌아가신 고인이 유족들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죽은 분이 산 사람을 위로하는 격이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성도의 죽음은 내 눈에 귀중하다하시고 그 죽음은 당연히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이 아니고 어둠의 세계로 가는 이들에게는 사자(死者)는 가지 않으려 하고 죽음의 사자는 너 잘 왔다! 하면서 끌고 가려하기에 보내는 이는 슬프고 괴롭고 견디기 힘듭니다. 비록 믿음생활은 하지 않지만 그 영이 자신도 모르게 영적인 사실들을 감지하고 슬픔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갈 곳도 없고 기쁨으로 받아줄 이도 없고 지옥의 어느 곳에 있는지 만나지도 못하고 만나도 남남처럼 증오하고 미워하고 으르렁거리기에 비신자들이 영이 그걸 감지하고 죽음 앞에서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는 것도 힘들다지만 죽음은 얼마나 두렵고 죽음 이후는 얼마나 힘들까요?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 같은 이단은 구원을 받지 못한 비신자들의 사후(死後) 영혼을 부인합니다. 천국에 갈 사람은 영혼이 살아남는데 구원이 없는 영혼은 육체가 죽을 때 같이 죽어버리기에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예 지옥을 부인하는 것이지요!

 

저도 개인적으로는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성경에는 천국과 지옥이 분명히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믿고 싶어하는 것만 믿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면 요즘 우리 사회의 편갈린 사람들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천국을 믿으려면 지옥도 믿어야지요!

 

비신자들의 죽음은 잘 가요~ 이별인사만 있기에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괴로운 인사말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죽음에는 어서 오너라! 어서 오세요~! 영접의 인사가 있기에 그 상상을 그려보면서 떠나보내는 자녀들이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먼저 가서 기다리다가 어서 와요~ 인사할 생각으로 위로를 주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눈에는 성도의 죽음은 참 귀하다! 그렇게 보시고 말씀해 놓으신 것입니다.

결론

3,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4,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그런데 어떤 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건져주지 않았습니다.

 

8,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어떤 이들은 건짐을 받지 못하고 사망으로 눈물로 넘어짐으로 남게 됩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15절이 해답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죽음을 귀하게 보신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생명이었다면 어떤 죽음이든지 무가치한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

 

-공중에 떠도는 죽음이 아니라 가는 주소지가 분명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유족들에게 천국을 실감시켜주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유족들의 슬픔을 덜어주는 위로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타임>지의 창간자 헨리 루스의 부인 클레어 부츠 루스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은 날로 기억된다.”

 

살아있는 사람은 생일로 축하를 받습니다. 죽은 이들은 죽은 날로 기억됩니다. 그가 언제 돌아가셨나? 그것만 남지 생일은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 죽음은 귀한 죽음이 될까요?

 

우리 죽음이 가는 곳을 분명히 보여줄까요? 유족들에게 천국을 실감시키는 죽음일까요? 남은 이들에게 울지 마! 먼저 가서 기다리다 내가 영접해 줄께~ 그렇게 말해주고 가는 죽음이라면, 하나님의 눈에 귀한 죽음이고 슬퍼하는 우리들에게 공중으로 사라지는 덧없는 죽음이 아니라 귀중한 죽음입니다. 중세기 수도사들은 대문에 이런 글을 새겨놓았습니다.

 

memento mori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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