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땅의 소금이니
마태복음 5장 13절
서론
주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주문하십니다. 요즘이면 이런 가르침을 주실까요? 요즘 소금은 인간역사에 들어온 이래 개인의 건강, 가족의 행복을 파괴하는 주범(主犯)처럼 경계의 대상입니다. 소금은 음식 맛을 내기 위해 자신은 녹아지고 형체도 없이 희생했더니, 인간님(?)들이 그 음식을 먹으면서 보통 푸대접이 아닙니다.
소금은 식염(食鹽)으로 화학명은 염화나트륨입니다. 사람에게 소금은 생리적으로 없어서는 안 됩니다. 혈액 속에는 0.9%의 염분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소금이 부족하면 소화액 분비가 감소하여 식욕이 떨어지고 땀을 많이 흘려 체내에 염기가 모자라면 현기증, 무욕, 의식혼탁, 탈력… 등 육체적 정신적으로 기능이 상실되고 목숨도 잃습니다. 그래서 보통 성인들은 하루 12∼13g의 소금을 섭취해야 합니다. 소금이 없던 시대에는 조수(鳥獸)나 물고기를 잡아먹음으로 동물몸속에 있는 염분을 섭취하며 건강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던 인간들이 점점 짜게 먹다보니 고혈압의 원인이 되고 건강을 해치는 주범이 되었다고 얼마나 구박하는지 소금 입장에서는 억울합니다. 소금이 없으면 고기 맛도 국물 맛도… 김치 맛도 없다던 인간들이 소금 때문에 몸이 망가진다고 야단이니 소금의 입장에서야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그래서 요즘은 소금도 화병클리닉에 다녀야 합니다.^^
이런 시대이기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 는 메시지도 그만큼 매력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금이 되라! 하신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가르침의 대상이 일반청중이 아닙니다. 높은 수준의 신앙인에게 주신 가르침입니다. 믿음을 위해 자신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들,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그래? 그러면 먼저 세상의 소금이 되라" 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소금 용도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식용, 부패방지용, 약용…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들으면 세상의 악을 방지하라, 부패를 막아라, 맛을 내는 조미료가 되라… 정도로 이해하고 설교도 합니다. 틀린 해석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뜬구름을 잡는 관념적 가르침이 아닙니다. 팔레스타인 땅은 석회질이 많습니다. 물에도 석회가 많아서 식수도 그만큼 귀합니다. 땅이 석회암이고 석회질이다 보니 토질이 거칩니다. 석회질이 많은 땅에 비가 오면 더 단단하게 굳어지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타인 농부들은 씨앗을 뿌리기 전에 땅을 부드럽게 하려고 소금을 뿌립니다. 소금으로 땅이 부드럽고 싹이 잘 나오기 때문입니다. 석회가 엷어진 좋은 땅이 되는 것이지요!
이제 그림이 그려집니까? 씨앗은 예수님, 혹은 예수님 말씀, 땅은 청중입니다. 그 청중은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굳은 석회 땅입니다. 그 땅은 나중에 13장에 나오지만 마음 밭들이 길가 밭, 돌짝밭, 가시덤불 밭입니다. 이들이 청중입니다. 아직도 주님을 수용하지 못하고 대리석 같은 밭이고 돌이 많아서 씨앗이 떨어지지만 싹이 나오다가 맙니다.
이런 심령의 땅에 제자들은 소금이 되어 석회질의 굳은 것을 없애 옥토(沃土)로 만드는 소금이 되라는 거예요. 그래서 외국의 어떤 성경은, 땅의 소금이라는 말로 번역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말은 땅에 들어가는 소금이 되어 씨앗이 나오도록 땅을 부드럽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배경을 모르면 세상의 소금이 되라… 너무 관념적입니다. 설교하기는 쉽고 기도할 때의 문구로 사용하기에는 좋은데 정작 그 세상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소금이 되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에 대한 개념이 정리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공허한 구호로 끝나고 맙니다.
너는 땅의 소금이다! 그 땅이 구체적으로 누구입니까? 내 주변의 누구입니까? 피하고 싶고… 멀리하고 싶고… 상종하기 싫은 그 불편한 사람… 사람은 좋은데 믿음에 대해서는 그렇게 야박하고 투박할 수가 없는… 바로 그 사람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땅, 그 마음, 그 사람입니다! 너는 바로 그 굳은 사람에게 소금이 되어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며 생각해 보세요! 누가 내게는 땅에 해당됩니까? 대리석 같은 사람, 석회질이 많은 사람… 주님에 대해 신뢰의 싹이 나지 않을 사람… 그 사람에게 소금이 되고 그 땅의 소금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 내가 왜 그런 고생을 하고 수고를 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 이후입니다. 이게 우리에게 약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지식으로 알고 잘 해석하고 설교에 은혜를 받았다는 것만으로 성경대로 산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종교심은 많은데 생활이 없으니까 소금은 맛을 잃었고 교회는 가치를 잃은 소금창고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인성교육이 안 되었다고 합니다. 실력은 늘고 똑똑한데 도덕이 없고 버릇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학, 성공, 출세를 위해 너무 지식, 성적위주의 교육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인성교육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얼마나 잘 알아요? 빠삭하잖아요? 설교자들이 참 힘들어요! 그러면 아는 만큼 살고 있나요? 설교를 그만큼 들었으면 성자(聖者) 소리 들어야 하지 않나요? 성자 소리는 그냥 듣나요? 땅의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녹이기 힘든 사람들… 그들까지 녹이려는 애씀이 있어야 성화(聖化)가 나오고 성자(聖者)가 됩니다. 땅의 소금은 생활신앙, 생활기독교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땅의 소금이 되라! 해외선교 명령이 아닙니다. 국내선교, 관계전도에 해당됩니다. 왜 시내 큰 교회를 선호합니까? 시설이 좋고 시스템이 좋고 설교도 좋지만 동네에서 교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은 거예요. 왜 숨겨요? 자신이 없거나 믿음대로 살기 귀찮은 거예요! 이런 사람에게 주님은 세상의 소금까지는 안 되어도 좋으니 옆 주변 땅에 소금이 되라는 거예요!
땅은 친구이고 동네이고 사무실입니다. 주변에서 본이 되고 사랑을 보이고 친절하고 정직해서… 참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다르다, 언론에 교인들 욕하는 보도가 나와도 교인들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기독교 변호하는 사람들을 만들고 점차 마음 땅이 부드러워서 예수님을 믿도록 인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관계전도요 인격전도요 땅의 소금입니다.
주님은 은혜를 받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땅의 소금이 되라고 합니다. 소금은 1400가지 용도가 있다네요! 굉장합니다. 소금이 그냥 있으면 1400개의 용도가 나오나요? 아무 맛도 낼 수 없습니다. 소금의 특징이 녹아짐입니다. 심심한 물맛에 소금 맛이 나는 것은 소금이 녹아내렸기 때문입니다. 소금이 녹아내리는 것만큼 음식 맛이 납니다.
소금은 자기 성질을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음식을 맛나게 만들고 그러면서도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습니다. 자기는 완전히 녹아 형체도 모양도 없어지면서도 음식에 배어 맛을 내게 하는 소금의 역할! 자기모양, 자기역할은 묻힘을 통해, 자기 부인을 통해, 내려놓음을 통해 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땅의 소금이니… 라고 하실 때는 사람들 가운데서 녹아내릴 것을 명령합니다. 신자라 하면서도 자기희생이 없으면 굳은 마음을 녹일 수 없습니다. 남을 녹이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녹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 주변이 예수님의 씨앗을 틔울 옥토가 됩니다.
생활에서 녹아져 내리는 사람들… 그게 8복의 내용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긍휼히 여기는 사람… 청결하게 하는 사람… 화평케 하는 사람… 믿음을 위해 박해를 자처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되어야 내 주변의 석회질의 땅과 같은 사람들을 변화되고 옥토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인격전도입니다.
우리끼리 교회 안에서만 예배하고 잘 지내고 나가서는 까칠한 사람… 이기적이고 계산적이면 어떻게 세상의 땅이 변하고 복음의 씨! 예수님의 정신이 돋아나겠어요? 오히려 나 때문에 세상은 더 굳어지고 마음들이 석회질, 석회암이 됩니다. 희망이 없는 것이지요.
팔레스타인 지방의 소금은 암염, 돌소금입니다. 원래 소금은 귀해서 물물교환에서는 최고의 가치였고 화폐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고대 로마에서는 군대월급을 소금으로 지불하기도 했습니다. 급료(salary)나 병사(soldier)가 라틴어로 소금(salt)을 가리키는 ‘sal’에 어원을 둔 까닭입니다. 소금은 금(金)의 가치에 비견해서 ‘하얀 금’ ‘작은 금’이라 불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라는 말씀은 너희는 엄청 귀한 존재다, 라는 표현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귀한 존재입니다. 귀한 존재이기에 높은 자존감으로 가치 있게, 제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게 의인의 삶입니다.
유대인은 스스로를 소금처럼 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자처합니다. 왜? 선민이니까! 그들이 얼마나 자존감이 높은가? 하나님께서 세계에 10개의 아름다움을 주셨는데 9개가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주셨다고 합니다. 인류에게 주신 10개의 보석 중에서 아홉 개는 유대인들에게 맡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자부심입니까?
그래서 유대인은 자기들은 부(富)와 재물이 없어지지 않고 항상 유지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부와 재물을 항상 주시는가? 자선을 베풀기 위한 재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소금으로 인식하는 유대인은 구제에 앞장을 서는 사람입니다. 유대인에게 최고로 가치 있는 의인은 누구인가? 구제를 하는 유대인입니다.
유대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신하에게 세 친구가 있습니다. 잘 나갈 때는 모두 좋은 친구였습니다. 왕이 신하에게 입궁(入宮)을 명했습니다. 느낌이 안 좋습니다. 그래서 세 친구에게 동행을 청했습니다. 한 친구는 아예 손사래를 쳤고, 한 친구는 왕궁 문 앞까지만 동행한 후 들어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마지막 친구는 임금 앞에까지 가서 이 친구는 결코 그런 친구가 아니다, 해명하고 좋은 선행을 많이 했다, 보증해 주었습니다.
세 친구가 누구인가? 돈과 배우자와 선행입니다. 죽음이라는 호출이 왔을 때 돈은 한 푼도 동행하지 않습니다. 배우자는 무덤 앞까지는 동행합니다. 하나님 앞에까지 동행하는 친구는 누구인가, 선행입니다. 최고의 선행이 구제입니다. 하나님이 너 어떻게 살았나? 하면 구제가 변호해 줍니다. 이 사람은 이런저런 좋은 일, 선행, 구제를 행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구제-자선을 최고의 가치, 최고의 종교선행으로 알았습니다.
구제 중에서도 최고의 자선은 동족들에게… 동족 중에서도 고아들과 홀로된 여인들에게… 다음에는 나그네들에게… 이런 순서로 구제를 한 것을 최고로 알았습니다. 그래야 아브라함의 아들로 인정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식을 세상에 보이라는 촉구입니다. 땅에서 선행하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 맛을 잃어버리고 쓸모없는 신자, 형식적인 신자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고대인이 사용하던 소금은 소금물을 증류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염분이 있는 늪지에서 추출되어 불순물이 많이 섞였습니다. 진짜 소금은 불순물보다 쉽게 녹기에 용해되어 소금이 추출되고 나면 나머지는 쓸모없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짠맛을 잃은 소금은 평평한 지붕의 흙 위에 뿌려집니다. 소금 때문에 흙은 더 단단해지고 새는 구멍이 생기지 않습니다. 역청 역할을 합니다. 지붕이 운동장이나 공공집회 장소도 되기에 소금은 사람에게 밟힙니다.
이런 짠맛을 잃은 소금이 된다면 아무 맛이 없어지고 효용성이 없는데 무슨 가치가 있겠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건의 맛을 잃으면 세상은 어디에서 경건의 맛을 보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의 맛을 잃으면 세상은 어디에서 은혜의 맛을 보겠느냐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부드럽게 되려면 녹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구제하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몇 달 전에, <아름다운재단>이 전국 성인남녀 1,029명을 일대일 면접 조사한 결과, 기독교인들의 기부(헌금·경조사비 제외) 및 자원봉사 참여율이 높은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천주교 68%, 기독교 61%입니다. 선교헌금… 액수를 생각하면 우리가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구제를 통해 로마가톨릭은 교세증가가 되는데 우리는 왜 안 되는가? 소금이 녹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부와 구제를 지나치게 개교회 전도로 목적하고 삶에서 인격에서는 맛을 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제는 많이 하되 땅의 소금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걸 우리가 극복해야 하고 우리교회가 극복해야 제대로 된 땅의 소금이 됩니다.
결론
유대인은 배교했다가 돌아오면 회당 입구에 눕습니다. 사람들은 회당으로 들어가며 사정없이 배교자를 밟았습니다. 배교자는 조금도 불평하지 않고 수모와 고통을 감당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런 관습을 받아들였습니다. 교회서 제적된 자가 다시 자격을 얻으려면 교회 문에 누워 "나는 맛을 잃은 소금이니 나를 밟고 지나가시오!" 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런 심정으로 교회를 출입할 때 우리 교회의 문이 한층 맛있는 소금으로, 능력 있는 예수의 소금교인으로 만들어 내고 우리교회와 내가, 한국교회가 더욱 가치 있게 쓰임 받는 땅의 소금이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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