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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로드발에서 나가라!(사무엘하 9:1~8)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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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발에서 나가라!

사무엘하 9장 1~8절

 서론

 

오늘 우리교회 설립 29주년 주일입니다. 1984년 9월 29일, 30년 전 같은 날 딱 오늘 설립예배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예배당과 좋은 여러분들을 만나 행복한 목회가 되게 하시니 하나님의 은혜가 분에 넘칩니다. 그래서 제가, 내 잔이 넘치나이다…는 시편 23의 성구를 좋아합니다. 누구는 아직도 교회 부흥에, 인원수에 성이 차지 않고 배고프다고 하는데…, 저는 예배당만 보면, 여러분만 보면 배가 불러요. 원래 제가 배가 좀 나왔잖아요?

 

어디서들 오신 거예요? 30년을 함께 해온 분들부터 지난주일에 등록하신 김집사님까지 모두 사랑스럽고 감사해요. 모두 잘되세요! 교회만 잘되고 여러분이 안 되면 제가 미안하고… 뭐가 기쁘겠어요? 여러분이 잘 되어야 목회가 보람 있는 것이지요! 모두 잘 될 거지요? 

1. 로드발의 늘빛교회

본문에 사울 왕의 손자이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등장합니다. 정권이 유지만 되었어도 이스라엘 3대 왕이 될 왕자입니다. 할아버지 사울 왕, 왕위계승자 아버지 요나단이 전쟁에 나갔다 한 날 동시에 전사했습니다. 왕궁이 위기에 처하자 유모가 므비보셋을 안고 달아나다 발을 헛딛고… 그 사고로 발목이 부러져 장애인이 됩니다(삼하 4:4). 당시 다섯 살.

 

그날 이후, 므비보셋은 작은 마을 로드발에 숨어 살았습니다. '로드발'은 '목초가 없다'는 뜻으로 황폐하고 척박한 지역입니다. 왕실 감시가 미치지 않는 유배지 같은 곳이지요! 굳이 심리학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 정도면 밝게 성장할 수 없습니다. 사울 왕손의 신분을 숨겼기에 두려움에 하루도 편히 살지 못했습니다. 두 발은 절고… 장애인에 대한 인권이 있나요, 복지 혜택이 있나요? 남의 집에 얹혀 먹고 살아가니, 자존감은 바닥입니다. 자신을 8절, 죽은 개 같은 나를…. 똥개로 여기는 마음에는 증오, 미움, 보복, 원수, 혁명입니다. 사랑, 은혜, 용서라는 단어들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당연히 피해의식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므비보셋 왕자가 5세 때 로드빌로 숨어들어 지금 한 아들의 아버지가 됩니다(12절). 신분을 감춘 채 결혼하고 아들 낳고 그만큼이라도 살았던 것은 마길의 도움입니다.

 

4절, “왕이 그에게 말하되 그가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여러분에게는 늘빛교회가 로드발이 아닙니까? 사업하다 실패해서 강서구까지 밀려와 우리교회를 알았다면 로드발입니다. 이전교회에서 상처를 받아 떠나 아픈 마음으로 우리교회를 알고 숨었다면 늘빛교회가 로드발입니다.

 

인생의 피신처 로드발! 우리교회가 인생의 로드발이 되었으면 합니다. 인생의 거센 풍랑을 만나 달아났던 5살짜리배기가 결혼하고 아들도 낳고… 그렇게라도 살 수 있는 로드발, 우리교회가 21세기의 그런 교회로 남았으면 합니다.

 

다윗도 오랜 세월 쫓기며 아둘람 굴에 정착했습니다! 다윗 소문을 듣고 하나둘 몰려옵니다. 환난 당하고 빚진 자, 원통한 자들…(삼상 22:2). 그들에겐 아둘람 굴이 로드발입니다.

로드발의 므비보셋, 화병으로 사람 노릇 못하지요! 왕자가 몸이 망가지고 피해의식 속에서 살아가니 술주정뱅이거나 폐인이 되었을 거예요. 그럼에도 마길의 도움으로 살아났습니다. 

 

우리 늘빛교회 로드발에도 마길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로드발이 숨어있기에 좋아도 마길이 없었다면 므비보셋은 일어나지 못했을 거예요. 마길이 있었기에 몰락한 왕손, 장애인이라는 자격지심에도 결혼하고 나름대로 살아왔던 것입니다. 로드발이 있고 로드발의 마길이 있기에 므비보셋은 혹독한 자기운명을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사람을 키우는 것이 아니에요. 서기관들만 인물을 키우는 것이 아니에요! 로드발에서도 자기 정체성을 찾아주는 일을 훌륭하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로드발은 깨어진 자들의 사명감당 기록이고… 깨어진 사람들이 모여 하는 사역이 우리의 미션입니다.

 

물지게꾼이 막대기 양쪽에 물동이를 지고 가는데 하나는 흠이 없고 하나는 금이 갔습니다. 흠이 없는 물동이는 가득한 물을 자랑했고 임무 수행에 뿌듯했습니다. 금이 간 물동이는 너무 물을 많이 흘려 수치스럽고 슬퍼했습니다. 금이 간 물동이가 물지게꾼에게 말했어요.

 

“제가 한심해요! 내가 금이 가서 지난 2년 동안 늘 반둥이의 물밖에 드리지 못했어요. 당신은 열심히 물을 날랐는데 깨진 나 때문에 일한만큼의 대가를 얻지 못했어요. 죄송해요”

“그러냐? 내가 주인집까지 가는 동안 길가에 피어 있는 아름다운 꽃들을 보렴.”

 

길가를 보았더니, 좌우 변에 들풀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습니다.

“깨진 네가 흘리는 물로 들꽃들은 자랐다. 온전한 물동이는 주인집 상(床)에 시원한 물을 주었고 너는 물을 흘렸기에 길가의 꽃들을 피웠고 주인 상에 꽃들로 장식할 수 있었다.”

 

그래요! 유능한 자만 므비보셋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로드발의 마길도 왕자 므비보셋을 만들어 냈습니다. 실패한 자도, 내놓을만한 은사도 재능이 없어도 깨어진 내 상처의 물을 통해 우리교회의 누군가는 힘을 얻고 있어요! 그게 교회이고 늘빛교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로드발의 므비보셋을 찾아내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힘을 내라고… 그러면 깨어진 나도 우리교회가 마길이 되는 거예요! 알았지요?

2. 예루살렘의 늘빛교회

그렇다고 언제까지 로드발에서 신분을 숨긴 채 죽은 개 같은 나를… 똥개로 자학하며 살아갈 거예요? 내가 개같이 살았으니 자식들에게도 자학의 대물림을 거예요? 내가 로드발에서 살았으니 자식들도 로드발에서 살면 됩니까? 얻어먹고 살았으니 자식들도 얻어먹는 대물림을 할 것입니까? 할아버지 아버지 원수만을 증오하다 증오를 대물림할 거예요? 로드발에서 나와야 해요. 로드발에서의 지역적인 탈출, 다른 장소로의 이동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로드발에서 살더라도 내 신분을 더 이상 숨기지 말아야 합니다. 익명성으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사울 왕의 손자다! 나는 요나단 왕자의 아들이다! 나는 지금 왕의 처조카다! 미갈 왕비가 내 고모다! 그러면 죽지 않냐고요? 다윗 왕이 그런 사람입니까? 다윗은 요나단과 맹약한 사람입니다. 내가 무슨 일이 생기면 내 자식을 네가 책임지고 네가 무슨 일이 생기면 네 자식을 내가 책임진다… 이렇게 생명을 나눈 우정의 관계입니다.

 

므비보셋이 이걸 모릅니다. 아버지 친구 다윗을 알아야 하는데 마길 밖에 몰랐어요. 다윗의 도움을 받고 살아야 하는데 마길의 도움 밖에! 다윗의 힘으로 살아야 하는데 마길의 힘 밖에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사냥개로 살 사람이 똥개로 낮은 자존감으로 살고 있습니다.

 

늘빛교회 30년! 로드발로 남으면 안 됩니다. 마길의 도움이나 받으며 익명성으로 숨어있으면 안 됩니다. 이제는 내 이름을 걸고 살아야 합니다, 남의 간증이 아니라 내 간증이 있고 남의 눈물이 아니라 내 눈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행복한 자아상을 가져야 해요!

 

어떻게 그런 므비보셋이 됩니까? 마길을 넘어 다윗을 만나야 합니다. 다윗 안에서 행복한 자아상과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5절, 다윗이 므비보셋을 찾아 사람을 보냈습니다.  

6절,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이 날은 므비보셋 인생에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였습니다. 터닝 포인트는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을만한 사건, 충격…으로 무엇인가 바뀌는 시점, 갈림길, 전환점인 셈이지요!

 

13절,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사니라…”

 

므비보셋에게 뭐가 달라졌나요? 로드발에서 예루살렘으로 나왔습니다. 유배지에서 왕실로 나왔습니다. 몰락 왕손에서 다윗의 왕자가 되었습니다. 이름 없이 살다 이름을 찾았습니다.

 

누구를 만나니까? 마길을 만나면 먹고는 살아요! 자기 형편을 이해해 주는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들까지 낳고 살기는 해요! 그러나 그건 사는 게 아닙니다. 남의 도움이나 받고 이름을 숨기며 능력을 숨기며 사는 인생이 무슨 대물림해 줄 성공적 삶입니까?

 

므비보셋은 다윗을 만나야 합니다. 다윗을 만날 때,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사니라…. 다윗은 누구예요? 아버지와 단짝이고 고모부입니다. 지금 미갈 왕비가 누구입니까? 내 고모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왕의 친구 아들이요 왕의 처조카요 왕비의 당조카입니다. 자기를 자각합니다. 왕자의 신분을 자각합니다. 엄청난 신분의 변화입니다.

 

13절, 그는 두 발을 다 절더라…

 

두 발 저는 것이 왕의 조카요 왕자라는! 요나단의 아들이라는 그의 자존감까지 절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다윗을 만나니 먹고 사는 문제는 물론 행복한 자존감 왕자 자존감으로 살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니? 다윗을 만나니!

 

아둘람 굴로 도망 왔던 사람들… 환난 당하고 빚진 자, 원통한 자들입니다. 아둘람굴이 로드발이었어요. 그러나 다윗을 만났을 때 더 이상 피해자들이 아닙니다. 쫓기는 자들이 아닙니다. 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다윗을 넘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비전과 만났습니다. 아둘람굴에 살면서 아둘람 꿈을 꾸지 않고 예루살렘 꿈을 꾸었습니다. 이것이 비전의 힘이고 하나님의 힘입니다. 훗날, 다윗의 정권 하에 그들은 익명을 버리고 자기 이름을 걸고 삽니다. 이것이 늘빛교회가 모두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로드발이라는 작은 마을에 숨어살던 므비보셋에게 왕의 신하가 찾아왔습니다. 당시에도 정보력이 대단했던 것 같아요. 신분도, 이름도 숨기며 살아왔던 그를 어떻게 찾아냈을까요?  

 

다윗 왕 앞에 서게 된 므비보셋-죽게 될 일만 남았습니다. 그는 최악밖에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그러기에 다윗 왕 앞에서 떨었습니다. 사울에게 다윗이 얼마나 박해를 받았어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을 므비보셋에게 이제 남아있는 것은 보복이요 죽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 다윗 앞에 나서게 되었을 때 6절, 왕은 그의 이름을 불러줍니다.

 

“므비보셋이여!” 므비보셋! 그것은 치욕과 수치의 이름, 위험한 신분입니다. 그런데 지금 왕의 입에서 므비보셋이여! 그것도 사랑스럽게! 정답게 미소를 띠고!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

 

그는 더 이상 이름 없는 숨은 자도 아니고 피해의식에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제 므비보셋이라는 이름을 되찾았습니다. 그동안 므비보셋은 저주에 가까웠지만 다윗의 입에서 이름이 불려지는 순간 더 이상 반역의 이름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 받는 이름입니다.

 

7절,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즉, “겁낼 것 없다!”는 것입니다.

 

므비보셋에게 다윗은 겁나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숨어살지 않았습니까? 겁내지 말라는 사랑의 말에 므비보셋은 증오와 원한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맞을 준비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두렵지 않게 하는 거예요. 나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나 때문에 마음 상하지 않게 해주는 거예요. 사랑이 확인되었을 때 므비보셋은 로드발 촌뜨기에서 예루살렘 왕자가 됩니다. 왕자 식탁에서 왕의 음식을 먹습니다. 사랑이 그를 일으킨 것입니다.

 

이제 므비보셋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몸은 예루살렘 왕궁에 있지만 마음은 로드발에서 살아야 합니까? 손은 왕의 음식을 먹으면서 마음의 칼은 왕을 겨누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오늘 나를 있게 해 준 것은 다윗 왕의 은혜다! 은혜의 생애를 살아야 합니다. 신분을 숨기고 두려워하던 므비보셋은 더 이상 초라하지 않고 왕자의 상(床)에서 행복한 만찬에 참석하고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 다윗 왕권의 일원으로 힘을 보태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로드발에서 나온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름을 불러주고 두려워하지 않게 해주고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는 일! 이게 건물보다 사람이 더 아름다운 교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지난 30년 달려왔던 우리교회의 목표이고 앞으로 달려갈 떠 다른 30년의 세월입니다.

 

우리교회가 큰 역할을 해야만 사명을 감당한다고 자부하지 마세요! 우리교인들에게 서로 잘해주는 것이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잘해주는 것이고 넘어진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대한민국 모두를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예배당에 물이 샜을 때 양동이 하나 갖다 바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고 연세 많으신 권사님들 손잡고 계단을 오르게 하는 친절이 늘빛교회를 크게 섬기는 일입니다. 감동은 큰 것에서 나오지 않고 세세한 일상에서 하찮은 것에서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교회 본질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실업자 아버지는 가난해서 지붕이 새도 고치지 못했습니다. 안방에 물이 새자 난처해하던 아버지가 민망한 얼굴로 나가더니 늦도록 돌아오지 않습니다. 식구들이 찾아다니다 지붕에 우산 쓰고 쪼그린 것을 발견했어요. 엄마가“모른 체 해라!”아이들을 끌고 들어왔습니다.

 

아버지는 비가 새는 지붕을 고칠 돈이 없어 우산을 쓰고 물이 새지 않도록 합니다. 엄마는 남편의 자존심, 아빠의 자존심을 세워주려는 배려를 합니다. 이 아이가 자라 무엇을 배우겠어요? 아버지의 아픔과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자존심을 상처주지 않으려 했던 엄마의 배려에요! 그러면 이 아이는 로드발에서 나올 수 있어요.

 

우리교회는 엄마와 같은 배려심을 가르치고 배우는 곳입니다. 우리교회가 로드발의 마길이 되어야 해요! 아둘람굴의 다윗처럼 찾아오고 손을 내밀고 두려워하지 않도록 해주어야 해요! 인생에서 얻어 터져 므비보셋처럼 절뚝이는 상처의 인생들이 비록 두 발은 절었지만 영혼은 자유인으로 살았던 거듭난 므비보셋처럼 그런 행복한 자화상을 지닌 늘빛의 므비보셋을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교회에 주어진 미션, 사명입니다. 우리가 이걸 놓치면 안 돼요! 

결론

6.25가 끝났을 무렵, 늦게 신학을 시작한 전도사님이 시골에 작은 예배당을 짓고 등불 하나를 걸아 놓았어요. 기차통학으로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자식을 위해서입니다. 아들은 밤이 늦게 시골길을 걸어오다가 멀리 아른거리는 등불을 보며 아직도 아버지는 깨어있구나, 집에 가면 따뜻한 밥이 있고 사랑이 있구나… 하는 마음으로 두려움을 떨쳐냈습니다.

늦깎이 시골 전도사님은 한 사람을 위해 등불을 걸었어요. 내가 아니면 길을 잃고 방황할 사람, 어둠에서 두려움으로 떨고 있을 한 사람을 위해 등불을 켜는 심정의 목회였습니다.

 

최완택씨가 쓴 <아름다운 순간>에서 이 글을 읽는 순간, 한 사람을 위해 등불을 켜는 심정으로! 바로 그런 목회를 꿈꾸며 30년 전에 늘빛교회를 세웠습니다. 이제는 한 사람을 위하여 등불을 건다! 그 슬로건이 부끄럽지만 그래도 제 마음은 설교를 통해 여러분을 천국입장에만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기술을 익히고 이기는 상상력을 품도록 설교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오늘 로드발의 이야기는 제 목회관과 딱 맞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대판 므비보셋입니다. 마음의 로드발! 외로운 로드발에서 나와야 합니다. 내가 있을 자리 예루살렘에서 밝게 살아야 합니다. 낮은 자존감을 버리고 높은 자존감… 눈치 보던 삶에서 우러러보는 삶으로, 빈궁한 삶에서 풍요로운 왕의 상(床)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된 인생이 됩니다. 지난 30년 여러분들로 정말 행복했습니다. 모두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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