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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위치를 바꾸라!(누가복음 19:1~10)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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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중고서적에서

 

품절. 중고서적에서

위치를 바꾸라!

누가복음 19장 1~10절

서론 

몇 달 전, 북한에서 리경심이라는 20대 교통경찰관이 영웅칭호를 받았습니다. 북한에서 영웅칭호는 최고 훈장으로 영웅칭호를 받으면 평생 먹고 사는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20대 여경이 영웅칭호를 받자 우리 정부와 언론이 추측성 보도를 많이 했습니다. 김정은이 탄 차량을 교통사고로 위장해서 암살하려는 위급한 상황을 여경이 막아냈다…? 그래서 암살을 미연에 막았기 때문에 생존자들에게는 거의 주지 않는 영웅칭호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모란봉구역 사거리에서 불이 나자 교통을 정리하던 여경이 주체사상 구호를 적은 플래카드를 잽싸게 챙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훈장을 기준하면 국민훈장을 받은 셈입니다. 그러니 그런 일로 훈장을? 북한 군부가 부굴부굴… 언제 폭발할지 모릅니다.

 

본문도 리경심처럼 사소한 일로 대박이 터진 이야기입니다, 나무에 올라갔다 내려온 것 외에는 별로 없는데 그 사람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세계인은 세종대왕 이순신은 몰라도 삭개오는 압니다. 성경이 거의 세계적인 언어로 번역되었기에 삭개오는 국제적 유명인사입니다.

 

삭개오 이야기는 현대인의 상실을 다룹니다. 삭개오는 부자고 세력도 얻었지만 풍요함 속에 상실, 소외, 고독, 낮은 자존감…으로 힘들었던 사람입니다. 이랬던 사람이 행복한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이야기는 요즘 신조어로 로망입니다. 로망은 로맨스라는 말보다는 무언가 원대하고 대단한 것을 갈구하고 욕망하는 심리적 상태입니다.  

 

삭개오는 모든 것을 갖춘 성공한 현대인입니다. 꿈을 이룬 사람이지요! 나라를 잃은 민족임에도 여리고 세관장입니다. 여리고는 대추야자열매가 주렁주렁 열릴 만큼 땅이 비옥하고 시원한 종려나무 그늘들이 많아 종려마을이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향나무들은 몇 마일까지 향을 풍겼다고 합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이고 요단 동쪽으로 가는 교통 요충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큰 수입원이 되고 권력지향의 인물들이 모여 사는 좋은 성읍입니다. 미국으로 말하면 로스앤젤레스의 고급주택가 비버리힐스입니다.

 

삭개오는 이런 지역의 고위공무원입니다. 돈이 있고 권력이 있고… 돈과 권력 갖고 안 될 일이 뭐가 있습니까? 흔히 검은 거래를 말할 때 사바사바라고 합니다. 사바는 일본어로 고등어입니다. 맨 손으로 가서 안 되는 일도 고등어 두 마리를 갖다 주니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바사바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맞습니까?

 

2절, 삭개오는 세리장이요 부자라….

 

성공했고 명예도 얻었습니다. 아름다운 아내, 미래가 있는 아이들… 풍족한 씀씀이… 뭐가 아쉽겠어요? 그러나 성경의 삭개오는 상실의 대명사입니다. 우리 주님은 삭개오와의 대면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절, “…잃어버린 자를…”

 

세상은 삭개오를 부러운 눈으로 보지만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로 보십니다. 삭개오는 동족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의 돈을 로마에 갖다 바치고 착취를 일삼았기에 세리는 매국노입니다. 그런 부자이기에 왕따를 당합니다. 그래서 동족이 없는, 동족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삭개오는 종교적으로 잃어버린 자입니다. 삭개오의 뜻은 '청결한 사람' '의로운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청결한 사람, 의로운 사람… 율법에 정통한 사람으로 살라고 종교적 이름을 준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더러운 사람, 죄인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유대사회에서는 창기와 세리를 등류로 봅니다. 창기는 육체를 파는 죄인, 세리는 정신을 파는 죄인입니다. 그러니 삭개오가 부(富)와 권력이 있음에도 허전하고 수치감으로 살았고 기쁨도 잃어버린, 그는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그는 종교를 잃어버리고 나아가 인생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풍요로움과 행복 수치는 같이 올라가야 합니다. 돈은 벌어 부자가 되는데 마음이 허하고 상실감에 빠져있다면 고장입니다. 신분은 올라가는데 기쁨이 없다면 그것도 고장입니다.

 

 오늘 우리시대에도 삭개오들이 많습니다. 그런 삭개오들이 가면을 쓰고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갖추고 행복하게 웃어도 공허함과 외로움이 있습니다. 군중들 속의 외로움… 풍요 속의 빈곤… 뭔가 잃어버린 대한민국의 삭개오입니다.

 

이런 삭개오에게 여리고에 오신 예수님 소문이 들렸습니다. 예수… 종교인입니다. 종교인이라면 삭개오와는 피차에 경멸지간입니다. 멀쩡한 삭개오에게 죄인 명칭을 갖다 붙인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들은 종교인입니다. 앞에서는 세금을 깎아달라고 아부하면서 돌아서면 삭개오를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이중 잣대에 종교인이라면 상대하고 싶지 않는 부류입니다.

 

그럼에도 삭개오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3절, 예수께서 어떤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하되… 믿음은 호기심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누구일까? 교회는 어떤 곳일까… 이런 호기심에서 믿음은 출발됩니다. 이것이 제대로 구원으로 이어진다면 거룩한 호기심이 될 것입니다.

 

삭개오의 호기심은 막연한 호기심은 아닙니다. 그는 사전에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들었습니다. 18장 9절 이하… 바리새인과 세리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자기의(義)를 꾸짖었습니다. 내 믿음만이 최고이고 남의 인격을 무시하는…

 

11절,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그런 인격모독을 꾸짖은 것입니다. 오히려 세리를 칭찬합니다.

 

14절, 저 바리새인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이제껏 이런 랍비는 없었습니다. 당사자 세리에게 당시 사정을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삭개오가 얼마나 감동과 충격을 받았을까요? 그래서 삭개오는 그 예수가 여리고에 오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하던 일 제쳐놓고 달려간 것입니다.

그러니 좋은 말들을 퍼트리세요! 주님에 대해… 한국교회에 대해… 우리교회의 직분자들에 대해… 좋은 분들이라고… 좋은 교회라고… 좋은 목사님이라고… 상실감을 갖고 사는 누군가가 그 말을 염두에 두었다가 힘들 때에 슬며시 예수님 만나러 나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상실감 회복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는 키가 작았습니다. 키가 작으면 예수님 오셨다는 소문에 남들보다 서둘러야 하는데 돈을 버는 일에는 앞섰지만 인생의 외로움과 고독감을 해결하는 일에는 투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가 누구입니까? 별의별 비판을 받으면서도 끄떡없는 사람! 신체적인 핸디캡을 갖고 있기에 오히려 그걸 발판삼아 부자가 되고 권력을 얻은 의지의 사나이가 아닙니까? 그냥 돌아갔다면 천하의 삭개오가 아닙니다.

 

삭개오는 돌무화과나무, 개역성경에는 뽕나무로 올라갑니다. 그건 놀림의 대상입니다. 모두들 삭개오를 보는 순간, 저 땅개 봐라… 하면서 놀릴게 뻔합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올라갑니다. 어린시절 놀림을 당하고 뒤에서 욕하는 것은 삭개오에게 일상입니다. 놀림 받는 것이 너무 익숙해서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만큼 그의 상실과 수치감과 외로움은 절박했습니다.

 

지금 내가 힘들고 죽겠는데 누가 내 인생 대신 살아줍니까? 내가 힘들다고 무너지고 자살 한다고 누가 내 가족 불쌍하다고 먹여 살려줍니까? 내 인생의 행복은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눈을 딱 감은 심정으로 돌무화과나무에 올라 간 것입니다.

 

믿음생활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믿음생활 할 때 내 믿음을 흔들리게 하는 것은 비신자 남편이고 회사 직원들이고 친척들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예수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교인들 때문에 예수님께 나가지 못합니다. 교인들 때문에 교회의 좋은 점들이 보이지 않고 목사의 설교가 바래지고… 시험에 들 때도 있지만 돌아간다고 그 상실함이 채워집니까?

 

뽕나무에 올라가 조롱의 대상이 된다는 것!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가능합니다. 내 믿음이 자라지 못하는 것은 자존심입니다. 기쁨을 잃은 것도 자존심입니다. 믿음 안에서 자존심을 내려놓은 법을 배워야 합니다. 자존심이 강한 목사들은 견디지 못하고 자주 목회지를 옮깁니다. 그러면 옮길 때마다 상처를 주고 상처를 남김입니다. 힘들더라도 돌무화과나무에 올라 계세요! 그 위에서 자존심 내려놓고 꾹꾹 참으면 주님의 눈에 띄고 주님의 호명을 들을 수 있습니다. 왜냐? 그 돌무화과나무는 삭개오를 위해 오래 전에 심겨진 나무입니다. 모든 교회는 우리의 상실감과 자원하는 즐거움을 회복하기 위해 오래전에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무화과나무에 올라있는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삭개오의 겉모습만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외롭고 갈급한 심령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나무에 오른 삭개오를 보며 이제는 별 짓을 다하는구나… 비웃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것으로 채워지지 않기에 주님으로 채우기를 바라는 그 가련한 갈망을 봅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5절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너라…”

 

어떻게 이름을 아셨을까? 초인적인 분이시니까? 삭개오를 흉보는 소리를 들었겠지요! 나쁜 놈… 매국놈¨ 더러운 놈… 그러나 주님에게는 한 가지 이름밖에 없습니다. 잃어버린 자…

사람들은 삭개오를 나쁜 놈으로 봅니다. 예수님이 보기에 삭개오는 저주 받고 파멸될 사람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자… 그것도 잠시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삭개오는 잠시 잘못된 위치에 있을 뿐입니다. 그의 작은 키가 잘못이 아니라 작은 키를 극복하고자 했던 방법이 잘못입니다. 세리라는 직업이 잘못이 아니라 세리를 이용해서 탐심을 부린 마음이 잘못입니다.

 

사람들은 인격을 공격했지만 예수님은 위치를 지적합니다. 사람들이, 너는 나쁜 놈이다! 했지만 예수님은 너는 잘못 살고 있다! 그걸 지적합니다. 그러니 제 위치로 오라는 것입니다.

 

제 위치가 어디입니까?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아버지가 주신 이름 삭개오! 청결한 사람,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 위치로 돌아가기 위해 빨리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일! 위치를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삭개오를 부르십니다. 

 

5절, 오늘 네 집에 머물겠다… 그 말에 삭개오는 너무 놀랐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6절 급히… 쪼르르… 내려옵니다.

 

이때부터 삭개오의 인생에 정권교체가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는 자원해서 새로운 결단을 합니다. 성령의 은혜이지요!

 

8절, 주여…

얼마나 오랜만에 불러보는 종교적 단어입니까? 주여! 유대인에게는 선생님… 입니다. 그러나 삭개오에게 주여…는 신앙의 호칭입니다. 바리새인의 의(義)가 아니라 세리들에게서도 의(義)를 발견해 내시는 분이라면 주여… 적어도 선지자급 이상은 됩니다. 그런 분이라면 얼마든지 주님이라고 불러드릴 수 있습니다. 

 

8절,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웨슬리는 지갑이 회개하기 전에는 당신의 회개를 믿지 않겠다고 합니다. 지갑을 연다는 삭개오의 말에서 진짜 회심을 봅니다. 당시 랍비들이 제시하는 구제비는 수입의 20%! 삭개오는 훨씬 많은 파격적 액수를 제시합니다. 가난한 이를 배려함은 참 유대인이 된 것입니다. 유대인의 최고 덕목은 자선입니다.

 

8절,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만일… 이라는 가정법은 '속여서 빼앗은 것은 무엇이나', ‘속여서 빼앗은 것은 확실히' '틀림 없이'  4배를 돌려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율법은 부정으로 취한 것을 돌려 줄때에는 1/5을 붙여 상환하라(레 6:5), 도적질은 4배로 갚으라, 규정하라고 명시합니다(출 22:1).

 

율법대로 살겠다는 삭개오는 이제 율법의 아들입니다. 이제 제 위치로 돌아온 것입니다.

우리는 왜 제 위치로 돌아왔음에도 아직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왜 우리의 믿음에 감동을 받지 못합니까? 제 위치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바리새인들의 위치에서 비난하고 정죄하고 나는 대단한 의인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보어햄 박사는 전도집회 신앙 간증에서 했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러 여인들이 간증을 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어서 삶이 달라지고 좋아졌다… 모두들 간증에 참여하거나 아멘! 할렐루야! 하는데 한 여인만 침묵합니다. 보어햄 박사가 간증을 요청하자 고개를 흔듭니다. 강사가 다시 재촉하자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은혜를 간증하는 저들이 내 돈을 빌려갔어요! 그들 때문에 우리 가족은 오늘 굶었어요!”

 

여인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은 받았지만 구원 이후가 없는 것입니다. 여인들은 구세주로는 주님을 영접했지만 생활의 주님으로는 예수님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에서는 내려왔지만 이후의 결단이 없는 것입니다.

 

삭개오, 돌아오니, 어떤가요?

 

6절 …즐거워하며…

어울림, 화목, 기쁨입니다. 상실과 외로움, 수치로 살았던 생애가 위치를 바꿨더니 행복한 것입니다. 제대로 성공자가 된 것입니다.

 

기독교전설은, 훗날 삭개오는 베드로와 동역자하다 가이사랴 감독이 되었다고 합니다. 가룟 유다 대신에 피택된 사도 맛디아가 삭개오다, 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은 지금도 위치에서 이탈한 사람들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위치를 이탈한 사람들… 남들은 나쁘다, 더럽다… 그래도 주님은 사람을 공격하지 않고 그곳에서 내려오라고 합니다. 탐욕에서 내려오고 외톨이에서 내려오고 나무에서도 내려오고… 내려오면 위치를 바로 잡아주십니다. 그러면 상실감을 기쁨과 행복으로 채워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결론

축구경기에 오프사이드(Off-side)라는 반칙용어가 있습니다. 상대방 골대 깊숙이 들어가 대기하거나 볼의 위치보다 상대측 골라인(goal line)에 가까운 위치에서 플레이하는 것입니다. 오프사이드는 위치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프사이드에서 골을 놓으면 나만 반칙이 아니라 골 자체가 무효입니다.

 

삭개오는 인생의 오프사이드의 위치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돈을 벌어도 권력을 얻어도 사람들이 그의 성공의 골을 인정해 주지 않았고 그걸 알았기에 공허하고 외로움을 탔습니다. 자기 인생이 오프사이드에 있는 줄도 모르고 사람들만 미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가성에서 만났던 여인, 남편을 다섯이나 바꿨고 지금도 한 남자와 살고 있지만 인생의 오프사이드였습니다. 그러니 목말랐고 대낮에 물을 길러 나왔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자기 자리를 회복했습니다. 결과는 기쁨으로 마을로 달려가며 메시아를 만났다… 희열을 느꼈고 끊어졌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이어지며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그 여인에게 삭개오가 올라갔던 돌무화과나무는 우물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무화과나무에서…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외로움에 떨고 있는 나, 상실감으로 눈물을 짓는 내게 주님은 내려오라! 합니다. 위치를 바꾸라고 합니다. 생각의 위치, 마음의 위치를 바꾸라고 합니다.

 

이제 주님을 만나세요! 위치를 바꾸세요! 우리도 삭개오처럼 나의 돌무화과나무에서 주님을 만나고 수가성의 여인처럼 우물가에서 주님을 만나 내 인생의 위치를 바로 세우고 성공적인 생애를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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