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일설교

석 달을 섬겨 3백년 축복을(역대상 13:6~14)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8. 4.
반응형

 

 

품절. 중고서적으로

석 달을 섬겨 3백년 축복을

역대상 13장 6~14절

서론 

 

어느 중학교 교실에 이런 급훈(級訓)이 걸렸습니다.

 

<3년 고생해서 30년 먹고 놀래, 3년 놀고 30년 고생할래?>

 

여성도님들이 들으면 기분이 나쁘겠지만, 어느 남학생 교실에는 이런 급훈도 걸렸습니다.

 

<3년 열심히 공부하면 아내 얼굴이 달라진다.>

 

본문도 그런 내용입니다. 30년을 하나님 섬기고도 그냥저냥 살래, 석 달 하나님 잘 섬겨 300년 복을 누릴래? 어떤 이들은 30년을 섬겨도 석 달 복도 없는데 오벧에돔이라는 유대 레위인은 석 달을 법궤를 잘 섬겨 자손만대 복을 누립니다. 로또복권은 당대에 쫄딱 망하지만 하나님을 잘 섬겨서 받는 복은 암만 돈이 많고 복이 많아도 탈이 나지 않습니다.

 

본문은 오벧에돔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잘 모셔 3대가 복을 받은 내용입니다! 법궤는 거룩한 상자로 3백년 이상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안치되어 섬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법궤에서 뜻을 전하고, 백성들과 만나는 장소로 삼았습니다(출 30:6).

 

사울이 왕으로 즉위하기 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쟁에 불리해지자 법궤를 앞세워 나갔다가 빼앗깁니다. 블레셋은 법궤로 재앙이 생기자 돌려보냅니다. 법궤는 아비나답 집에 보관되고 아들 엘르아살이 지켜왔습니다(삼상 7:1).

 

사울은 왕이 되었지만 도통 법궤에 관심이 없습니다. 법궤는 70년 이상 방치된 상태였습니다. 다윗 왕의 최우선 국정과제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일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열정에도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수레로 운반 도중 소가 날뛰고 웃사가 법궤를 잡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웃사를 쳤고 즉사합니다. 너무도 무서운 광경에 다윗은 법궤를 운반할 엄두를 못 내고 일단은 오벧에돔의 집으로 보관하게 합니다. 그랬더니 결과가 11절입니다,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복을 받을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오벧에돔이 법궤를 석 달 섬겨 3대(代), 300년 누릴 복을 받은 것입니다. 집중의 원리입니다. 제대로… 집중해서 잘 믿어야 합니다. 30년을 믿으면서도 석 달 믿은 사람만큼도 못하면 어떻게 성공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1. 힘든 일 감사함으로 자원해서 석 달 섬겨 300년 복을 받았다.

법궤를 운반하다 웃사가 죽자 모두 공포에 빠졌습니다. 법궤는 70년 전에도 재앙을 불러왔었습니다. 전투에서 법궤를 빼앗은 블레셋은 전리품으로 다곤신전에 진열해 놓았습니다. 아침에 가보니 신전 우상들이 목과 팔다리가 부러져 있습니다. 다음 날에도 계속… 뿐만 아니라 백성들 사이에 종기가 생겨 죽어나갔습니다. 그래서 겁이 나서 돌려보냅니다.

 

이번에는 이스라엘에 재앙을 가져오자 모두들 두려워했습니다. 법궤를 잘못 대했다가 일가족이 죽으면… 모시기를 두려워합니다. 다윗도 법궤가 무서웠습니다. 내가 잡았으면 어떨 뻔 했을까? 그래서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갑니다. 오벧에돔은 고핫 자손이기에 법궤를 지킬 자격을 갖춘 사람입니다(26:12, 15). 그는 성소 문지기입니다(역대상 15:21, 24). 그래서 법궤를 호위하던 오벧에돔에게 집으로 모셔가라고 명령했을까요? 

 

내 생각에는… 오벧에돔이 자원한 것 같습니다. 오벧에돔은 고라자손입니다. 고라자손은 광야에서 모세에게 거역했던 250명 두령의 지도자입니다. 왜 모세 형제들만 다 해먹느냐고 거역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땅으로 입을 벌리게 했고 고라자손의 두령들을 모두 삼켜버렸습니다. 천벌을 받은 것입니다.

고라의 후손들… 조상이 천벌을 받은 후손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고라자손을 찬양대로 세웁니다. 성막 문지기로 세웁니다. 가장 불신앙적인 자손들을 가장 성스러운 직임을 맡긴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고라자손들은 많은 고난을 견디었고 용서도 받았고 문지기로 쓰임을 받을 수 있게 배려해 주신 하나님 은혜… 죽음으로 갚으려는 심정입니다. 그래서 법궤문제로 민족이 어려움을 겪자 문지기로 있던 오벧에돔, 내 집에 모시겠다, 자진해서 손을 들었을 것입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남들이 지고가기 싫어하는 것! 남들이 힘들다고 하는 것!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갔더니 그 자식들 루포와 알렉산더기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됩니다. 30년을 믿어도 복을 받지 못했는데 시몬은 30분 십자가를 져서 자손대대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어떻게 석 달 섬기고 긴 복을 받았나요? 30년 믿은 사람들이 구원의 감격도 없고… 싫은 일이라면 쉽게 몸을 빼는데 비록 석 달 밖에 믿지는 못했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남들이 싫어하는 일, 그럼에도 꼭 필요한 일… 그런 일에 기쁨과 감사와 눈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집중 봉사하니 석 달을 믿어도 복을 받습니다! 그런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법대로 바르게 석 달을 잘 보관해서 300년 복을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믿고 힘든 일에도 봉사합니다. 그렇게 30년을 믿었는데도 복을 받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 열심, 자기 성격, 자기 식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섬김는 일에 열정적입니다. 군대와 백성들을 소집하고 악기를 동원합니다.

 

8절,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니라” 

 

대단하지 않습니까? 홉니와 비느하스는 믿음도 없으면서 전쟁터에서 이기려고 법궤를 이용합니다. 하나님을 자기 목적에 이용하는 것!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사울은 아예 관심도 없이 방치하고 말았습니다. 성전에 비가 새는지… 태풍에도 예배당이 어떻게 되는지 종탑은 어떻게 되는지 들여다보지 않고… 관심도 없다면 어떻게 예배당을 통한 복을 받겠어요?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오는 일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 대대적인 국민 축제로 법궤를 모십니다. 하나님께서 비로소 백성들의 중심에 세워집니다. 이게 쉬운 일입니까? 그러면 다윗에게 복을 내리고 다윗의 정권에 복을 내려 더 든든하게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결과는 하나님의 축복은 오벧에돔에게 넘어갑니다.

 

하나님의 심정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방치했을 때도 가만히 있었고 무관심할 때도 계시던 하나님이 왜 정작 불타는 열심으로 일하는 다윗에게는 분노하십니까? 열심은 좋았지만 바르게 섬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법궤를 운반하는 과정에서 7절,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세속화가 들어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 상징이기에 옮기는 방법도 하나님의 규칙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에는 오직 레위인… 그중에서도 고핫 자손들이 ‘어깨로’ 궤를 메어 운반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민 7:9).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이송(移送)합니다. 소가 고핫자손입니까? 당시 베니게부족이나 블레셋부족은 수레로 신상을 옮겼습니다. 다윗도 이방인들이 신상을 옮길 때 사용했던 수단대로 한 것입니다. 다윗의 조치는 하나님의 율법에 위배되는 행동입니다.

 

한국교회는 엄청 열심입니다. 그러나 세속적 방법으로 교회를 경영하고 교인들도 세속적 번영신학과 성공관으로 법궤를 메고 있습니다. 이런 한국교회의 성공과 열심을 우리 주님은 받으실까요? 지금 우리 믿음이 다윗의 수단일까요? 오벧에돔의 신앙일까요?

 

-다윗은 율법의 규정을 알면서도 왜 수레로 운반할까요? 어깨에 메고 먼 길을 걸어갈 고핫 자손을 생각하고 수레로 법궤를 운반했을 것입니다. 편의주의입니다. 신권보다 인권을 우선시하는 인본주의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편의주의가 엄청 교회 안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성경이나 찬송을 들지 않고도… 펴지 않고도 예배를 드릴 최첨단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스스로 성경을 경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편의주의입니다.

 

카터 콜론은 <두려움에 속지 말라>에서 장차는 ‘느낌이 좋은 종교’가 인류의 대표종교가 될 것이라 경고합니다. 기독교도 느낌이 좋은 종교로 떨어지면 존재의미는 사라질 것입니다.    

 

-다윗은 본의 아니게 바른 봉사보다 빠른 봉사를 합니다. 다윗왕은 하나님의 궤를 빨리 옮기기 위해 3만 명 군대와 수레를 동원합니다. 블레셋의 기습공격에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어깨에 메고 가면 고핫자손들이 얼마나 힘들어요? 여기에서 예루살렘까지 13km입니다. 어느 세월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겠어요? 그래서 빨리 이동하기 위해 수레를 이용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열심을 보지 않고 다윗의 반칙을 보신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하고 믿음이 있어도 업사이드에서 들어간 볼은 무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섬김의 손을 내치시고 음악을 그치게 하신 것입니다. 소가 무엇에 걸려 비틀거렸을까요?

 

10절,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그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소들이 날뛰므로 법궤가 떨어지려 하자 손으로 붙잡은 웃사의 행동은 상황으로 볼 때에 잘못이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의거해서 웃사의 행동은 신성모독입니다. 하나님의 궤는 하나님의 상징의 보좌로 누구도 만져서는 안 됩니다(민 4:15). 심지어 거룩한 것이니 들여다보지도 말라 하십니다(민 4:20). 웃사는 엉겁결에 한 행동이지만 하나님의 존재와 율법을 경시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즉사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부지중에 짓는 죄들입니다.

 

신권보다 인권을 강조하는 인본주의, 편리하게 자꾸 신앙생활을 만들어 가는 편의주의, 열심이라면 모든 것이 정당하다는 목적중심의 한국교회에 다윗이 받은 페널티(penalty)는 따끔한 책망이 됩니다. 열심이 전부가 아닙니다. 정도에서 지나치면 열심도 반칙입니다.

 

한국교회는 열심 없는 사람들 때문에 분쟁의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니라 법을 어긴 열성신자들로 진통 중입니다. 오벧에돔은 법에 충실하게 묵묵하게 법궤를 섬겨 3대(代)가 복을 받았습니다. 빠른 성공보다 바른 성공을 해야 합니다. 빠른 통일보다 바른 통일을 해야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빠른 교회부흥보다는 바르게 교회가 부흥해야 참 교회입니다.

3. 석 달을 섬기는 일에 집중해서 300년 복을 받았다.

오벧에돔은 ‘에돔의 섬기는 자’, ‘에돔의 종’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고 섬기는 자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오벧에돔은 이름대로 늘 섬기는 자의 자세로 살아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법궤를 무서워하여 피했을 때 오벧에돔은 목숨을 담보로 섬겼습니다.

 

그냥 섬긴 것이 아닙니다. 집중적으로 섬긴 것입니다. 그랬더니 집중적으로 복을 받았습니다. 자기만 섬긴 것이 아닙니다. 온 가족들이 함께 섬겼습니다. 그랬더니 온 가족이 대대로 복을 받았습니다. 석 달만 섬긴 것이 아닙니다. 역대상 26장에 의하면, 오벧에돔은 법궤를 지키는 것이 복의 비결임을 알고 아예 자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이사를 가서 문지기의 반차가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자손 62명이 다 능력이 있어서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석 달을 하나님을 믿어도 제대로 믿어야 합니다. 레위 사람들의 특징이 한 가지 일에 골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골방에 거주하면서 주야로 자기 직분에 전념(골몰)하므로 다른 일은 하지 아니하였더라.”(대상 9:33)

 

전념(專念)을 개역성경은 ‘골몰’이라고 합니다. 골몰은 집중입니다. 골방에서 한 가지 일에 골몰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오벧에돔이 석 달을 법궤를 보관해서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온 가족이 법궤에 전념했습니다.

 

법궤는 민족의 재앙의 통로도 되고 축복의 통로도 된다는 이중성을 알았습니다. 내가 잘 하고 우리 가정이 잘해서 예루살렘으로 운반하고 안치해서 온 백성들이 두루두루 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바르게 섬기기를 석 달을 하고 났더니 하나님의 노여움이 풀리셔서 복을 부어주시는데 11절,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집중하니 복을 받더라 그 말입니다.

 

유리창은 1년이 있어도 불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볼록렌즈는 검불에 어느 정도만 갖다 대면 불을 냅니다. 빛을 가운데 모으는 집중의 원리 때문입니다. 공부 잘 하는 아이들, 한두 시간을 공부해도 집중합니다.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 아이들, 집중력이 없습니다. 텔레비전 켜놓고 구경하면서 문제를 풀고 공부합니다. 소용이 별로 없습니다.

 

금세기 최고의 작곡가요 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에게 “당신의 음악 성공의 원리는 무엇입니까?” 질문하자 루빈스타인의 대답은 예상외였습니다.

“무관심이지요!”

무관심이라니요? 무슨 뜻이냐? 반문하자 루빈스타인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난 음악 이외의 다른 모든 일에는 무관심합니다.”

 

오직 음악에만 열중하려고 다른 일에는 무관심입니다. 이런 집중의 원리가 있으면 조금 연습해서 많은 성적을 올리고 집중의 원리를 놓치면 밤새도록 공부해도 바닥을 헤맵니다.

 

축구스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언제 축구연습을 합니까? 나는 24시간 축구연습을 합니다. 그러면 언제 잡니까? 나는 자면서도 꿈에서 축구를 합니다. 집중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집중적으로 제대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겨도… 예배를 드려도… 집중의 원리, 마음을 모으고… 생각을 모으고… 열정을 모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석 달을 섬기고서도 300년 대물림축복을 받은 오벧에돔의 축복을 받을 줄 믿습니다! 언제까지 데면데면하게 믿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신앙인이 되겠습니까?

결론

심리학자인 이민규 박사가 <끌리는 사람은 1%가 다르다>는 책을 썼습니다. 비범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많이 다른 것이 아니라 1%가 다릅니다. 항목 중에 신(神)은 마음을, 사람은 겉모습을 먼저 본다는 소제목이 있습니다.

 

다윗과 오벧에돔, 하나님은 무엇을 보셨을까요? 다윗의 섬김이 훨씬 화려합니다. 군대 3만 명을 동원하고 연주단을 갖춘 합창단을 동원합니다. 대단한 규모이고 요란스러운 축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치셨습니다. 세속화, 인본주의 편의주의… 를 보신 것입니다.

 

오벧에돔의 섬김. 그는 남이 힘들어하고 두려워하는 일을 했습니다. 법궤를 집안에 섬겼으니 얼마나 불편합니까? 그래도 바르게 정성껏 섬겼더니 석 달 만에 300년 먹을 축복을 받았습니다. 오벧에돔은 섬기는 대상이 달랐습니다, 섬김의 방법이 달랐습니다. 섬기는 정신이 달랐습니다. 많이 다르지 않고 1%가 달랐습니다. 그래서 석 달을 섬겨 300년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축복을 받으시기를 기원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