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깨어지기 쉬운 반석
마태복음 16장 16~19절
서론
오늘은 12제자 시리이즈 마지막으로 베드로를 선택했습니다. 아무래도 베드로-예수님을 제외한다면 복음서에서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나는 인물입니다. 비참하면서도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12제자 중에 우리 마음에 가장 많이 와 닿고 그를 통해 교훈을 얻는 것도 가장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깨어지기 쉬운 반석입니다.
베드로는 특출한 인물이 못됩니다. 그냥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는 갈릴리 지방의 어부입니다. 고기를 많이 잡으면 그 날은 기분이 좋아서 포도주에 취하고 고기를 잡지 못하면 화가 나서 또 포도주에 취하는, 평범한 갈릴리호수의 어부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반석”이라 부르지만 사실 그는 반석이 아니라 모래알에 불과했습니다. 흔들리고 충동적이고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천방지축이라고나 할까요.
갈릴리바다가 성격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갈릴리바다는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바람한 점 없는 날은 죽은 바다처럼 고요하다 갑자기 돌풍이 불어 배들을 침몰시키고 사망자를 속출하게 하는 이런 바다는 변덕이 심한 갈릴리어부들을 만들어 냈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에 대한 식별력이 없었습니다. 안드레의 소개를 받았지만 별 볼 일없는 사람으로 알았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고기를 많이 잡게 해 주셨을 때 “나를 떠나소서, 내가 죄인입니다!” 한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입니다.
그는 물 위를 걸어보려 했지만 쓸모없는 돌멩이처럼 가라앉았습니다. 이것이 베드로를 대표하는 문장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물위로 걷게 하시려는 데 그는 역부족입니다. 자꾸 갈아 앉습니다.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르는 행동 때문일 것입니다.
때로는 사단이라는 말을 얻어 들었습니다. 얼마나 치명적인 욕설입니까? 만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런 말을 듣고 시험 들어서 제자그룹을 떠났을 것입니다. 원래 주님의 배신자는 베드로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말을 듣고 앙심을 품을 수 있는 상황 아닙니까?
나중에는 최악의 행동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부인했다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딱지를 떼지 못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배신자로, 바울은 박해자라는 딱지를….
베드로의 실수와 허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방인들과 식탁교제를 하다 유대인들이 들어오자 얼른 자리를 피하고 발뺌을 해버리는 연약함을 운명처럼 갖고 있었습니다(갈 2:11). 베드로는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마이클 카드는 <깨어지기 쉬운 반석>이라는 베드로 일대기를 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단단하고 굳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는 여리고 깨어지기 쉬운 반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의 지난 세월은 바로 깨어지기 쉬운 반석이었습니다. 우리는 약했고 다듬어지지 못했고 주님에 대해 알지 못했던 초보딱지였습니다. 지난날 섬겼던 교회에서 시험 당하고 상처 받고 헤매다 늘빛교회에 정착하기도 했습니다. 더 이상 교회를 통해 상처 받기 싫다고, 그래서 멀리서 지켜만 보겠노라고 작정하며 시작을 했습니다. 다시 열심을 내고 그 상처를 극복하기도 했고 또 상처를 받고 떠나기도 했고… 주님께서는 물위를 걷도록 하셨는데 우리는 자꾸만 갈아 앉고…그런 늘빛교회의 베드로가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늘빛교회 안에서 살며 또 한 번의 창립주년을 맞았습니다. 여기에 있는 모든 분들을 보면 하나같이 사랑스럽고 “고운정 미운정”이 아니라 “고운정 또 고운정”으로 여러분을 대할 수 있어 참 감사합니다. 깨어지기 쉬운 목사였기에 여러분들은 저에 대해 마음을 열고 도와주려 했고, 깨어지기 쉬운 우리였기에 서로의 실수와 허물을 용서하면서 오늘 22주년을 맞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깨어지기 쉬운 반석으로 있습니다.
베드로-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친구입니다.
지난 시간에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제자라 했습니다. 예수님의 품에 머리를 기대고 누워있는 요한, 그는 “왕의 남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남자”(?), “선생님의 남자”(?)였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베드로는 얼마나 부러웠을까요?
나중에 베드로는 요한과 파트너가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앉은뱅이를 고쳐주는 역사를 일으킬 때 두 사람은 동역을 합니다. 아주 친밀해졌을 때 이런 말을 나누지 않았을까요?
“자네가 예수님의 품에 안겼을 때 나는 참 부러웠어.”
“왜, 형님도 그렇게 하시지 않고?”
“내 성격 잘 알잖나? 난 여성적인 기질은 딱 질색일세!”
“그렇긴 해요. 그게 형님에게 손해가 많았지요.”
그래요, 마음으로는 안기고 싶고 다정다감하고 싶은데 정작 입에서 말이 나올 때는 퉁명스럽게 말해버리는 사람, 집에 가서는 혼자 후회하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지난 번 국수잔치에서 어느 장로님이 그래요, 교인들을 보면 다정다감하게 인사도 하고 반갑게 해주고 싶은데 어려서부터 유교적인 교육을 받아서 안 된다는 거예요. 반가움을 표현하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속상한 일입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한다고, 신뢰한다고, 제자 삼아 주어서 고맙다고 주님에게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실수하고 본이 되지 못했을 때도 부끄러운 줄은 알았지만, 얼굴을 숙일 줄은 알았지만 요한처럼 웃으면서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그것 못하고 돌아서서는 더 미안하고 속상하고… 그래서 요한처럼 금방 사랑을 표현하고 애정을 표현하는 그런 제자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우리들 중에서도 그런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더 잘 해주고 싶었는데, 반가운 인사를 해주고 싶었는데 성격 때문에 사정 때문에 못하고 돌아서서 속상해 하는 분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베드로에게는 베드로 나름대로 좋은 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비록 주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은 요한에게 넘겼지만 대신 예수님의 든든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본문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그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했습니다. 인간적인 감정으로 말하면 요한에게 “네 사랑 위에 내가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로, 베드로보다는 요한을 12제자의 우위성에 두었을 텐데 주님은 요한보다 베드로를 내세운 것입니다.
지난 3년의 교육기간 동안 수없이 되풀이 되는 멍들고 깨어지고 뒤틀린 베드로-그건 지도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런 지도자에게 교회를 맡긴다는 것은 모험입니다.
베드로를 설명하는 전통적인 형용사-성급함, 고집 셈, 무모함, 완고함… 그를 만화의 주인공처럼 만들어 버릴 여러 실수와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의 가장 강력한 동역자였고 친구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요한도 좋지만 한 남자로서는 인정을 받는 것이 더욱 영향력 있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그런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인정을 받고 주님의 좋은 친구로 삼아주신 비결은 무엇일까요?
* 솔직함-베드로는 솔직한 사람입니다. 그는 실수도 많이 했지만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으면 변명 없이, 여러 말로 자신을 변호하지 않고 그 실수를 인정했습니다. 자기가 제자 중 1번이었지만 소탈하고 정직했습니다.
홈페이지에 어느 분이 늘빛교회 교우의 좋은 점에 대해, ‘투명성’을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모습들이 좋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과 꼭 같습니다. 여러분들의 진실과 성실함, 투명성-이것이 교회의 건강성입니다.
* 휘어짐-베드로는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입니다. 뱃사람에게 이것마저 없으면 안 됩니다. 그는 언제나 자기 식대로 생각했고 말했고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게 아니다, 하면 자존심도 창피도 무릅쓰고 고쳐나가는 그의 모습에서 그는 다듬어지고 비록 더디기는 했지만 실력이 점점 쌓여가면서 조약돌이 반석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성장력-베드로는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로 삼으셨을 때 무엇을 보셨을까요? 바로 그 속에 잠재해 있는 성장의 가능성을 본 것입니다. 성장의 가능성은 겸손입니다. 겸손하기만 하면 속에 있는 은사와 능력들이 얼마든지 계발될 수 있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누가 큰 사람입니까? 성장의 잠재력이 많은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이런 기질들이 주님의 사랑으로 정제되면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친구가 된 것입니다. 제대로 하는 것은 없이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일을 만들어 버리는 사람, 그러면서도 자신은 잘 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멋모르는 베드로-이런 제자가 예수님의 신실한 친구가 된 것은 그의 겸손입니다. 그래서 11세기 성경학자이자 신비주의자인 베르나르 클레보르는, “모든 성자의 위대한 자질은 겸손이다.”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 늘빛교회가 오늘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들이 기꺼이 제 친구가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자와 기질이 다를 수도 있고 신앙의 목표도 다를 수 있지만 늘빛교회 안에서 저도 하나님의 친구가 되려 했고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친구가 되려했기에, 친구의 친구는 친구가 되는 것처럼 우리는 영적인 친구들이 즐거웠고 사랑스러웠고 서로를 신뢰했고 행복한 세월들을 보낼 수 있었고 앞으로도 친밀한 친구들로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친구로 남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저는 이런 노래를 좋아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 되기 원합니다.” “늘빛교회 신실한 친구 되기 원합니다.” 여러분도 아멘! 입니까?
베드로-예수님의 작품입니다.
예수님은 12제자 중에 베드로를 많이 신뢰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에게 유일하게 “그리 마시오!”라고 나무랄 수 있었던 사람, 다양하고 활동적이고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이 사람에게서 주님은 초대교회의 반석을 보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를 처음 만나던 날, 주님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주마.”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3년의 과정을 통해 그를 최고의 지도자로 만들었습니다. 최고의 지도자가 되는 과정은 깨어지고 망가지고 부서지고… 그러면서 주님은 위대한 지도자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깨어진 것을 좋아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완벽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경력을 봅니다. 학벌을 봅니다. 집안을 봅니다. 그의 실력과 능력을 봅니다. 깨어진 적이 있다면, 결점이 됩니다. 금전적으로나 사생활에서나 깨어졌던 목사는 한국교회에서는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릇처럼 깨어진 것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은 깨어진 것을 좋아하십니다. 깨어진 것이 하나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깨어진 것을 복구해내는 복원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의 쓰임 받는 사람들이 되려면 깨어져야 합니다, 자아가, 기질이, 삶이 깨어졌던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깨어진 베드로를 주워 모아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안드레의 인도로 소개 받았으나 싫다고 하던 그를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도피주의자 그에게 죽을 때까지 활동가로 살게 합니다.
*생각 없이 말하던 그의 입술에서 위대한 신앙고백이 나오게 합니다.
*사단이라고 하던 그에게 신실한 친구가 되게 합니다.
*주님을 부인했던 그에게 거꾸로 십자가에서 죽는 용기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손에 붙잡히면 깨어질 수밖에 없음을 바울에게서 배운다면 누구든지 주님의 손에 있으면 깨어진 사람들도 전보다 더 견고하게 반석으로 거듭 날 수 있음을 베드로를 통해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늘빛교회 오랜 역사, 앞으로의 긴 세월은, 오직 단 하나,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고 하나님은 더 아름다운 작품들을 우리를 통해서 만들어 가실 것이라는 기대와 확신입니다. 지금은 깨어진 상태로 여기에 왔지만 우리는 점점 주님의 손으로 회복되고 치료를 받을 것입니다.
지금은 아직도 서툴러 늘 깨어지기 쉬운 반석과 같지만 늘빛교회의 든든한 초석들로 우리는 세워져 갈 것입니다. 이런 기대가 있기에 서로를 기다리며 위대하신 하나님의 조각과정이 어디까지 와 있는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기대를 가져야 될 줄 믿습니다. 이것이 12제자 시리즈를 끝내면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이자 교훈입니다.
결론
요한복음 1:42, “네가 시몬이니…장차 게바라 하리라”. 이 말씀이 오늘의 저를 있게 만들었습니다. 22년 전, 아무도 없는 이 강서구 이 땅에서 늘빛교회라는 간판을 세우면서 오직 한 사람을 위하여 등불을 다는 심정으로 교회를 개척했는데 이제 7백여 명의 가족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되게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조약돌 같았고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형편없었던 저였지만 주님은 이만큼 저를 훈련시켜서 지도자가 되게 하셨고, 깨어지기 쉬운 반석과 같은 여러분들을 모아서 든든한 늘빛교회의 반석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런 주님이기에 우리는 더 그 분을 기대합니다. 그 분께서 만들어 주실 내일의 늘빛교회를 기대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충분히 만족시켜 주셨기에 앞으로도 계속 우리들을 만족시켜 주실 것이며 우리의 잔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늘빛교회의 잔에 채워주실 주님의 축복을 기대하며 영원히 그 분만을 높이며 자랑하며 섬기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합시다.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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