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룟 유다, 예정된 악인
마태복음 26장 47~50절
서론
서울대학교 김형국 교수는 화가인 자기 친구 장욱진 이야기를 쓰면서 책 제목을 <그 사람 좋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저는 예수님의 제자 시리즈 열 번째-가룟 유다를 말하면서 <그 사람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좋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나쁜 사람입니까? 남들이 여러분을 이야기할 때 뜸도 들일 것 없이 “그 사람 좋은 사람이야!”,이런 사람입니까? 아니면, “글쎄, 그 사람 잘 모르겠어!” 이런 사람입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 사람 나쁜 사람이야!”라는 말을 듣는 사람입니까? 저는 늘빛가족 모든 분들이 “아, 그 사람 좋은 사람이야!” “갈수록 점점 더 좋은 사람이야” 라는 말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좋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쁜 사람 이야기입니다. 좋은 사람의 이야기는 쓰기도 좋고 읽기도 좋고, 말하기도 좋고 듣기에도 좋습니다. 뒤끝도 아주 좋아요. 좋은 이야기를 한 사람도 뒤 끝이 좋고 좋은 이야기를 듣고 가는 사람도 뒤끝이 즐거움으로 여운이 남아요. 그러나 나쁜 사람 이야기, 남을 나쁘게 말하는 이야기는, 말하는 사람의 입도 더러워지고 듣는 사람의 귀도 더러워집니다. 뒤끝도 안 좋아요. 어느 분이 그래요. 남을 흉보면 흄을 볼 때는 정말 재미있는데 뒤끝이 너무 안 좋대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평안이고 사단이 주는 것은 근심이라 했으니, 뒤끝이 안 좋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사단은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가룟유다와 함께 있으면, 그의 불만, 불평, 비난…을 듣고 있으면 처음에는 그럴듯하지만 뒤끝이 안 좋아요. 좋은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 나쁜 사람”이라는 뜻이겠지요.
가룟 유다는 배움에 대한 열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유다가 처음에는 잘 믿었다가 나중에 잘못되었다 생각하지만 유다는 처음부터 잘못된 사람입니다. 그는 제대로 주님을 믿은 적이 없습니다. 그는 믿는 척만 했습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사이비”라 합니다. 사이비는, 그런 것 같은데 사실은 아닌 사람입니다.
공자는 <논어>에서 사이비를 “비슷하지만 실은 아닌”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진짜 같은 가짜”라는 것입니다.
가룟유다-3년을 함께 있었습니다. 배우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하는 모습을 보면 진짜예요. 진짜와 똑 같았습니다. 머리 좋은 사람이고 유다지방의 엘리트였기에 갈릴리 지방 출신인 11제자보다는 오히려 더 잘했습니다. 기도도 잘했고 복음증거도 잘 전했고, 돈궤-회계를 맡은 사람이었기에 계산도 반듯하게 보였습니다.
한 여인이 향유를 부었을 때, 우리 돈으로는 수백만 원, 수천만 원에 해당되는 금액입니다. 여인은 그걸 예수님의 머리 위에 쏟아 붓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깝습니까? 모두들 내심으로는 아까워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상황에서 유다는 “이걸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주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제지하고 나섰습니다. 얼마나 생산적인 대안입니까?
이런 사람 진짜 아닙니까?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고 생산적인 곳에 투자하고 돈을 아끼고… 정말 유다는 회계를 맡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가짜였습니다. 진짜 같은 가짜였습니다. 가짜인데 진짜인척 한 것입니다. 그것도 3년을.
왜 그랬을까요? 유다는 배우려는 열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배움은 그 사람의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학습은 상대방에 대한 존경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셨지만 갈릴리 사람들과 같은 열정적인, 충성스러운 존경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 출신이기는 해도 갈릴리 촌사람입니다. 허드렛일을 하는 목수입니다. 인간적으로 흠모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오만한 유다에게는 스승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존경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학습이 더뎠습니다.
유다는 열한 제자들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자기는 남방 유다 엘리트이고, 11제자들은 갈릴리 촌사람들입니다. 뱃사람, 세리출신, 시몬은 시대감각이 없는 열심당… 자기 눈에는 제대로 된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수제자라는 베드로는 하는 게 천방지축이고 제자들에게서 비릿한 생선 냄새가 나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동료들을 무시하는 유다는 자기 의(義)에 사로잡혔기에 배움에 대한 열망이 없었습니다.
유다는 돈 관리에 투명하지 못했습니다. 돈은 그 사람의 인격의 척도입니다. 그 사람을 알아보려면 돈을 맡겨보라고 합니다. 돈을 쓰고 관리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을 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가 도적이라고 합니다(요 12:6). 돈에 잡혀 있어 배움이 없었습니다.
유다는 자기 세계관으로 꽉~ 차 있는 사람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주님의 손에 휘어지고 다스림을 받았고 그만큼 성장했지만 유다는 주님과는 상관없는 자기 길을 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를 과시했을 뿐입니다. 다른 제자들을 무시했기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결국에는 배신자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짜인데 진짜로 보였을 뿐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가짜이면서 진짜처럼 보이고 있는 사람들은 아닙니까? 물론 교회에 나온다고 하루아침에 진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제가 묻는 것은 진짜인 우리가 진짜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 우리가 진짜처럼 보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진짜 같은 가짜로 보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가짜이면서 진짜처럼 보이는 것도 쉽지 않지만 진짜이면서 진짜로 사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 비결은 한 가지-늘 자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나는 부족하다, 나는 멀었다, 더 많이 배워야 한다,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 이런 자기 겸양과 배움에 대한 열망이 진짜를 진짜처럼 살게 할 것이고 보이게 할 것입니다.
유대인 랍비가 제자들에게 “진리는 길에 있는 돌멩이처럼 널려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제자가 “그렇게 흔한 진리를 사람들은 왜 터득하지 못합니까?” 물었습니다. 스승은, “사람들이 허리를 굽히지 않기 때문에 그 진리를 주울 수 없는 것이다.”라고 답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벧전 5:5). 겸손으로 살 때 성장의 은혜가 있게 되고 쓰임 받을 수 있게 될 줄 믿습니다.
가룟 유다는 왜 주님을 배신하게 되었을까요?
가룟 유다-인간적으로는 배신이, 탈락이, 재능이 아깝습니다. 그는 12제자 중 모든 면에서 우월하고 우수한 사람입니다. 조건이 가장 좋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로 부름은 받았지만 사도가 되지 못했습니다. 사도가 문제가 아니라 스승을 배신하는 못된 제자, 스승도 정신적 아버지라면 일종의 불효자가 된 것입니다. 왜 그럴까?
㉠ 소외감 때문입니다.
그는 유다 사람으로 11명과는 모든 면에서 뛰어난 사람이지만 스스로 고립을 자처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멸시, 무시함입니다. 인간성 중에 가장 나쁜 것이 남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남들이 보기에는 건방으로 보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싫어하는가? 건방진 사람을 싫어합니다. 무엇이 모자라거나 하자가 있어서 싫어하는 것보다 건방을 떨면 싫어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소외당합니다. 25년 만에 동창회 두 번 나가보았는데, 괜히 건방을 떠는 분들이 왕따를 당하고 있더라고요. 본인들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으니까 일은 하면서도 동창회에 대한 불신이 있어요. 유다가 그런 사람입니다. 잘난척하다가 왕따를 자처했습니다. 스승에 대한 배신은 사실 제자들에 대한 배신의 결과였을 것입니다.
㉡ 비밀이 감추어 질 수 없다는 절망감이 배신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회계입니다. 요 12:6에,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놓는 것을 훔쳐감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계속적으로 돈궤에서 공금을 훔쳤습니다. 비밀을 숨길 수 없어 선수를 친 것입니다. 스승을 배신하기 이전에 그는 이미 제자들을 배신하고 있었습니다.
㉢ 사단에게 사로잡혔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요 6:70)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배신하기 이전에 이미 마귀의 하수인이었습니다. 사단은 우월감으로, 자존심으로, 소외감으로, 돈으로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그의 양심은 타락했고 스승을 배신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외모와 엘리트적인 모습이 가짜인 그를 진짜처럼 보이게 했던 것입니다.
배신자가 되었다고 그제야 배신자가 아닙니다. 그의 교만함이 이미 사단의 수하로 자처하고 마귀의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왜 그를 선택했습니까?
주님은 처음부터 그가 어떤 위인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은 사역의 초창기입니다. 그럼에도 그를 선택하신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건 주님만이 아시는 비밀입니다.
우리 쪽에서 해석을 해 본다면?
㉠ 교회 안에도 항상 가라지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경각심을 갖게 합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있다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가라지도 때로는 알곡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기에 가라지는 정말 진짜처럼 보입니다. 육안으로 식별이 잘 안 됩니다. 그래도 가짜는 가짜입니다.
교회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진짜와 가짜가 섞여 있습니다. 진짜처럼 보여도 가짜가 어떤 것임을 식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짜처럼 보여도 그 사람이 진짜임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면서 넘어가지 않습니다.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만약 11제자 중에 누가 가룟 유다와 개인적으로 친했다면 그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그가 가짜임이 드러난 이후, 그 영향력을 없애려고 얼마나 노력했겠습니까?
㉡ 자기 식(式)의 정의가 얼마나 위험스러운 것임을 말해줍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여인의 행동을 ‘소비’, ‘낭비’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영원히 기념할 ‘헌신’으로 보았습니다. 유다의 관점에 동조했던 제자들-역시 회계였기에 살림을 바르게 집행하는 사람은 다르다고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여자의 돈이 돈궤로 들어오면 자기 몫이 되는데 머리에 부어버림으로 훔쳐갈 돈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비판한 행위는, 정의를 가장한 가짜 정의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교회라는 게 그렇습니다. 교회는 정의라는 것이 세상적인 개념과 다를 데가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적 정의가 아니라 덕을 더 우선시합니다.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문제를 제기하는 분들을 보면 반듯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지적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 그 점에서만 맞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예산이, 재정이 내 쪽에서는 낭비이고 허비하는 것 같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투자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헌금입니다. 너무 내 생각이 옳다고 하는 정의는 우리를 ‘자기 의인’으로 만듭니다.
㉢ 소외의 위험을 보여줍니다.
그는 지역적으로 다릅니다. 배움도 다릅니다. 그의 출중함이 남을 무시했고 그게 11제자들에게서 소외감으로 돌아왔습니다. 결과는 배신입니다.
고라니는 사슴과에 속한 초식동물인데 본성은 아주 순합니다. 그런데 집단에서 어쩌다 소외되면 반발감으로 무서운 맹수가 됩니다. 유다가 고라니가 된 것입니다. 그의 배신은 제자들에 대한 배신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이런 배신을 통해 사랑으로 품으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을 때 그냥 놔두면 유다가 될 것이니 사랑으로 녹여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유다가 생겨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 성격이 까다로운 사람을 통해서 다듬어지는 인격 향상의 길을 보여줍니다.
유다 같은 사람이 그룹 가운데 있다면 얼마나 불편합니까? 매사에 잘난척하고 가르치려 들고, 돈궤를 맡았다고 위세를 부리고… 그러나 11제자들은 유다를 통해서 참고 이해하고 수용하고 함께 가려하고… 그러다보니, 자신들의 인격 수양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인격도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만 온 것이 아니라 까다로운 동료들을 통해서 배우게 된 것입니다.
교회 안에 까다로운 사람들, 매사에 불만을 하는 사람들을 둔 것은 그 사람 자체는 마이너스이지만 그런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큰 그릇을 만들고자 하는 주님의 섭리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그릇들을 더 넓히고자 하는 애씀이 있어야 합니다.
유다를 교회 안에 들어오게 하시고 남겨두신 것은 바로 그들을 통해 제자들을 훈련시키고 장차 교회 안에 일어나는 배신의 역사를 넘어설 수 있는 내성(耐性)을 키우기 위한 주님의 훈련의 한 과목입니다. 배신의 기질을 갖고 있는 똑똑한 사람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좋은 사람에게서 좋은 점들을 배워야 한다면 나쁜 사람들에게서는 나쁨을 통해 나쁘게 되지 않는 법들을 배우게 된다면, 유다는 사도의 역사를 하지는 못했지만 배움의 모델은 충분히 되었고 여기에 유다 선택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결론
결국 유다는 인간관계를 제대로 못한 것입니다. 그의 자존심, 우월감이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 동료들과의 바른 인간관계에서 실패하고 결국은 배신자가 된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우리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세 갈래가 있습니다.
㉠ 저속한 길-자신이 받은 대우보다 더 나쁘게 상대방을 대우한다.
㉡ 평범한 길-자신이 받은 대우와 똑같은 수준으로 상대방을 대우한다.
㉢ 고귀한 길-자신이 받은 대우보다 더 귀하게 상대방을 대우한다.
“저속한 길”은 인간관계를 망치고 깨뜨립니다. “평범한 길”을 걸으면 사람들이 나를 떠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내게 다가오지도 않습니다. “고귀한 길”은 긍정적 인간관계를 구축하면서 사람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깁니다. 유다는 ‘저속한 길’을, 제자들은 ‘평범한 길’을, 예수님은 ‘고귀한 길’을 가셨습니다. 끝까지 남은 제자들도 나중에는 그 길을 갔습니다.
저는 느헤미야의 기도를 항상 좋아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옵시고 주의 큰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끝까지 우리들을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모든 늘빛가족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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