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의 두려움과 떨림
누가복음 5:1~11
서론
본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바다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고기를 엄청 잡게 하신 사건입니다. 평온했던 갈릴리 뱃사람들에게는 너무 충격적인 사건이어서 여러 반응이 나타납니다.
-뱃사람들은 놀랍니다. 9절,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그들은 그물 속의 고기를 보고 놀랐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놀랍니다. 10절,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뭘 보고 놀랐을까요? 역시 그물 속의 고기를 보고 놀랍니다.
두 반응의 놀라움은 일종의 탄성입니다. 예수라는 목수가 일으킨 기적과 두 배에 가득 채워진 물고기, 베드로는 로또를 맞은 것입니다. 이에 대한 부러움이 놀라움으로 표현됩니다.
시몬 베드로는 어땠을까요? 10절,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무서워하지 말라… 베드로의 반응은 다릅니다. 모두 신기한 표정이고 부러움의 탄성이지만 정작 물고기의 주인 베드로는 무서워합니다. 반응들이 다르게 나타난 것은 어부들은 물고기를 보고 놀라고 있지만 베드로는 물고기를 보지 않고 물고기를 잡게 해주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신비한 인물 예수님에 대해서는 두려움이고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놀람입니다. 이 날, 베드로는 두렵고 놀라는 순간을 세 번이나 체험합니다. (물론 제 해석입니다.) 이 순간의 놀라움, 두려움이 베드로로 하여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르는 동기가 되고 결국에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까지 나가게 됩니다.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는 두려움과 불안을 구분합니다. 두려움은 대상이 있는 떨림(fear)이요, 불안은 대상이 없음에도 느끼는 삶에 대한 고뇌(angst)라 합니다. 불안정한 상태이지요.
덴마크의 철학자 케엘케골은 베드로의 무서워하는 이런 행위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과 떨림이라 합니다. 그는 ‘두려움과 떨림’이라는 책에서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단독자로 서 있는 아브라함에게 바로 이런 두려움과 떨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두려움과 떨림이 있었기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비로소 제대로 알게 되었고 우리 역시도 이런 경건이 없으면 하나님과 일대일 만남을 못한다! 이런 두려움과 떨림이 내 마음을 평화롭게 고요한 기쁨으로 안내한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일로 한없이 절망했던 고독한 철학자의 발견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놀람은 불안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가지는 믿음의 두려움입니다. 베드로는 평생 생업을 해왔던 그 바다에서 왜 그리 두려워하면서 왜 그리 놀랐을까요?
1탄은, 자기 성공에 놀랍니다.
베드로는 갈릴리바다 최고의 어부, 달인(達人)입니다. 물때를 알고 고기떼의 길을 알았습니다. 바다를 훤히 꿰고 있는 사람입니다. 공부는 1등을 못하지만 고기 잡고, 회를 뜨고 생선요리는 갈릴리바다 최고입니다. 바다는 생업이고 부(富)와 명예와 노동의 대가를 가져다 준 장소였습니다. 육지에서는 자신 없지만 바다에만 나가면 자신감에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5절 ‘잡은 것’이 없었습니다. 생전에 없는 일입니다. 고기씨가 말랐나, 실력이 다했나, 젊은 어부들은 과학적 방법으로 고기를 찾아다니는데 나는 그물 쳐놓고 고기 오기를 기다리는 구시대 방식은 아닌가… 1인자 자리를 내주어야 할 때인가…. 그는 침울한 마음으로 그물을 씻습니다. 사실 이런 상황은 예수님의 사전포석입니다. 지난밤 실패하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건방을 떨었겠지요. 고기잡에 대한 실패, 그물을 깁는 초라한 모습, 미래에 대한 불길한 예감... 빈 그물, 빈 마음, 비어있는 인생이 주님께서 개입하시는 틈새입니다. 우리가 그걸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실패 중에서 성공으로 유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4절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지라”고 했습니다. 갈릴리바다 1인자 베드로에게는 웃기는 일입니다. ‘이 양반 목수 일만 하더니 바다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모양이네…’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날 밤의 실수가 복종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5절 “밤새도록 던졌다”는 토를 달면서도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했습니다. 그러자 6절, 고기를 잡은 것이 너무 많아 그물이 찢어졌습니다.
9절 “고기를 잡힌 것을 보고 놀라고” 10절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어제 밤에는 베드로가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해 비탄에 찬 놀라움이 있었고 동업자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걱정거리가 되더니 하루 만에 인생은 역전해서 자기도 놀라고 남들도 놀라게 하는 역전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성공, 자기 실력에 놀랐다고 하지만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으키시는 실력과 성공에 놀랐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그는 고기를 보고 놀란 가슴이 예수님을 향하게 되고 예수님을 보고 놀랍니다. 저 분은 도대체 누구인가, 고기를 몰아오는 분, 물때를 아는 분, 갈릴리바다를 제압하고 하고 있는 분… 처음에는 5절, ‘선생님’ 정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물 가득 물고기 떼들이 들어있는 기적의 현장을 보면서 고기가 아닌 예수님에게로 시선이 가게 된 것입니다. 두렵고 떨렸습니다. 눈앞에 있는 존재 앞에서 영적인 권위에 놀리며 두려움과 떨림으로 온몸을 떨면서 고백합니다. 8절, “…주여…” ‘주’는 하나님이요 황제요 주인이요 남편을 뜻하는 호칭입니다. 놀란 사람들은 고기로 끝났지만 베드로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주’를 보게 됩니다. 놀람과 두려움을 통해 실패와 허탈함을 극복합니다.
우리도 주님 앞에서 일대일로 ‘두려움과 떨림’을 체험해야 합니다. ‘두려움과 떨림’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빈 그물에 가득 찬 성공을 넘어서서 더 큰 일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2탄은, 자기 인식(고백)에 놀랍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어부들은 ‘기적의 고기’를 보고 놀랐습니다. 이전의 어떤 고기보다 최상품입니다. 그물이 찢어질 만큼 잡혔으니 1년 수입액을 한방에 올려버린 셈입니다. 놀라지 않는 게 이상하지요! 그래서 베드로도 놀라고 동업자들도 놀랐습니다. 그러나 진짜 놀램은 이제부터입니다. 8절, 베드로가 털썩 무릎을 꿇으며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영 어울리지 않는 장면입니다. 이럴 때는 먼저 회를 뜨고 초장을 발라 “들어보세요. 갈릴리바다의 회맛이 최고입니다!” 이렇게 나와야 합니다. 다음에 술을 권하고 마음을 떠봅니다.
“혹시 동업할 생각은 없으십니까? 나는 배와 그물을 대고 당신은 고기가 어디에 있다는 정보를 주고 지금처럼 고기를 잡으면 4:6 비율로 나눕시다. 내가 배와 그물을 댔으니 6입니다. 안 되겠습니까? 그러면 5대 5로 합시다. 그것도 안 되면 에잇 썅! 3대 7입니다.”
이게 베드로에게 어울리는 시나리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뱃사람의 흥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술기운도 아니고 너무 놀라서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엎드려서 하는 이야기가 “나는 죄인이니 나를 떠나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 자신에게 일어난 두 번째 놀램-나도 놀라고 남도 놀래케 하는 두려움과 경외의 순간입니다. 베드로는 왜 이랬을까, 내막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과 오늘 첫 대면이 아닙니다. 요 1:42에, 동생의 안내를 받아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베드로를 본 예수님은 43절, “시몬! 앞으로 네 이름은 게바다”라고 했습니다. 게바는 베드로-반석입니다. 시몬이 조약돌이라면 베드로는 반석입니다.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좋기보다 시큰둥해서 돌아왔습니다. 내가 무슨 반석이라고? 헛소리를 하는 이런 예언자를 따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찾아온 거예요. 그는 베드로가 알지 못하는 갈릴리바다의 바닥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고기가 떼로 몰려다니는 바닷길은 알았지만 예수님은 그 고기들을 몰고 다니는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분을 ‘하대(下待)’하고 내 인생에 개입하는 것을 거절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엎드린 것입니다. 널뛰는 갈릴리의 풍랑조차 베드로를 무릎 끓지 못했습니다. 바다와 상관없는 목수 신분의 예수가 베드로의 무릎을 두려움으로 꿇게 했고 바다를 주장하시는 그 권세 앞에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 그물 속에 들어있는 고기떼를 보고 돈 계산을 해보고 놀랬던 베드로가 이제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 앞에 엎드리고 고백하게 되고… 해놓고서는 스스로의 행동에 놀라고… 갈릴리바다의 동업자들도 죄인임을 인정하면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베드로의 개종에 놀랍니다.
영국의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은 '만유인력' 등의 수많은 발견을 했습니다. 누가, "당신의 인생에서 가잘 큰 과학적 발견은 무엇입니까?" 묻자 뉴턴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생애에서 가장 큰 발견은 나는 죄인이라는 것,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이어령씨의 개종-회심은 모든 이들에게 놀람입니다. 70세가 넘으면 이성(理性)이 굳어집니다. 다른 사상을, 이념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수천 명의 일본인들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입니다! 라는 베드로적인 고백으로 모두에게 놀램을 안겨주었던 것입니다. 이런 고백에서 가장 놀랜 사람은 누구일까요? 딸입니까? 개종으로 안내한 목사님입니까? 그의 고백을 듣는 청중들입니까? 그의 개종은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놀랜 사람은 이어령씨 자신입니다. 무신론자였던 내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하다니… 하나님의 선물 앞에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놀램은 고기 때문도 교회 다녀서 성공했다는 것만도 아닙니다. 내가 변한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것입니다. 그 분이 나를 위해 해놓으신 일… 해 가시는 일… 앞으로 나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모든 일들이 믿어지고 그 믿음으로 살고 있다는 것… 이것이 두 번째 놀램입니다. 누가 예수를 믿는데… 놀랠 노자네… 이렇게 남들이 내 인생관의 변화, 삶의 변화를 보면서 놀라게 하는 것! 이런 놀램을 보여주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제3탄은, 자기 사명에 놀랍니다.
처음에는 고기 때문에 놀라고… 두 번째는 죄인이라는 고백에 놀라고… 놀램이 여기에서 끝난다면 베드로는 반석이 될 수 없습니다. 갈릴리의 시몬-조약돌로 평범하게 살다 갈 것입니다.
베드로에게는 놀라움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10절,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사람을 취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게 되리라… 사람의 마음을 잡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기떼를 따라 살아왔던 사람이 이제는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리더가 된다는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베드로는 덤벙대고 충동적입니다. 실수도 많고 허점도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일은 많이 하지만 존경을 받는 데는 2% 부족합니 다.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인물이 될 것이다! 세상이 너를 보고… 너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놀랄 것이다…” 선언하십니다. 베드로는 이제 거룩한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거룩한 사명에 베드로는 두렵고 떨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훗날 베드로가 말씀을 전했을 때 오천 명, 삼천 명이 그 자리에서 회심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앉은뱅이의 손을 일으키니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팔짝팔짝 뛰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그 능력을 인해 베드로와 요한과 제자들과 세상이 서프라이즈-놀란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놀랜 사람들에게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이런 놀램은 우리가 일으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러니 우리를 주목하지 말고 하나님을 주목하라!’
베드로의 말은, 하나님을 주목하면 하나님은 너희들을 놀래케 하는 기이한 일들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놀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 생애에 일어나야 합니다.
결론
베드로의 두려움과 떨림! 1차 두려움과 떨림, 자기 성공, 2차 두려움과 떨림, 자기 인식, 3차 두려움과 떨림, 자기 사명… 베드로의 위대한 삶은 이렇게 예수님을 목수가 아닌 창조주로, 선생이 아닌 '나의 주'로 대면하면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마주 대하면서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알아갔고 떨림으로 그 분 앞에 섭니다. 그러자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 그의 말씀에 수천 명 씩 회개하게 되는 역사로 인해 유대종교지도자들을 놀라게 하고 초대교회를 놀랍게 하고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건 주님을 일대일로 대면하고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경험하고 두려움과 놀람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베드로는 창조주인 예수님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을 체험하자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 자기성공을 가져온 배와 그물을 버렸습니다.
11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만약 자기의 세계를 버리지 못하고 작은 성공에 만족했다면 갈릴리바다의 예수쟁이는 되었겠지만 반석으로서의 베드로는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더 큰 사명을 위해 인간적인 성공관을 버렸습니다. 부르심의 상을 위해 뱃사람으로서의 기질을 버리고 사명의 길로 나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베드로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베드로의 스토리가 내 스토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어제의 실패에서 벗어나 그물 가득이 주님으로 채우는 성공으로 타인을 놀래킵시다! 주님 안에서 새사람이 되고 달라지는 내 모습에 나도 놀라고 주변을 놀라게 하는 간증자가 됩시다! 주님에게 더욱 헌신함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이런 간증을 넘어 내 삶으로 인해 남들을 변화시켜 나가는 그 능력에 나도 놀라고 남들도 놀라게 하는 사명자의 삶을 살도록 합시다! 나쁜 일로 남들을 놀래키지 말고 좋은 일로 남들을 놀라게 하는 생애를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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