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성경을 기록한 거룩한 손
마태복음 9장 9~13절
서론
마태는 예수님께서 제자 사역에 흠이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마치 100여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백정을 신학교로 보내 목사를 세우려는 것과 같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마태를 불러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누구나 주님께서 충분히 쓰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는 각각 그 사람들 속에 쓰임을 받을 수 있는 게 있어서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은 그 네 번째, 예수님의 제자 마태를 만나봅시다.
마태는 좋은 집안에서 출발합니다.
12제자 중 가장 좋은 조건에서 성장한 사람을 들라면 마태일 것입니다.
㉠ 마가복음, 누가복음에는 “레위”로 나옵니다(막 2:14). 레위 족속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으로 살라고 레위로 이름 지었습니다. 유대인으로 얼마나 좋은 이름입니까? 이름에는 이름을 짓는 사람들, 선택하는 사람들의 의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자녀들의 이름을 지어줄 때 얼마나 고심합니까? 자녀들의 이름을 지어달랄 때 참 곤혹스럽습니다. 자녀의 이름은 자신들이 지으세요! 목회하기도 힘든데 자녀들 작명가(作名家) 역할까지?
마태의 부모도 아들을 낳으면서 아들에 대한 기대를 이름에 담았습니다. 레위인답게 살아가라고! 그것은 아들의 이름을 여호수아, 예수로 지었던 사람들의 심정과 같습니다. 부모가 얼마나 아들을 기대했으며 사랑으로 양육했을까요? 아이만 낳아놓고 바다로 나아가는 뱃사람들과는 교육 차원이 달랐을 것입니다.
㉡ 마태는 유능한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로마정부의 공무원인 세리는 3~4개의 외국어-당시 유대공용어인 아람어,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다(多) 민족이 살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상당한 식견과 실력을 갖춘 사람입니다.
㉢ 마태는 세관원입니다.
교통의 요충지 가버나움. 헤롯의 영지를 통과하는 모든 상품과 일용품에 세금을 매기고 징수하려고 배치된 세관이기에 수입도, 생기는 것도 많았습니다.
당시 세관원들의 영향력은 막강했습니다. 기본세-농산물 수확의 10분의 1(곡식), 5분의 1(과일), 소득세-십분의 십일조, 인두세-14세에서 65세까지 물어야 하는 세금입니다. 여기에 수입품과 수출품의 세금을 내는 관세, 국토 여행이나 다리를 건너는 통행세, 시장이나 항구에 들어가는 입장세, 차량세(짐 나르는 동물이나 마차에도 부과)… 등입니다.
마태는 이처럼 모든 것을 갖춘 사람입니다. 이만하면 성공한 사람이 아닐까요? 세리라고 모두가 잘못 사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갖추었기에 행복했을까요?
마태는 늘 갈급했습니다.
마태에게는 출신도, 학식도, 지위도, 돈도 있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아름다운 아내와 그 사이에서 영민한 자녀들을 둘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 중에 가장 부적격자가 마태입니다.
㉠ 그의 직업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국수주의자입니다. 하나님만이 주(主)라는 종교적 신념이기에 하나님 이외의 인간 지배자에게 세금을 바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권을 침해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권위를 모독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편치 못했습니다.
㉡ 유대 율법에, 세리는 회당에 들어감을 금지 당했습니다.
그들은 불결한 짐승이나 부정한 물건과 동등하게 취급되었습니다(레위기 20:5). 증인이 될 수 없고 창기와 같은 취급을 받고 부정한 존재로 인정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금을 거두어 이방인들에게 바치는 동족을 경멸했습니다. ‘강도와 살인자와 세리’는 한 종류로 취급되었습니다. 레위는 종교적으로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마태는 누릴 수 있는 많은 것을 얻었지만 근본적인 것을 놓치고 잡다한 것으로 채웠습니다. 그는 공허했고 삶은 황폐해 갔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에서 벗어난 삶은 항상 그렇습니다.
영국의 에이드리언 화이트 교수가 제작한 ‘행복지도’에 의하면, 1위가 덴마크, 스위스, 오스트리아, 아이슬란드, 바하마… 순입니다. 미국 23위, 중국 82위, 일본 90위, 한국은 102위입니다. 대체적으로 작은 나라일수록 행복한 경향을 보였습니다.
마음이 허전하십니까? 목적이 없고 그냥 살고 있습니까? 돈의 노예가 되었고 육체를 채우는 일에 중독되고 말았습니까? 그러면서 시간이 너무 빨리 가고 조바심 나고 불안합니까? 남자 나이 40이 넘고 뭔가 채워지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사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영적 갈망으로 목말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찾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는 성경기록자가 됩니다.
예수님의 삶의 지도는 언제나 동일합니다. 정치의 연줄을 좇거나 연합체의 장(長)을 찾아 나서지도 않습니다. 사모하는 영혼, 갈급한 영혼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목적에서 이탈한 사람들을 향해 주님의 영적 지도는 움직였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활달하고 저돌적인 사람 베드로를 찾으셨습니다. 안드레는 차분하고 남을 챙겨주는 사람입니다. 야고보는 리더십이 출중한 사람입니다. 빌립은 치밀하고 신중하고 계산적인 사람입니다. 모두가 교회를 세우고 확장하는 사역에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를 찾아 오셨습니다.
제자가 된 마태로 인해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 마태는 자신이 예수 안에서 새로운 생애를 시작하게 되었음을 공론화합니다.
마태는 다시는 돌아가지 않으려고 모든 것을 끊겠다는 마음에서 공개적으로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잔치를 베푼 것입니다. 이제 죽어도 예수 안에서, 살아도 예수 안에서라는 각오를 분명하게 내외에 천명하게 된 것입니다. 그의 공적 선언이 그의 믿음을 성장시켰습니다.
니고데모. 몰래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의 구도(求道)에도 불구하고 그는 3년 동안이나 익명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가 자신을 드러낸 것은 주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입니다. 그는 계속적으로 익명의 제자생활을 했기에 숨기는 믿음 더 이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니고데모는 오랜 세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는 익명의 제자로 따랐습니다. 그의 신앙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그는 믿음을 드러내지 않고 안 믿는 척 숨겼기 때문입니다.
주교가 교황을 찾아가서 고해성사를 합니다. “교황님! 저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었습니다.” 그러자 교황이 말했습니다. “믿는 척 해!”
믿음은 믿는 척 하는 것이 아닙니다. 드러내야 하고 공개성을 띠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의 가속성이 붙고 주님께서 인정해 주실 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공표하셨습니다. 어디에서나 내가 누구인지, 교회에서 어떤 직분으로 섬기고 있는지 공개하십니다. 그 때 우리의 믿음은 더욱 강하게 될 것입니다.
㉡ 예수님을 영접하고 난 마태는 즉시 자신의 믿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동료들을 불러 잔치를 하는 일입니다.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유대인에게 왕따 당하던 유대인들이 대거 몰려든 것입니다. 자기를 불러주신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좋은 뜻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정통 유대인들이 시비를 걸고 나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이 묘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자리에서 자신이 오신 일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지상천국을 세우러 온 정치가가 아니라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스스로를 죄인(罪人)이라 자인하는 사람들에게만 자신은 복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마태가 드러낸 것입니다.
마태는 그 말씀에 자신의 일생을 주님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결심을 굳혔을 것입니다. 죄인의 친구 됨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히 죄인의 친구됨을 밝히시는 예수님, 죄인들을 위해 세상에 오셨다고 선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 마태는 눈물을 흘리며 “아멘!” 했을 것이며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그 말씀을 복음으로 세상에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내가 늘빛교회 여기에 왜 있는가? 예수님께서 오신 일을 드러내기 위해 있습니다.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것,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 그 주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눈에 거슬리는 일이 있어도 예수 안 믿었으면 어느 정도였을까, 마음의 수용이 있어야 합니다.
㉢ 마태는 돈과 관계없는 일을 했습니다.
사실 제자 중 회계를 맡아볼 사람은 단연 마태입니다. 그는 평생 돈을 만진 사람입니다. 회계를 맡았다면 예수님의 장부는 훨씬 넉넉했을 것이며 제자공동체 생활에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가룟 유다가 회계가 되고 마태는 빠졌을까? 예수님의 의도였을까요? 마태의 사양이었을까요? 양쪽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태도 회계의 일을 기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때 마태는 돈과 멀리하고 싶었습니다. 그에게 돈은 죄 자체였습니다. 죄가 생각나고 혹시 지난날의 돈의 욕심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는 원인제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왕 세관을 떠난 몸, 할 수만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더 가까이, 그 분의 말씀과 그 분의 이적에 더 많은 배움을 기대하고 싶었습니다. 돈과는 먼 거리에서 주님을 배우고 그 분을 섬기고 싶었습니다.
교회에서 사역을 할 때 우리는 너무 기능적인 면으로 사람들을 배치하는 것은 아닐까요? 학교 선생님이라면 꼭 주일학교 쪽에서 일해야 하고 은행업을 하던 분들이면 재정 파트에서 일하게 하고… 너무 전문사역 쪽으로 사람들을 배치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것도 좋지만 마태에게서 배울 바가 있다면 교회는 순수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공이 교회에서마저 계속된다면 그것은 믿음의 역사보다는 인간의 계산과 재능이 더 들어가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 믿음이 성장할 기회를 놓쳐버리고 사역에 묻혀 일하다보면 우리 자신들이 단순히 종교적 봉사자들로 남게 되는 경우는 없을까요? 마태는 그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 마태는 성경을 많이 연구했습니다.
특히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살폈습니다. 얼마나 성경을 많이 보았던지 마태복음에는 구약성경이 100회 이상 인용됩니다. 어제의 죄인이 자기를 정죄하고 있는 성경을 꿰뚫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정죄하는 사람들을 위해 복음을 기록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정죄하는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입니다. 그 손은 어떤 손입니까? 돈을 세던 손입니다. 동족들의 것을 토색하던 사기꾼 손입니다. 사람의 사정을 봐주지 않든 인정사정없던 손입니다. 그러나 이제 마태는 마태복음이라는 성경을 거룩한 손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예수님에 관한 이야기,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야기, 베드로의 죄와 좌절과 회복이 있는 눈물의 이야기… 그 감격의 이야기들을 눈물로 기록했습니다. 그의 사역은 지난 2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삶에 기쁨을 주었습니다. 그의 탐욕의 손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유익한 손이 된 것입니다.
마태를 준비하다보니, 제가 마태를 많이 닮았음을 알았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고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하루에 동시를 두 편씩 쓰고 잤습니다. 중고등부 시절에는 교회 회보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제 손을 미리 준비하고 계심을 몰랐습니다. 저는 대중적이지 못했습니다. 어려서도 수줍음을 많이 탔습니다. 그러기에 설교를 하는 목회자는 감히 엄두도 못 냈습니다. 문서선교나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3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이 쓰임을 받고 있는 것은 바로 손입니다.
발이 해내지 못한 아쉬운 일들이 많았기에 손이 그 발의 두 배의 역할을 하려고 그랬는지 그동안 많은 글들을 썼습니다. 조직신학, 월간지 발행, 2백 권이 넘는 책, 이번에 홈페이지에도 7천매 이상 되는 성경이야기를 써서 올렸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제 손을 사용하실 줄을 저도 몰랐습니다. 돈 세던 추악한 손이 변하여 성경을 기록하는 마태의 손은 하나님의 손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역사이며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입니다.
결론
마태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맛디디야’의 단축 형으로 “여호와의 선물”입니다. 그것은 마태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감격을 자기 이름에 담은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살면서 결국 성경을 써냈습니다.
오늘 마태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버리지 못한 것들을 생각하지 못하고 쓰임 받을 일만 거창한 일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쓰임 받을 길은 지금 우리의 손에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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