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돌로매, 편견을 극복한 나다나엘
요한복음 1장 45~51절
서론
예수님의 제자들은 여러 유형입니다. 강한 사람, 약한 사람, 나쁜 사람, 좋은 사람, 무학자, 배운 사람, 갈릴리사람, 유다 사람… 이런 사람들로 12명을 모았습니다. 이들 모두는 예수님에게 필요한 사람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제자-다섯 번째로 바돌로매입니다.
바돌로매는 좋은 성품을 가진 참 이스라엘인입니다.
성경학자들은 대부분 본문에 나오는 나다나엘을 바돌로매와 동일인으로 봅니다. 이런 주장을 중심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 나다나엘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엑스트라가 아니라 제자 부르실 때 등장한 인물입니다.
여기 인물들은 다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갈릴리바다에 참여했던 여러 제자 중 다시 이름이 나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그는 사도였음을 말해줍니다.
㉡ 예수님의 사복음 중, 공관복음서에는 나다나엘의 기사가 없고 요한복음에는 바돌로매의 기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동일인으로 봅니다. 바돌로매는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시각장애자 바디매오-디매오의 아들처럼. 나다나엘은 제자 되기 전의 이름이고 바돌로매는 제자가 된 후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마태의 원래 이름은 레위인데 마태로 이름을 바꾼 것처럼, 나다나엘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바돌로매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 공관복음에는 바돌로매 이름이 빌립과 함께 나옵니다.
본문에는 나다나엘은 빌립과 친구입니다. 제자그룹이 형성될 때 베드로 안드레 형제, 야고보 요한의 형제와 함께 빌립과 나다나엘을 같이 취급합니다.
이런 이유로 바돌로매를 나다나엘로 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나다나엘의 등장 기사가 제법 큽니다. 그런 사람이 잔득 기대를 걸게 해놓고 사라져 버립니다. 너무 아깝습니다. 그러기에 나다나엘이 바돌로매가 되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나다나엘이 빌립의 소개로 예수님에게 나오게 되었을 때 47절, 예수님께서는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합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 진짜 유대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신실한 사람, 성실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 고 합니다. ‘간사’는 물고기를 유인하는 미끼를 말합니다.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간사한 사람입니다. 간사함이 없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이용해 먹지 않는 순수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참 이스라엘+간사함이 없는 사람=이스라엘로 규정하는 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의 기질을 말합니다. 유대인은 야곱을 조상으로 둔 민족입니다. 거듭나기 전의 야곱은 거짓되고 간사한 사람입니다. 그는 성실하지 못했습니다. 형의 장자권을 뺏었습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기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상당히 경건한 척 했습니다. 율법이 최고조로 올랐던 시절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성실함과 순수함이 없었습니다. 외식, 가식적인 종교인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 교권자들에게서 환멸을 느끼고 있는 예수님에게 나다나엘-바돌로매는 탐나는 사람입니다. 그는 참 깨끗했습니다. 성실하고 진실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른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정체상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에서 천주교인으로. 불교도로 가는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교회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성경을 몰라서 그럴까요? 믿음이 없어서 그런가요? 성경대로 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성실함이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국교회 신자들이 삶에 성실해야 한다고 봅니다. 너무 은사 중심, 성령충만 중심을 강조했습니다. 이게 생활로 나타나야 하는데… 부흥을 보기까지에는 시간이 너무 걸립니다. 그래서 빠른 부흥의 길로 성령을 강조했고… 개교회는 부흥되지만 한국교회 전체는 점점 정체상태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선한 그리스도인들을 양성해야 합니다. 선하고 착하다는 것은 요즘 세상에 무능력한 사람을 지칭합니다. 그래서 여성들도 나쁜 여자 신드롬이 나오고 있습니다. 연속극의 주인공은 나쁜 여자들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착한 사람들로 살아야 합니다. 착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 손해입니다. 손해를 보면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세상은 달라집니다. 그래서 나다나엘과 같이 성실한 제자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48절,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다.”고 합니다. 무화과는 보통 4m 정도로 자라고 가지는 사방 7m 가량을 덮습니다. 유대인은 그 나무 밑에서 묵상하고 율법을 토론하고 성경을 읽습니다. 바돌로매는 학구적이고 진지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저돌적이고 충동적인 사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바돌로매처럼 진지한 사람들이 있어야 공동체가 바로 섭니다. 그래서 나다나엘-바돌로매를 부르신 것입니다.
늘빛교회에 이런 사람들 많이 있어야 합니다. 천성이 좋은 사람, 성실한 사람, 남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 진지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어야 질이 좋은 교회 될 수 있습니다.
최인호는 그의 역사소설 <유림>에서 인격(人格)이 있는 것처럼 국격(國格)이 있다고 합니다. 저는 여기에 더 붙여서 “교격”(敎格)이라는 것도 있다고 봅니다. 교격은 교회의 품위, 늘빛교회의 교격은 늘빛교회의 품격입니다. 늘빛교회의 교격, 품격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나다나엘-바돌로매처럼 성품이 좋은 사람들, 바탕이 어진 사람들, 남을 이용하지 않는 순수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우리 교회가 나다나엘처럼 좋은 성품의 사람들로 채워질 수 있기를 기대합시다!
바돌로매는 편견이 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주님께로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은 사람 바돌로매-그에게도 인격적인 결함이 있습니다. 편견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돌로매는 빌립에게서 예수님을 소개받았을 때 대번에 나오는 말이 46절,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냐.”고 했습니다. 그는 극심한 지방색이 있는 사람입니다.
나사렛은 유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떨어진 갈릴리지방으로 아주 위축된 곳입니다. 사투리가 심하여 같은 민족인 예루살렘에서도 말이 통하지 않는 외진 장소입니다. 이방인들이 사는 마을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순수한 유대문화를 갖지 못했습니다. 가난한 천민들이었기에 정통파 유대인들에게 멸시 당했으며 스스로도 낮은 자존감으로 희망 없이 살았습니다.
그 착한 사람 바돌로매도 지역의 벽을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묵상하고 지적인 감각을 갖고 있어도 편견은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도 갈릴리 출신이지만 지역적인 편견에서 주님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편견은 전체를 보는 힘을 약화시킵니다. 부분만으로 전체를 예단케 해 오류를 불러옵니다. 시선을 언제나 한 쪽으로 고정시킵니다. 그래서 정작 봐야 할 것은 못 보게 만듭니다. 사회학자들은 편견이 사회 및 집단 내부에 전통적 암묵적으로 이어져 내려온다고 말합니다. 특히 어린 시절에 형성된 편견은 오랜 시간 사라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은 타인에 대한 편견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주인공 엘리자베스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남자 주인공 다아시에 대해 오만하다는 편견을 가집니다. 다아시는 활달하고 매력 있는 엘리자베스를 사랑하게 되지만 오만하기에 두 사람의 사이는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습니다. 편견과 오해에서 비롯된 보이지 않는 장애물들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엘리자베스는 어떤 사건을 통해 다아시에 대한 편견을 버리게 되고 두 사람은 결국 서로의 진심을 확인, 해피엔딩을 맞게 됩니다.
이 소설은 인간 사이의 편견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는지, 또 얼마나 부정확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사실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수많은 오해와 갈등, 불만족은 편견에서 비롯됩니다. 한번 주입된 편견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습니다.
교회생활에서 우리의 결속력을 약화시키는 것도 때로는 편견입니다. 남에게서 들은 이야기, 그 사람에 대한 잘못된 첫 인상… 등은 우리 마음을 닫아버립니다. 이것이 결속을 해칩니다.
이런 것을 ‘고정관념’이라고 합니다. 고정관념은 “고장 난 관점”입니다. 사람들에 대한 고장 난 관점-이것이 편견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나다나엘에게 있었던 인간의 불완전성, 이기적 속성이었습니다. 이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면서 이런 것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할 때 교회에 세상이 들어와 앉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지난 세월 유럽교회였고 한국교회였습니다. 편견 때문에 교회가 얼마나 그 거룩한 기능을 상실했었습니까?
우리 스스로가 ‘편견과 오만’-이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바돌로매는 훌륭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편견이 심했던 바돌로매-그는 예수님의 한 마디 말로 편견을 극복합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너를 보았노라.”
나다나엘의 가장 좋은 모습입니다. 다른 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네가 싸울 때에 보았다! 술 먹고 있을 때에 보았다! 거짓말을 할 때 너를 보았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편견을 버립니다. 나다나엘의 좋은 점을 추켜세웁니다. 예수님의 말 한마디는 나다나엘의 편견을 불식시켜 버립니다.
바돌로매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제자들과 3년을 함께 먹고 생활했습니다. 처음의 편견으로는,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지내다보니 다 장점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저돌성이, 안드레에게는 언제든지 꼭 필요한 곳에 나타나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리더십이 있었고 요한에게는 조용함 속에서 따듯함이 있었습니다. 겉으로만 보았던 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전체를 보지 못하고 한 쪽만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장점을 세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양육을 통해 바돌로매는 자신의 편견을 치유 받게 되었습니다. 그의 학구적인 자세, 선한 양심은 다른 제자들에게 행동보다 더 중요한 것, 사역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임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바돌로매는 좋은 제자가 되었습니다.
제가 바돌로매를 준비하다보니 바돌로매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종교적인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탤런트나 운동선수들이 교회만 다니면 무조건 좋습니다.
같은 목사들이라도 내 눈에 이건 아니다, 하면 그의 업적 자체를 무시해 버리는 일종의 교만함이 있습니다. 세미나에 갔는데 어느 정도 유명한 목사님입니다. 강의를 받는 태도가 영 이건 아닙니다. 그때부터 그 목사님에 대해 좋지 않는 생각을 품었습니다. 저는 성실한 사람들을 좋아하고 아무리 유명해도 성실하지 않으면 별로! 입니다.
어느 부흥목사님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그 분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욕설을 하고 부교역자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일본 부흥회에 가서 화투를 치다가 들통 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는 그 목사에 대한 좋지 않는 감정을 갖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성령께서 제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들도 하나님께서 쓰실 구석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에게도 내가 알지 못하는 좋은 점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편견이 치료받아야 함을 바돌로매는 교훈하고 있습니다.
결론
목사에는 네 부류가 있습니다.
㉠ 좋은 목사-남이 칭찬하는 목사. 정직하고 이타주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목사입니다.
㉡ 훌륭한 목사-남이 우러러 보는 목사. 어떤 일이든지 공평하게 처신했고 공신력이 있어 남이 하지 못하는 일을 잘 해냈기 때문입니다
㉢ 성공한 목사-남이 부러워하는 목사-매사에 지혜롭게 판단하고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 유명한 목사-남보다 뛰어난 목사. 그는 성공한 목사가 되고 유명한 목사가 되었습니다.
바돌로매는 어떤 사도였을까요? 유명한 사도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거의 무명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보실 때 그는 좋은 사도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면서 성실하게 사역을 하다 칼로 살갗을 벗겨지고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의 시체는 자루에 놓은 후 바다에 던졌다고 합니다. 그러니 좋은 사도였겠지요.
오늘 우리 늘빛교회가 바돌로매와 같이 신실한 교회, 편견을 극복하는 교회, 좋은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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