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덩이에서 벗어나기
시편 40편 1~3절
서론
다윗은 2절에서, “기가 막힐 웅덩이”에 빠졌다고 탄식합니다. 웅덩이는 ‘움푹 파여 물이 괴어 있는 곳’으로 늪보다는 작습니다. 이에 비해 구덩이는 ‘땅이 움푹하게 파인 곳’으로 물은 없습니다. 그래서 웅덩이는 물웅덩이라는 말을, 구덩이는 불구덩이라는 말을 씁니다. 여기에 빠져있는 상태가 기(氣)가 막혀버리는 것입니다. 기(氣)는, ‘활동하는 힘’, ‘숨 쉴 때 나오는 기운’입니다. 숨이 막히면 죽는 것이고 활동하는 힘이 없으면 죽은 상태입니다.
살다보면 이렇게 기가 막힐만한 웅덩이에 빠집니다. 잘 나가다 파산하고, 홍성도님은 질고의 웅덩이에 3년째 빠져 있습니다. 이단 웅덩이에도 빠지고, ‘전원일기’의 ‘일용엄니’ 김수미는 얼마 전 기독실업인(CBMC)대회에서 “남편을 너무너무 미워하고 살았다” 간증합니다. (이 설교는 2022년 설교이며 김수미씨는 2024년 10월 25일 별세) 남편미움의 웅덩이에 빠진 것입니다. 이렇게 살다보면 건강에서, 사업에서, 인간관계에서 깊고 어두운 물웅덩이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웅덩이에서 기가 막혀 ‘어찌 이런 일이 내게’ ‘그 사람이 어찌 내게 이럴 수 있나’ 탄식합니다.
웅덩이의 종류
웅덩이에서 벗어나려면 웅덩이에 왜 빠졌는가? 알아야 합니다. 베스 모어는 ‘나 스스로 뛰어든 웅덩이’ ‘실수로 미끄러져 떨어진 웅덩이’ ‘누군가에 의해 내 던져진 웅덩이’를 말합니다.
-내가 들어간 웅덩이. 사울은 스스로 뛰어든 웅덩이입니다. 불신앙으로 질투의 웅덩이에 뛰어들었으며, 웅덩이에 빠져 여호와를 찾는 일과 국정은 내팽개치고 국민 영웅 다윗을 잡아 죽이려 허우적댑니다. 일국의 왕이면서도 시기심과 불쾌감으로, 언제 왕권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살았습니다.
-실수로 미끄러진 웅덩이. 다윗은 아차! 실수로 양심가책의 웅덩이로 미끄러졌습니다. 밧세바와 간통하고 그 남편 우리야의 살인을 교사하면서 영적침체에 빠진 것입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어찌 내가 이런 짓을 …’ 자기 행위에 대한 수치감, 혐오감을 느끼며 웅덩이에서 괴로워합니다.
-남이 빠뜨린 웅덩이. 요셉도 웅덩이에 빠졌습니다. 내 탓이 아닌, 아버지의 편애와 형들의 시기심으로 구덩이로 내던져졌습니다(창37:24). 요셉의 구덩이는 억울하다 못해 기가 막힐 웅덩이입니다. 그래서 2절, 기가 막힐 웅덩이… 물론 이 구절은 요셉의 탄식이 아니라 사울의 박해와 갑질에서 너무 억울해서 나왔을 다윗의 탄식입니다. 사울 때문에 웅덩이에 빠져있는 상황에서 ‘기가 막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울의 행동에 너무 어이가 없고 억울해서 말문이 막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인생의 웅덩이에 빠져 보았나요? 도종환 시인은 인생에 대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모든 꽃들이 다 젖으며 꽃을 피우고 모든 사람은 젖으며 비틀거리며 간다고 합니다.
어디에서 젖어보았나요? 이제도 웅덩이에 있나요? 웅덩이에서 빨리 나와야 합니다. 그 웅덩이가 삶을 황폐하게 만들고 믿음을 까먹으며 우릴 영적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릴 지도 모릅니다.
웅덩이에 빠진 원인
그러면, 살면서 웅덩이에는 왜 빠질까요? 웅덩이에 빠지는 경우는 각각 다릅니다.
-욕심 때문에. 사울이 웅덩이에 빠진 것은 낮은 존재감입니다. 다윗은 유다지파 성골이고 자기는 가장 약한 베냐민지파 진골이라는 낮은 자존감이 판단력을 흐리게 합니다. 그래서 다윗과 자꾸 경쟁하고 다윗의 인기에 질투하고 이게 분노가 되고 나중에는 악신이 듭니다. 미치광이가 되어 막 던집니다. 지옥 그 자체입니다. 질투심 때문에 미쳐서 번뇌하게 되었다 기록하고 있으니 이것이 지옥이 아니고 뭐겠어요! 악신의 웅덩이, 보통 무서운 웅덩이가 아닙니다.
-실수 떄문에. 다윗은 실수로 웅덩이로 미끄러집니다. 그는 우연히 목욕하는 여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군사들은 전쟁 중에 있고 왕은 늦잠을 잤습니다. 게으름과 태만입니다. 게으름과 태만은 영적 무장을 해제해 버립니다. 그러니 밧세바가 전쟁터에 나가 있는 충신의 부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자기 여자로 취합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웅덩이에 빠져 있는 자신의 형편을 발견하고 죄책과 수치와 미안함으로 날들을 보냅니다. 정말 깊은 수렁이었습니다.
-남 때문에. 요셉은 형제들로 웅덩이에 내던져졌습니다. 고생해본 적이 없는 도련님이었기에 누구보다도 견디기 힘든 절망적인 웅덩이입니다. 웅덩이에 빠져 살려달라고 형들에게 애걸복걸했습니다. 그러나 누구의 도움도 받지를 못했습니다. 그것은 깊은 웅덩이기 때문입니다.
웅덩이에서 나오려면
웅덩이는 내 힘으로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적(敵)이나 짐승을 잡을 목적으로 파놓은 웅덩이는 애쓸수록 기진맥진 하게 만듭니다! 가만히 있어 힘을 비축해야 함을 알면서도 두려움과 조바심으로 계속 발버둥 칩니다. 웅덩이는 인적이 드문 곳에 있어 쉽게 도움 받을 수 없습니다.
사울의 웅덩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사울에게 주어진 왕권은 임시직입니다. 정통성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 막대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다윗이 나타났을 때 모든 면에서 다윗이 진정한 왕재(王才)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걸 인정하고 다윗에게 왕위를 이양하거나 사후에 정권을 넘겨야 합니다. 그러면 왕의 장인으로 국구(國舅)가 되고 태어난 외손자들이 왕들이 되고 딸 미갈은 평생 왕의 사랑을 받지도 못하고 외로운 인생을 보내는 여인이 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사울이 모든 걸 망쳤습니다. 큰 딸 메랍도 망치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세 아들도 죽고… 사울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질투심의 웅덩이에 빠져 다윗을 쫓아다니면서 날밤을 샙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 회개의 자리로 나오지 않고 접신녀를 찾는 불신앙을 보이다가 실패한 비운의 왕이 된 것입니다.
다윗은 기가 막힐 웅덩이에 빠졌을 때 양심의 가책, 자신 혐오와 함께 얼른 회개합니다.
1절,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의 부르짖음… 회개입니다. 자책의 눈물로 흥건히 침상을 적십니다. 51편으로 갑니다.
7절,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9절,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11절,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다윗이 눈물로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정결함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밧세바와의 일 외에는 흠이 없는 자로 다윗을 기록합니다.(왕상 15:5)
요셉에게는 너무 억울한 웅덩이입니다.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그 길 밖에 없습니다. 남의 탓으로 구덩이에 던져졌기에 회개할 것이 없습니다. 웅덩이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나중에 애굽으로 끌려가 여주인의 모함으로 감옥 웅덩이에 빠집니다. 도단의 들판웅덩이와 애굽의 감옥웅덩이는 너무 억울한 웅덩이지만 잠잠히 기다렸더니 웅덩이들이 요셉의 근육을 키워냅니다. 사람은 50~70세쯤에 근력의 30%는 잃게 되는데 근육이 위축되어 키가 작아지고 여성은 근력이 없으면 몸의 탄력이 없어집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입니다. 30세에 얻은 아들과 91세에 얻은 아들은 건강세포가 좀 다르지 않을까요? 모친도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애정결핍도 있고 아버지가 채색 옷을 입히며 너무 감쌌기에 ‘마마보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형들은 들판에서 양을 치는데 열일곱 요셉은 집에 있습니다. 그만한 나이라면 형들과 양을 칠 건장한 청년입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사랑의 이름으로 과잉보호를 했고 이것이 아들의 근력-정신력, 의지력을 약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나약했던 요셉이 13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 신세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근력은 웅덩이에서 바동거리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형제들을 용서해 주는 용기는 웅덩이에서 만들어 낸 힘입니다. 요셉은 남에 의해 빠뜨려진 웅덩이를 선용한 사람입니다. 웅덩이가 힘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 큰 웅덩이에 빠졌다 선언합니다. 바울은, “죄와 허물로 죽은 너희를…”(엡2:21). 죄의 웅덩이! 허물의 웅덩이! 너무 깊고 너무 많아 자력으로는 나올 수 없는 웅덩이입니다. 바울은 “나는 곤고하다. 누가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롬7:24) 탄식합니다. 누가 이 죄의 웅덩이에서 나를 구해주랴…는 절규입니다. 바울을 비롯한 종교인들은 선행이, 율법이 죄의 웅덩이에서 건져 준다, 믿었습니다. 그래서 중독이 될만큼 율법에 매달렸습니다. 매달릴수록 율법은 그들을 옭죄었고 수렁 상태로 몰고 갔습니다. 그걸 저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복음은 모든 인간이 죄의 구덩이에 빠진 상태라 선언합니다(롬3:1). 내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나오려고 할수록 늪처럼 죄는 우리를 더욱 빠져들게 합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성경은 죄의 웅덩이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제시합니다.
-내가 죄의 웅덩이에 빠진 죄인의 신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웅덩이에서 나올 길은 하나님의 은혜 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방법에 동의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방법! 십자가 속죄를 통한 구원의 법칙에 아멘! 하고 동의해야 합니다. 그래야 웅덩이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습니다. 죄의 후유증 죄책감이나 수치심에서 나오고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웅덩이조차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
서두에 했던 배우 김수미 이야기로 결론을 맺습니다. 김수미씨는 기독교 집안에 태어났지만 56년 동안 주님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군산 출신으로 할아버지가 군산의 신흥교회를 세울 정도로 믿음의 가문입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믿음을 버리고 배우의 길을 걸으며 결혼했는데 워낙 성깔이 있어 부부관계가 좋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너무너무 미웠다 합니다. 그러다 6년 전에 다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번에 실업인회대회에서 간증하면서 그 제목이 ‘진작에 알았더라면’… 하나님을 다시 찾고 달라진 내용입니다. 행사가 지체되면서 예정보다 1시간 이상을 기다린 후 연단에 오른 김수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 성깔 있다. 만약 제 시간 딜레이되면 말없이 간다. 방송계에 알아보라. 제가 출연하는 영화 드라마스태프들 초긴장한다…오늘 아름답게 기다렸다. 주님을 알면 이렇게 달라진다. (출연료) 몇 시간에 1천만원이다. (이 자리에는) 돈을 주냐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왔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달라지자 연예계에서는 “김수미가 죽으려 하나, 기가 많이 죽었다” 할 정도였답니다. 이런 말에 김수미씨는 “주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달라야 한다. 전에는 남편을 너무너무 미워하고 살았는데, 주님을 알고 너무너무 예뻐하게 됐다. 똑같은 남자고 지금은 더 별 볼 일 없는데 새록새록 더 예뻐 보인다. ‘나 같은 죄인을 너 같이 좋은 집안 아들 만나 아들 딸 잘 낳고 손자 씨를 보게 해줘서 감사하다’고 한다. 밥만 먹고 도망가던 남편이 지금은 숨을 크게 쉬고 산다. 주님께 감사하다. 몇 번이고 헤어질까 했는데, 주님께서 자식 손주까지 보살펴 주셔서 감사하다. 모든 것이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미움의 웅덩이에서 빠져나온 멋진 여인의 간증입니다. 욕쟁이 배우가 변하여 감사의 성도로 변화된 멋진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혹시 웅덩이에 빠져있지는 않습니까? 경제적 웅덩이, 믿음의 슬럼프, 건강의 웅덩이, 미움의 웅덩이… 왜 빠진 것입니까. 스스로 뛰어든 웅덩이입니까? 실수로 떨어진 웅덩이입니까? 누군가에 의해 던져진 웅덩입니까? 어떤 웅덩이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세요. 너무 억울해 말고, 원수 갚을 일에 골몰하지 말고 나를 웅덩이에 던진 자들을 용서할 수 있는 근육을 키워야 합니다. 웅덩이 바닥에서 더 높은 곳으로 박차고 솟아오를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면, 2절입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더 이상 웅덩이와 수렁이 아니라 내 발은 단단한 반석으로 끌어올리시고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실 것입니다. 웅덩이에 빠져있는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은혜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결론 김수미씨 이야기가 깁니다. 결론은 짧아야 하기에 결론이라고 말해버리면 설교가 길다, 생각하게 됩니다.]
[설교 후 찬송]
인생길 험하고 마음 지쳐
1. 인생길 험하고 마음 지쳐 살아갈 용기 없어질 때
너 홀로 앉아서 탄식치 말고 예수님 품으로 나아오시오
2. 평생의 모든 꿈 허물어져 세상의 친구 다 떠날 때
어둠에 앉아서 울지만 말고 예수님 품으로 나아오시오
3. 어둔 밤 지나면 새날오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
이 세상 슬픔이 지나고 나면 광명한 새날이 다가 오네
[후렴]
예수님은 나의 생명 믿음 소망 사랑되시니
십자가 보혈 자비의 손길로 상처 입은 너를 고치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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