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잃은 것들을 찾아서
누가복음 15:1~7
서론
한경직 목사님은 인품에서나 설교에서나 존경스러운 목사님입니다. 목사님은 북한에서 내려와 단시간에 영락교회를 일군만큼 명설교입니다. 그러나 새내기 목사였을 때는 명설교인 줄을 몰랐습니다. 설교가 너무 쉬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에사 어떤 설교가 명설교인가, 알았습니다. 쉬운 설교, 청중 모두가 고루고루 다 쉽게 들을 수 있는 설교가 명설교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도 얼마나 쉽습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하신 구원의 비유입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는 두 청중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레위와 창기로 소위 ‘죄인들’의 대명사라는 하류 청중들이요(1절) 다른 쪽에는 율법에 박사들이며 경건함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바리새파와 서기관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상반되는 두 청중들을 앞에 두고 구원을 말하면 어느 한 쪽에서 반발이 있거나 실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양쪽의 청중들 모두가 쉽게 알아듣고 수용하도록 비유로 말씀을 하신 것이 오늘 내용입니다. 비유는 그만큼 쉬우면서도 심오한 전달법입니다.
예수께서는 구원을 설명하기 ‘잃은 양’, ‘잃은 은전’, ‘잃은 탕자’ 이야기를 연달아 하십니다. 세 비유의 공통점을 찾으면 구원이 뭔가, 어느 정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구원을 잃다
세 비유의 첫 번째 공통점은 ‘잃었다’입니다. 4절, 잃으면… 6절 잃은 양을… 사랑스런 양을 잃어버렸습니다. 8절 읽으면… 소중하게 여기던 은전을 잃어버렸습니다. 24절 잃었다가… 사랑스런 둘째 아들을 잃었습니다. 잃었다… 자기 포지션 이탈입니다. 사탄은 천사장이라는 자리, 아담은 자리에서 탈선했습니다.
삭개오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신분에서 이탈합니다. 이렇게 신분이탈에서 원자리로 회복시켜주는 것이 구원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셨다”(롬5:8)고 합니다. 죄인은 ‘죄를 지은 사람’으로 신분이 막장이고 타인의 평가가 막장입니다. 그래서 ‘저 같은 죄인이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라 합니다. 이런 처지의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으로 세워주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잃은 양 비유에서 ‘잃은 양’은 띨띨한 양으로 그런 양을 찾아내는 것이 구원입니다.
은전 비유에서 ‘은전’은 구석진 곳에서 먼지가 묻어 동전 노릇도 못하는 쇳덩이입니다. 값도 나가지 않는 동전을 때를 벗기고 제 노릇을 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구원입니다.
탕자 비유에서는 사람 노릇을 못한 불효막심한 아들을 죄를 탓하지 않으시고 사랑스런 아들로 받아주시는 아버지의 사랑! 원 위치로의 회복! 그것을 구원이라 설명합니다.
어떤 양, 은전, 사람을 잃어버렸을까요? 잃어버린 양은 100 마리에서 몇 번째 양일까요?
100번(꼴찌)-뭐든지 잘못은 꼴찌가 일으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100번 양은 앞의 놈을 따라갑니다. 100번은 시야가 많이 확보되어 있기에 길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지 않습니다.
1번 양-가장 안전합니다. 목자는 1번만 붙들고 갑니다. 그러면 99마리는 저절로 따라옵니다.
50번-앞에 반 뒤에 반, 눈감아도 그냥 갑니다.
100마리 중 누가 잃어버릴지 모릅니다. 모두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은전 비유 중에서는 10개 중에 몇 번째일까요? 몇 번째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여인은 나름 알 것입니다. 열 개 모두가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두 아들은 어떨까요?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두 아들이 아버지를 배신한다?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특히 작은 아들이 그러리라고는… 그런데 둘째 아들이 잃은 자가 되었습니다.
다윗 왕도 실족했고 게하시도 실족했습니다. 아브라함도 베드로도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누구든 위험부담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러기에 특정 인물들-세리와 창기들을 죄인으로 낙인찍고 자신들은 의인 행세했기에 구원받을 기회도, 구원의 기쁨도 놓친 것입니다. 사실이 이러기에 남들에 대해 말 못 합니다. 우리 구원을 늘 조심해야 합니다.
구원을 찾아서
세 비유의 두 번째의 공통점은 ‘찾는’ 이야기입니다. 구원은 모두 하나님께서 찾아내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다윗, 베데스다 병자, 삭개오-모두가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시고 찾아내시는 것입니다. 한국의 구원관은 불쌍한 구걸입니다. 우리가 너무 불쌍하니까 구원해주셨다? 이것은 이교도의 구원관입니다. 물론 성경에 그런 색채가 있지만 그런 처량한 구원이 기독교 중심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을 찾으시는가? 쓸만한 사람들만을 찾으실까요? 왜 찾는가? 불쌍해서? 아닙니다! 내 것이니까 찾습니다. 내 양이니까! 내 돈이니까! 내 아들이니까! 그래서 찾는 것입니다.
집을 나간 아들과 아버지-누구 속이 더 탈 것인가? 아버지가! 왜? 내 아들이니까!
목자와 양-누가 더 아픈가? 목자가! 왜? 내 양이니까!
여인과 은돈-누가 더 답답할까? 여인입니다. 그것은 여인에게 남편의 결혼의 징표, 사랑의 징표일 수 있고 어머니가 남겨준 유산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찾아 나섭니다.
왜 우리를 구원하시는가? 우리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우리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애착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그 사랑 때문에 아들을 보내고 우리를 대상으로 구원의 드라마를 만듭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주인공입니다. 기독교의 구원관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구원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큰 희생이고 투자이고 계획입니다. 굉장한 값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렇게 값진 것이기에 구원을 받은 우리들은 하나님에게는 굉장히 소중하고 귀한 존재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굉장한 투자를 하셨습니다. 양 찾았다 잔치하면 양 몇 마리를 더 없애는 손해입니다. 돈 한닢 찾았다 잔치하면 손해입니다. 1원짜리 동전 만드는 데 254원 소요됩니다.(2008년 자료=1원과 5원, 10원, 100원, 500원짜리 동전 만드는데 254원과 275원, 40원, 91원, 139원, 192원). 500원짜리 동전 제외하면, 제조비용이 동전의 액면가보다 훨씬 높습니다. 그래도 찾습니다. 1원이 없으면 거래가 안 됩니다. 은전도 하나가 없으면 아홉 개가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찾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들이며 잔치하는 것입니다.
재산을 탕진한 아들을 위해 잔치 베풀면 이중으로 손해입니다. 이러면 찾으나 마나입니다! 그래도 찾습니다. 왜? 내 것이니까! 사랑하는 내 소유물이니까! 손해와 상관없이 찾아냅니다.
구원은 막대한 투자이고 적자입니다. 독생자를 주신 투자는 막대한 적자입니다. 적자 끝에는 부도가 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부도를 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영광 보좌 비워 버리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빈털터리가 되셨습니다. 부도가 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 빚을 갚아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니까!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에게 큰 즐거움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죄인 하나가 돌아오면 하늘에서 큰 기쁨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구원을 얻다
세 비유의 세 번째의 공통점은 '기쁘다' 기쁨에 있습니다. 목자는 양을 찾아 5절 “어깨에 메고” 업고 간 것입니다. 너무 즐거워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40년을 먹여 살렸습니다. 모세는 이를 업고 갔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셔서 업고 다닙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에 업고 다닙니다! 사랑하니까 업고 다닙니다.
할아버지는 돈을 내면서 업습니다. 왜? 사랑하니까! 사랑은 업어줍니다. 그리고 너무 기뻐서 잔치를 베풉니다. 잃었던 양을 찾았기에 6절, 즐기자… 7절 기뻐하는 것이…, 양을 찾아 기뻐합니다. 은전을 찾은 여인도 9절 즐기자… 10절 기쁨이 되었느니라… 은전을 찾아 너무 기뻐 어쩔 줄을 모릅니다.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탕자를 찾은 아버지는 어떻습니까? 23절, 즐기자… 32절, 기뻐하는 것이… 한 영혼이 구원을 받았을 때 하늘에서 그 구원의 기쁨을 이기지 못하실만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을 봅니다. 천국은 영혼 구원으로 날마다 기뻐하는 곳, 잃은 자를 찾았다고 날마다 기뻐하는 곳입니다. 천국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23절 우리가 먹고 즐기자… 그러자 초대 손님들이 24절, 그들이 즐거워 하더나… 모두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아닙니다. 큰아들은 기쁨보다는 분노합니다. 28절, 그가 노하여… 기뻐하지 못하는 것은 그가 바로 잃어버린 자입니다. 장소에서, 신분에서는 제자리였지만 마음 상태에서는 잃어버린 자입니다. 자신이 그걸 몰랐을 뿐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윗은 죄로 인해 구원의 기쁨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51편에서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12절)라고 부르짖습니다. 코로나2년으로 구원의 시스템이 망가져 버린 우리 역시도 같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결론
미국 태생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이며 탁월한 극작가 유진 오닐은 생활무능력자인 아버지, 마약중독자 어머니, 알코올중독자인 형은 서로 애증 관계로 얽혀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작가로는 크게 성공을 거두었지만 삶은 불행했습니다. 첫아내와 아들이 자살하고 두 번째 아내와 아들도 정신이 온전치 못했습니다. 딸은 오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뻘인 찰리 채플린과 결혼하여 의절해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불행을 탄식하듯 이런 말을 합니다.
“인간은 부서진 채 태어나고 수선하면서 살아간다. 신의 은총이 그 접착제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부서지기만 했지 수선하지는 못했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려서 놓아버린 하나님을 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59세에 파킨슨병으로 깊은 좌절감에 빠져 6년간의 병상생활을 보낸 끝에 두 번째 부인의 곁에서 숨을 거둡니다. 그의 유언은 이것입니다.
“나를 조용히 간소하게 묻어주시오 사제는 부르지 마오. 만약 신이 있다면 그를 만나 인간 대 인간으로 애기를 나눠보겠소”
세속적 성공의 자리에 있었지만 그건 구원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삶이 부서졌지만 삭개오처럼 막달라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접착제로 인생을 수선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문학은 성공했지만 인생은 실패작으로 끝난 것입니다.
바다에 빠진 소년이 자신을 구해준 남자에게 “어떻게 이 은혜를 갚아야 할지…”라고 울먹이자 남자가 소년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괜찮다, 꼬마야. 다만 너의 생명이 구조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음을 앞으로 너의 인생에서 증명해 보이거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잃어버린 자들... 죄인들입니다. 죄인들을 되찾아서 원래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오셨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가 그 해당자가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 구원해 줄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였다는 것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이후의 삶입니다. 구원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하지만 구원 이후에는 구원자 예수님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던 코로나이전의 시대로 다시 돌아갑시다!
'주일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웅덩이에서 벗어나기(시편 40:1~3) (3) | 2024.11.13 |
---|---|
지금 마시는 물은 생수인가, 웅덩이물인가(예레미야 2:9~13) (3) | 2024.11.13 |
죽음 이후, 우리는 어떻게 될까?(전도서 3:19~22) (4) | 2024.11.03 |
[차별금지법 반대설교] 자비(慈悲)와 견책(譴責) 사이에서(레위기 19:9~10, 17~18) (2) | 2024.10.29 |
나는 왜 기독교 신앙을 믿는가?(신명기 33:26~29) (6) | 2024.1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