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일설교

지금 마시는 물은 생수인가, 웅덩이물인가(예레미야 2:9~13)

by 강정훈말씀닷컴 2024. 11. 13.
반응형

 

지금 마시는 물은 생수인가, 웅덩이물인가

예레미야 2:9~13

 

서론

지난 2022년 여름은 물폭탄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지역에 따라 80년만이다, 115년 만의 집중호우이다, 동작구는 250년 만에 한번 올까말까 하는 폭우가 내렸다 합니다. 물폭탄으로 사망·실종자는 20명 이상, 수재민은 수백 명입니다. 그래서 비! 하면 올해만큼은 끔찍할 정도입니다. 이런 재난상황에서 한 국회의원은 솔직히 비 좀 왔으면 좋겠다. 그것도 사진 잘 나오게라고 말해 국민의 공분을 샀습니다. 가십거리일 수도 있지만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더 왔으면 좋겠다, 해도 가십거리가 되지 않는 나라가 있습니다. 중동 특히 이스라엘은 1년 중 8개월을 비가 오지 않습니다. 가나안의 최남단 브엘세바의 연중 강우량은 200밀리미터 정도입니다. 사람이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강우량입니다. 이번에 동작구는 시간당 137mm의 물폭탄, 일부 지역은 누적 강수량이 300mm 넘었습니다. 제11호 태풍 힌남노가 닥쳤을 때 9 4일 오전 4시 제주 윗세오름에는 무려 946.5의 비가 내렸습니다이스라엘 사람이 들으면 물폭탄이 아니라 물풍년이라며 좋아할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태양빛은 한국과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뜨겁습니다. 그러니 중동지역에서 물은 음식물과 함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물을 얻기 위한 그 사람들의 노력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물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에 따라 두 종류입니다. 

사람의 손이 닿는 물과 손이 닿지 않는 물입니다. 손이 닿는 물은 그것을 얻기 위해 그만큼 고생하고 수고해야만 하는 물로 우물과 웅덩이입니다. 우물은 지하수이기에 중노동입니다. 웅덩이는 주로 산지지역에서 우기(雨期) 동안 내린 물을 저수하며 건기(乾期)에 마실 수 있도록 저장하는 시설입니다. 산지는 지대가 높았기에 지하수가 잘 모아지지도 않고 석회암층이 많은 지역이라 우물을 파는 것이 쉽지 않았기에 단단한 바위를 파서 웅덩이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손이 닿는 물이 우물과 웅덩이라면 손이 닿지 않는 물은 물을 얻기 위해 인위적인 노력이나 고생 없이도 저절로 얻을 수 있는 물들로 비, 이슬, 샘물, 시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오는 고생 않고 얻었기에 비가 올 때 유대인들은 우산을 쓰지 않고 맞으며 다니기도 하고 속옷차림으로 춤추어도 흉되지 않는 것은 중동에서나 볼 수 있는 구경거리입니다.(장재일 목사님의 목사님 밥하고 설교하세요 참조) 그러기에 우리식 개그로 표현하면, 유대인에게 이해가 되지 않는 개그는 나를 물로 보지마!”이다.

 

사람의 손이 닿는 물 손이 닿지 않는 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손이 닿은 물은 고생을 상징합니다. 변변한 도구 없이 돌을 캐내고 흙을 파내는 작업은 수십 일~수개월이 걸리는 노동입니다. 고생해서 우물을 파도 워낙 가물면 마르고 짐승이 빠져죽으면 메꾸어야 합니다. 웅덩이에는 곤충이나 가축의 배설물로 기생충이 버글거려 식수로 적합하지 못합니다. 시원한 생수가 아니라 미지근해서 갈한 목을 제대로 해갈하지 못합니다. 그런 물이라도 마셔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늘에서 내리는 비, 이슬, 천연적인 샘, 시내, 은 고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사람의 손이 만들어 내는 물은 고생이요 수고요 오히려 갈증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손으로 얻을 수 있는 물들은 마시면 시원해서 목이 마르지 않고 새 기운을 내는 생수요 청량수()였습니다. 그러니 제정신이라면 당연히 웅덩이 물보다는 샘을 찾고 맑은 강물을 찾아야 합니다. 웅덩이 물이 가축을 위한 물은 되지만 관리가 되지 않아 마실 물은 아닙니다. 제정신이라면 생수를 옆에 두고 웅덩이 물을 마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제정신이 아닌 일들을 하고 있다고 선지자는 책망하는 것입니다. 13!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선지자가 지적하는 백성들의 심각한 죄는 두 가지로,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 하나님을 떠난 것! 두 번째는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 그것도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입니다. 웅덩이는 빗물을 보관하려 바닥에 석회를 발랐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석회에 균열이 가서 바닥방수가 되지 않아 새어나가고 겨우 고여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해충들로 우굴거립니까? 백성이 스스로 웅덩이를 팠다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우상을 섬긴 사실을 가리킵니다.

 

일반사전에서 우상(偶像) 특정한 믿음이나 의미를 부여하여 나무, , 쇠붙이, 흙 따위로 만든 형상’, ‘신처럼 숭배의 대상이 되는 물건이나 사람 등 맹목적인 숭배의 대상이지만 우상은 헛된 것’ '허무한 것'(시97:7)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11절, '무익'을... ‘헛된 것은 실체가 없음에도 있는 것처럼 착시 현상을 만들어 영혼과 정신을 빼앗아 결국에는 사람을 껍데기만 남게 만드는 일종의 정신 흡혈귀로 무익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이해하지 못할 바가 많은데 그 하나가 바알과 아세라 우상숭배입니다. 바알은 원주민의 남신으로 석상(石像)입니다. 배우자인 아세라는 목상(木像)여신입니다. 아스다롯은 아세라 여신의 딸로 알려졌지만 지금은 별개의 여신입니다. 가나안 신의 특징은 다산과 번영입니다. 다산(多産)을 위해서는 음란한 의식이 거행되고(왕상 14:23) 농작물 번영에는 당연히 비가 필요합니다. 바알은 필수적인 두 요소를 충족시켜 주는 신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계시된 신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절대주권으로 이끌어 가시지만 중동의 신들은 만들어 진 신으로 그만큼 사람의 손으로 조종되는 신입니다. 일종의 자동판매기 원리입니다. 자동판매기는 내 노력으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은 바알과 아세라에게 다산이라는 번식력, 번영이라는 농작물의 풍작을 요구합니다. 두 신은 이걸 갖고 있다 생각합니다. 그들을 움직여 생식력과 비를 얻어야 하는데 그 원동력은 부부신을 흥분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전에서 여사제 남사제와 관계를 갖습니다. 비가 오지 않을수록 광분이 됩니다.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부부신도 흥분이 됩니다. 그래서 남신은 사정하고 여신은 오줌을 싸면 사정은 번식으로, 오줌은 비가 되어 풍작의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수도 없이 이 일을 합니다. 처음에는 종교적인 신성한 제사의미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는 육체적재미를 보는 일까지 곁들여져 중독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에 관해서도 마찬가자입니다. 이스라엘 우상숭배자들이 우상에 빠져 헐떡이는 것처럼 소위 경건하다고 자처하는 제사장들을 비롯한 율법주의자들은 성전 동물 제사와 율법에 중독되어 헐떡입니다. 율법이 그들을 온전하게 할 수 없음에도 율법을 통해 의를 얻고 구원을 얻으려 한 것입니다. 율법이 쉽게 그런 기쁨과 평안을 줍니까. 율법을 지킬 수록 오히려 죄의 모습들이 드러나는 딜레마에 빠져들었기에 더욱 그 율법으로 구원을 얻어내려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손으로 내려주시는 은혜의 삶을 외면하고  사람의 손으로 우물과 웅덩이를 파면서 고생하고 또 고생하게 된 것입니다. 우상에 중독되고 율법에 중독되니 게속되는 갈증으로 삶은 지치고 공허해졌습니다. 중독자들에게 생기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지요!           

중독(中毒). 뭔가, 그것이 없이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된 상태입니다. 

알코올, 마약 중독은 물질 중독이요 도박, 게임, 쇼핑은 행위중독입니다. 사상, 테러리스트들은 사상중독’, 광신은 종교중독입니다. 결국 중독이라 함은 조절 능력의 상실입니다.

예레미야는 심리학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성경구절은 심리학 중에서도 심리학입니다. 생수를 버리고 웅덩이를 파고 웅덩이 물을 마시는 것! 멀쩡한 사람들이 그 일을 합니다. 중독입니다. 생수에는 중독이 없습니다. 한번 마시면 갈증이 해소됩니다. 목마를 때까지는 물을 찾지 않습니다. 웅덩이 물은 미지근하기에 갈증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시고 또 마시고 그걸로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마시는 것입니다. 중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참 신인 것을 압니다. 그러나 여호와 신은 엄하고 조종되지 않습니다. 재미도 없다보니 우상을 찾습니다. 여기에는 윤리도 도덕심도 없습니다. 종교의식이라는 미명하에 공공연히 재미를 볼 수 있습니다. 간절히 구하다보면 어쩌다 비가 옵니다.  어쩌다를 위해 바알에게 매달리고 있습니다. 종교중독 우상중독입니다. 우상은 헛것,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그들의 우상숭배 행위를 조롱한 적이 있습니다(44:15).

이 나무는 사람이 땔감을 삼는 것이거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덥게도 하고 불을 피워 떡을 굽기도 하고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하는구나

 

사람이 뭔가 씌우면 미망(迷妄. 사리에 어두워 진실을 가리지 못하고 헤매는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미혹(迷惑.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함)에 빠진 것입니다. 헤매든 홀리든... 이런 종교중독 상태에 이른 것이 광신입니다. 종교심에 대한 조절 능력의 상실입니다.

예레미야가 백성들의 이런 상태를 책망한 것입니다. 이런 미혹에 빠져 결국에는 생수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웅덩이가 되는 우상을 섬기는 그들, 종교적인 바람은 피우되 본남편인 하나님을 버리지 못하고 겸하여 섬기던지 그런 어리석음의 상태를 드러내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이런 중독자들이 있습니다. 삭개오는 돈에 중독, 수가성 여인은 남자에 중독, 막달라 마리아는 귀신에 중독되고 빌립이 만났던 에디오피아 고관 내시는 종교에 중독된 사람입니다. 이들은 웅덩이 물에 빠져 벌어도, 벌어도 만족 못하는 돈의 갈증,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는 않는 성적 갈증, 수없이 예루살렘을 찾아도 찾아도 마음이 시원하지 못하는 갈증, 미쳐도 미쳐도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갈증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습니다

 

삭개오는 돈이 자기를 지켜준다 생각하고 수치감도 버리고 돈을 벌었습니다. 여인은 버림받으면서도 남자가 없으면 못 산다, 막달라 마리아는 귀신의 세력 하에 떠나지 못했습니다. 남성을 잃은 고관은 음행을 일삼는 가나안종교로는 채워지지 못해 예루살렘 종교를 찾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웅덩이 물에 갑갑한 갈증은 여전했고 사는 일에는 지쳐갔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찾아가셨습니다! 갈증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갔고 여인이 잃은 은전을 찾았고 탕자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인내가 아들을 찾은 것처럼 예수님께서 여인을 찾아 가셔서 물이라 자처하셨습니다.

이 물 사람이 파놓은 우물이지요!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 생수입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3,14)

 

초막절 명절이 끝나는 날에는 백성들에게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7:13, 14) 하십니다.

여인이 마시는 물, 삭개오 막달라 마리아, 내시가 마시는 물은 우물이요 웅덩이 물이요 니고데모와 공회의원 시몬이 마시는 물까지 우물이요 웅덩이 물이었습니다. 하류층 인생도 상류층 인생도 인생을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이들에게 주님은 내가 생수다! 내게 와서 나를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된다! 외치신 것입니다. 아무리 마셔도 물중독 종교중독이 되지 않는다! 진리이기에 중독현상이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복음입니다 

결론

미국 석유 갑부 록펠러에게  기자가 현재 가지고 있는 부유함에 만족하냐?” 묻자 아니! 라고 답했습니다. “얼마만큼의 돈을 벌어야 만족하겠습니까?” 재차 묻으니,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것이 웅덩이 물로 채워지지 않는 부분입니다. 록펠러는 회심하고 시카고대학을 비롯, 12개 대학과 4928개 교회를 봉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수를 마신 삭개오, 최고 권력이던 공회의원직을 버릴 각오로 무덤을 드렸던 아리마대 요셉, 세간의 비난을 각오하면서 향유를 바쳤던 여인은 생수의 참 맛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런 생수를 마셨기에 웅덩이 물들을 과감하게 배설물로 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마시는 물은 무엇입니까? 웅덩이 물입니까? 생수입니까? 웅덩이 물은 내 소견대로 사는 것으로 인생의 결정권을 내가 갖고 있는 인본주의입니다. 사울적인 삶입니다. 생수를 마시는 삶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며 사는 신본주의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삶의 주인이다! 왕되신 예수님을 선포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웅덩이 물을 마시면서도 정작 갈증이 없다면 영혼이 맥이 약한 것입니다. 바르게 믿고 바르게 살고, 잘 믿고 잘 살아야 합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아버지께로부터 온 생수가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웅덩이 물입니다.(요일 2:16).그런 자랑들로 인생의 갈증을 해소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자랑이고 편안함을 주었던 것들로 늙을수록 허전하고 소망을 잃을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 하면서도 내 식대로 믿으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강수에서 헤엄치고 있지 않다면 우리의 믿음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