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慈悲)와 견책(譴責) 사이에서
레위기 19:9~10, 17~18
“동성애자는 긍휼히 여기되 동성애는 견책해야”
본문 10절, 18절에 “나는 여호와니라”가 나옵니다. 같은 ‘여호와’이지만 10절 부분은 자비와 인애의 하나님, 18절은 죄에 단호하신 거룩하신 하나님! 사랑과 공의라는 두 얼굴의 하나님입니다. 상반되는 두 명령을 어떻게 통합할까,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과제입니다.
자비의 하나님
구약시대의 4대 약자는 고아, 홀여인, 장애인, 이방 나그네(외국인)입니다. 약자에 대한 보호 명령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애로우신 분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신분, 빈부, 혈통으로 차별하지 말고 따뜻한 마음으로 돌보라고 명하십니다. 유대인의 정신이자 기독교 생활의 중심입니다.
세계 억만장자 기부클럽 ‘더 기빙 플레지(The Giving Pledge)’는 10억 달러 이상 자산가들로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기로 서약한 부자들의 모임입니다. 50대 기부자 명단에는 미국 인구의 2%에 불과한 유대인이 평균 30% 이상을 차지합니다. 유대인의 자선 행위는 “약자를 돌보라”는, 2000년 동안 이어온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가르침에서 나옵니다.
9절, “…곡식을 거둘 때에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10절,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가난한 동족과 외국인을 위한 배려입니다. 이런 배려는, ‘빌어먹는 것’이 아니라 ‘벌어먹는다’는 당당함을 가난한 동족과 이방인들에게 주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정신세계는 유교 중심의 충효(忠孝)사상입니다. 왕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자! 다 좋은 말이지만, 여기서 정성을 다하는 효의 대상은 부모이지만 왕도 부모입니다. 결국 충효사상은 황실체제 유지의 기득권 이념이 더 강합니다.
유대 사회는 하나님이 우선이요 다음이 이웃입니다. 왕과 부모에 충성하지 않거나 불효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면 이런 복지시스템의 혜택을 연로하신 내 부모가, 나중에는 국민 모두가 누린다는 것입니다. 이타적이면서도 상당히 실리적입니다.
유대인은 일찍부터 수입의 일정 부분을 사회에 환원하는, 사회 정의, 사회 공의를 배웁니다. 공의를 ‘체다카’라 하는데 공의를 이루는 최고의 수단이 자선입니다. 왜 공부하고 부자가 되어야 하나, 체다카를 실천하기 위한 목적이라 배웁니다. 유대부모는 안식일에 용돈을 주면서 일정 부분을 체다카 저금통(푸시케)에 넣도록 훈련합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몫입니다.
유대인의 율법 정신은 ‘체다카’와 ‘미슈파트’로 요약됩니다. 체다카는 공동체 내의 약자를 돌보는 공의로운 정신, 자선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4대 약자에 대한 배려입니다. 상대 쪽에 있는 미슈파트, ‘정의’는 하나님을 향합니다. 세상 통치자는 하나님 한 분이기에 모두는 평등하게 대해야 하지만 평등함을 유지하는 잣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엄격한 정의입니다. 그러기에 진짜 평등은 죄도 용인하는 무차별 평등, 죄도 차별해선 안 된다는 차별금지법이 아니라 정의, 거룩이 전제되어야 하며 하나님이 기준이 됩니다.
유대인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거룩하신 하나님
2절,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거룩해야 평등하고 거룩한 공동체에 체다카가 제대로 흘러가게 됩니다. 공동체가 거룩하지 못하거든… 17절,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미워하지는 말아야 하지만 ‘견책하라’…. 개역성경에는 “책선하라”, 이는 ‘바로 잡아주다’, ‘교정하다’, 따라서 형제 중 누가 범죄했을 때 반드시 현명한 방법으로 잘못을 바로잡아 주라는 것입니다. 죄를 범했을 때 책선해야 할 죄목들은 앞장 18장에 나옵니다. 근친상간(6~18절), 인신제사(21절), 동성애(22절), 수간(獸姦. 23절)… 오죽 가증했으면 20장에도 반복하겠습니까?
이런 죄들! 개인을 더럽히고 사회를 더럽히고 땅을 더럽히는 죄는 엄격하게 다스리라 하십니다. 이런 의무를 제대로 하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19:17), 이 말을 뒤집으면, 하나님의 정의 미슈파트를 파괴하는 공동체의 죄를 태만히 했을 때는 너희 자신이, 사회가 그 죄를 담당하게 된다! 그러면 사회가 타락하고 국가가 무너진다는 경고장입니다.
여기에 한국교회의 고민이 있습니다. 사람에 대해서는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나님, “차별하지 말고 자선하라!” 그러면서도 죄에 대해서는 한없이 엄격하신 하나님! “죄에 자비를 베풀지 말라!”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가 부딪치는 딜레마! 그것이 차별금지법으로 우리 앞에 있습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왜 반대할까
평등법! 차별금지법! 얼마나 좋아요? 성차별, 학벌차별, 종교차별, 인종차별을 하지 말자는 것이지요. 그래서 같은 기독교인들조차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한국교회의 행태를 비난합니다. 기독교가 앞장서야 할 평등을 오히려 반대하는 몽니를 부린다고… 차별금지법 반대는 전도의 문을 막는 일이라고…. 한국교회가 그걸 왜 모르겠습니까? 알면서도 이것은 차별을 빌미로 하는 역차별법, 나쁜 차별법이라는 것을 알기에 체다크, 하나님의 공의와 미슈파트, 하나님의 거룩한 정의를 세우기 위해 결사반대하며 평소 점잖은 목사님들조차 광화문에 모여 기도하면서 공개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포괄적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무서운 결과들이 나타납니다. 기독교만이 유일하다는 가르침은 종교차별이기에 금지되고 십자가 복음은 희석됩니다. 동성애자 교역자들도 해임할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대혼란에 빠지고 기독교는 인권이나 도덕종교로 세상에 굴복하고 맙니다.
우리는 지금 ‘자비와 견책 사이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더 치열하게 세상을 직시해야 합니다. 하나님 속성의 양면성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18절에서는 높은 수준의 자비의 윤리를 제시합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따듯한 배려와 함께 명령마다
“나는 여호와이니라”(10, 18절)
당신이 누구임을, 죄를 심판하시는 거룩과 공의의 여호와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기에 너희도 거룩하라! 동성애자들이나 젠더들을 ‘사랑하는 것’과 ‘옳다고 편드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그들은 사랑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과 반대의 삶을 사는 그들에게는 그릇됨을 말해야 합니다.
차별금지법은 오히려 동성애자들의 회복의 길을 막고 더 비참한 삶으로 몰아넣습니다. 비참함에 대한 동정이 없는 것은 오히려 평등법,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평등법을 발의한 국회의원, 본회의에 상정되었을 때 찬성한 국회의원은 다음 선거에서 무조건 표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5천표 미만으로 당락이 결정되는 국회의원들이 기독교 교세를 무시하는 것은 한국교회는 이념, 지역, 세대... 등으로 갈려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각성해야 합니다. 내 정치관을 넘어 한국교회를 위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과 표찍기가 달라서야 되겠습니까?
한국교회가 야성의 십자가 보혈의 믿음을 붙들어야 합니다. 인권(人權) 위에 신권(神權)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무너뜨리는 모든 시도에 저항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한국교회가 살아남고 거룩한 세대를 다음교회에 넘겨주는 유일한 대안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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