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가 대한민국을 웃게 해야 한다!
창세기 21:1~7
서론
코로나 3년으로 인해 생겨난 것들은 무엇이며 사라진 것들은 무엇일까요? 생겨난 것들은 거리두기, 마스크, 일찍 퇴근하기… 등이라면 사라진 것들은 예배와 교제와 웃음입니다. 특히 웃음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동안 한국인의 웃음이 80이었다면 지금은 20이라고 할 정도로 웃을 일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니 기쁘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웃음은 ‘엔도르핀’처럼 사람들을 활기차고 건강하게 하는 물질의 분비를 증가시킵니다. 혈압을 안정화시키고, 폐 속의 잔류 공기를 감소시킵니다. 혈액 내 산소화를 증가시키고 말초 순환의 증가로 피부 온도를 상승시킵니다. 소화 촉진, 근육에 산소 공급 증가, 근육의 긴장 완화, 통증도 감소시킵니다. 따라서, 웃음은 심혈관, 호흡기 질환에 상당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웃음은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 중의 하나입니다. 동물은 본능적 의성어(擬聲語)는 있어도 희로애락(喜怒哀樂)으로서의 웃음은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단순한 것이지요!
인생 행복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웃음이 없으니 요즘은 예배하러 나와도 마스크에 막혀 웃을 일이 없으니 기쁠 것도, 행복한 일도 없습니다. 다크서클(dark circle)이 얼굴에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다크서클, 그늘이 있습니다. 우리가 웃어본 적이 언제던가요?
4세기에 살았던 의사 밀레투스는 ‘웃음’이라는 헬라어 ‘겔로스(gelos)’는 ‘건강(health)’이라는 어원에서 비롯되었다고 했습니다. 고대인들이 웃음을 건강(健康)이라고 한 것은 지혜로운 탐색입니다. 그만큼 웃는 사람은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행복하다는 의미도 들어있겠지요. 그래서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한국의 문화는 웃지 않는 문화입니다. 남자들이 웃으면 체신 머리 없다, 여자들이 웃으면 헤프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가 경직되고 소화제 판매 1등 국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웃음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큰 은총입니다. 웃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떻게 웃고 살며 그 웃음을 증폭시켜 나갈까요? 6절을 통해 살펴봅시다.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웃게 하시는 분을 만나 웃었다!
인생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것들은 많습니다. 아내가 남편의 기쁨이 되고 아내가 남편에게 기쁨이 됩니다. 그러기에 얼마나 많이 서로를 인하여 웃고 삽니까? 아이들은 우리에게 얼마나 웃음을 선물해 줍니까? 우리가 자격증을 땄을 때 졸업장을 땄을 때, 돈과 명예와 좋은 사교와 친교들은 우리에게 웃음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오는 웃음에는 뒤끝이 있습니다. 부부가 기쁨과 웃음이 되기도 하지만 서로로 인해 화도 나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열개의 즐거움과 웃음을 주지만 그보다 더 많이 걱정거리가 되고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돈은 기쁨이 되는 순간보다는 늘 걱정거리를 만들어 냅니다. 수료증 졸업장도 색이 바래지면서 기쁨을 잃은지 오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 웃음의 한계이며 불완전함입니다. 외부에서 들여오는 모든 웃음에는 그 뒤 끝에 허전함과 씁쓸함이 있습니다.
사라여인도 잘 난 남편으로 웃었습니다. 사병들을 거느리고 종들을 부리고 사는 집안의 여주인으로 얼마나 뿌듯하고, 자신이 누리는 행복으로 웃었던 날들이 많았습니까? 근래에는 이스마엘을 안고서도 웃었던 날들이 있습니다. 여인의 마음에 이스마엘은 가시와 같은 존재였지만 그래도 천진난만하게 웃는 아기가 미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웃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는 그만한 허전함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태(胎)였습니다. 웃어도 어쩌다 짧게, 체면으로나 웃을 형편입니다. 단순히 아이가 없는 여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슬픈 것이 아니라 남편과 맺은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자기 때문에 늦은 것이 미안하고 어쩌면 그 위대한 언약 속에 본인이 제외될 수도 있다는 마음이 들면 웃다가도 웃음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언약의 성취이며 선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로 웃게 하신다고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웃게 하실 때 그 웃음은 완전한 웃음이며 사라지지 않는 행복한 웃음입니다.
하나님은 웃으시는 원동력입니다. 창조사역 후에 웃으셨습니다. 창조된 만물에 원더풀(wonderful) “좋다!” 웃으셨고 사람이 가정을 꾸려 사는 것에 “좋다!” 웃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과 웃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진짜 웃음은 하나님께로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넣어주신 웃음만이 진짜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생으로 근심하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애가3:33). 인생을 기쁘게! 웃게 하시는 분입니다. 사탄은 불평과 탄식과 원망과 낙담을 주지만 하나님은 기쁨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기뻐하고 제대로 웃고 살려면 하나님을 대면해야 합니다. 매일 대면예배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전이되는 웃음으로 내 마음의 호수지가 웃음으로 가득 채워질 때 인간세상의 작은 웃음들이 그 호숫가에서 진전한 웃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웃음을 안아 웃었다!
유대인의 속담에 “향 싼 종이에 향기가 나고 생선 딴 종이에서 비린내가 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웃고 살려면 제대로 된 웃음거리를 안아야 합니다. 애물단지를 안고 잠시 웃는다고 오래갈 웃음이다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내가 웃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웃음거리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롯은 조카인데도 벌써 두 딸의 약혼녀, 사윗감이 있습니다. 삼촌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조바심 가운데 부부가 여종에게서 후사를 얻을 것을 합의했습니다. 이 조바심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는 조바심 때문에 하갈에게서 이스마엘 아들을 얻기는 했습니다. 아들을 안고 일시적으로 기뻐했고 웃었습니다.
결과는 어땠습니까? 21:11,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그냥 스쳐지나가는 근심이 아닙니다! 아예 자리를 잡은 근심! 애물단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근심은 결국 16절 소리 내어 우니… 모자가 웃는데 모자를 보내며 아브라함은 마냥 웃었겠어요? 저도 남모르는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조바심이 만들어 낸 근심이요 눈물입니다.
짐 엘리어트는, “사탄은 세 가지를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다. 소음과 조급함과 군중이다,”고 말했습니다. 시끄러움과 조바심, 사람들로 우리는 정신이 없습니다. 정신들 바짝 차려야 합니다. 제대로 된 이삭의 기쁨을 잡아야지 소음과 조급함과 사람들의 이런 저런 소리에 근심덩어리가 될 줄 모르고 이스마엘을 안고 성공했다고 행복하다고 웃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고 보존해 주시고 역전시켜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만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기쁨이 되고 오래오래 웃게 하십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소산물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기쁨이 되지만 사실은 두고두고 말씀이 되고 근심이 됩니다. 하갈은 약속이 없는 아들을 낳고 웃고 행복해 한 것입니다. 가짜 행복에 속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모두에게 웃음을 선사합니다.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2절,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두 절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반복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삭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삭은 말씀하신대로,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태어난 아들입니다. 그러기에 모두에게 기쁨이 되었습니다. 이삭의 이름의 뜻이 웃음입니다. 미소인 것입니다. 그 아이는 약속의 아이였기에 약속 밖에 있는 하갈과 이스마엘 외에는 모두에게 웃음이 되었습니다.
약속의 자녀에게만 기쁨이 있고 웃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웃음을 안았기에 제대로 웃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웃음이기에 사라는 웃음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소유한 것 같은데도 왜 기쁨이 없고 웃지 못합니까? 그건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식이라고 모두 약속의 자녀가 아닙니다.
한국 교회는 어떻습니까? 한국 교회는 이삭입니까? 이스마엘입니까? 당연히 이삭입니다. 140여년 가까이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었습니까?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원리 하에서 천민들 백정들 여성들 어린이들 장애인들 고아들 환자들 젊은이들에게 한국 교회는 웃음을 안겨준 이삭과 같은 교회입니다. 그렇다고 한국 교회 안에 이스마엘적인 요소들은 없는 것일까요?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들, 사업적인 경영마인드, 인간적인 머리 굴림… 등으로 교회가 이렇게 비대해지고 중대형교회들이 되었다면 이건 이삭보다는 이스마엘을 낳은 것입니다. 지금은 이스마엘을 품고 있지만 그건 언약도 약속도 없기에 기업도 없습니다. 떠나보내야 할 일시적인 축복이고 웃음이었을 뿐입니다.
지금 우리 품에 안겨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이삭을 안아야 웃는 것이지 아무리 이스마엘을 안고 성공했다고 떠들어봐야 그건 씨도둑 자고새가 남의 알을 품고 있는 상황일 뿐입니다.
내 안에 있는 것이 이삭인가, 아니면 이스마엘인가? 코로나 시대에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웃음을 나누어 더 웃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얻게되었을 때 사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6절, 다 나와 함께 웃자~
주변에 있는 여인들에게 자기의 기쁨, 자기의 행복, 자기의 기쁨으로 초대한 것입니다. 그 여인들 중에는 자기처럼 마음이 슬프고 아픈 여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웃기는 했지만 돌아서면 마음이 슬퍼지는 그런 여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여인들에게 간증적인 초대입니다.
“오늘은 슬프지만 나처럼 말씀을 믿고 묵묵히 순종하고 있으면 오늘 나처럼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여러분들도 나처럼 웃는 날이 올 것이다. 웃음덩어리 이삭을 안고 웃을 날이 올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웃게 하시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나의 웃음에 동참해서 같이 웃자! 너희들이 웃는 날에 나도 너희들에게 웃음을 보태줄 것이다.”
사라는 이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주변 이웃들에게 나눠줍니다. 이웃들을 웃게 만들어 줍니다. 이삭은 그런 일들을 할 아들이고 아브라함의 자손 이삭의 자손들은 세상을 웃게 할 민족입니다. 그러나 훗날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하나님을 공유하려 한 것이 아니라 독점하러 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쁨을 잃어버리고 오랜 세월 처절하게 울고 산 비극의 민족이 된 것입니다.
가난한 소녀가 신사에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 은혜를 무얼로 갚아야 할까요?”
“원금은 갚지 말고 이자만 내거라!”
“그렇게 많은 이자를 제가 어떻게 낼 수 있을까요?”
“이자는 돈이 아니다. 내 환한 웃음으로 이자를 내거라!”
도움에 대한 이자를 웃음으로 내라는 것입니다. 너도 웃고 살아야지만 남도 웃게 하는 일에 네 웃음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소녀는 신사의 말대로 세상을 향해 웃었습니다. 청순한 소녀의 미소는 그 미소를 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총탄이 오고가는 전쟁터에서 초년병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때 앞에 포복해 있던 소대장이 브이(v)자를 보이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그 웃음은 걱정마라, 하는 격려의 미소였습니다. 작은 미소 하나가 소년을 살린 것입니다.
그래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자도 웃음입니다. 많이 웃는 것이 하나님을 미소 짓게 합니다. 웃는다고 눈이 닳고 표정에 주름살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밝아지고 더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그 웃음을 이웃들에게 나누어서 이웃들도 웃으며 살게 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좋은 것입니다. 이런 기쁨을 웃음으로 표현하지 않는다면 언제 웃을 것입니까?
결론
지금 모두의 마음에 그늘이 있어 웃을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슴이 답답합니다. 요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사람의 기쁨과 즐거움이 말랐다고 끊어져 버렸다고 탄식합니다. 자연재앙으로 인해 예루살렘이 크게 황폐되고 기쁨이 떠난 상태를 탄식합니다.(1:12, 16). 그러나 절망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만민에게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면 다시 기쁨이 회복된다 합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요엘 2:28),
29절,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요엘은 남녀노소에게 성령이 부어지면 성령으로 충만해서 신앙생활이 기쁠 것이라 합니다. 기쁨이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가 성령 충만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성령 충만으로 무장해야 웃음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웃고 사는 사람들!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보다 더 좋은 전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코로나의 터널을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다시 웃음을 회복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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