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채기를 해야 산다!
열왕기하 4:32~37
서론
사람에게 최악의 절망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죽음입니다. 죽음은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 위로해 줄 수도 없습니다. 죽음이 그러하거늘 자식의 죽음은 어쩌겠습니까? 부모의 죽음도 배우자의 죽음도 세월이 지나면 묻을 수 있고 잊어질 수도 있지만 자식의 죽음은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왜냐? 가슴에 담아두기 때문입니다.
수넴 여인이 지금 그런 비극적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님의 예고대로 자식을 얻어 금이야 옥이야 늦은 행복을 누리며 키웠는데, 아이가 잘 자라다가 어느 날… 웬말입니까?
19절, 내 머리야… 머리 아파… 하더니 20절, 숨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강아지도 이렇게 쉽게 죽지는 않을 겁니다.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이럴 때 신앙인들이 취하는 행동은 대충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며 믿음의 길에서 떠난다.
-신앙은 버리지 않지만 식어버린 채로 교회를 다닌다.
-때로는 안티가 된다.
-하나님의 섭리를 찾으며 슬픔 중에서 견딘다.
여인은 죽은 아들을 붙들고 있지 않습니다. 그녀는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속성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사람 목숨을 갖고 거래하거나 장난치는 분이 아닙니다. 아이가 온 것도 섭리라면 간 것도 무슨 섭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 섭리를 알려고 엘리사를 찾아간 것입니다. 올 때의 비밀을 아는 선지자님이라면 가는 것의 비밀도 알겠지요!
28절,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
그리 일찍 데려갈 아들이라면 왜 주셨느냐, 원망보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이런 질문 앞에서 참 난감합니다. 교인들 가정에 느닷없이 광풍이 불어 모든 걸 다 날려버립니다. 특히 귀부인처럼 주의 종을 잘 섬기며 교회를 잘 섬기던 가정에 이런 고난의 광풍이 불면 뭐라고 위로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엘리사도 여인처럼 하나님의 속성을 알았습니다. 이런 상황은 하나님의 속성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뭔가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고 아이에게로 갑니다.
32절, 아이는 이미 죽어 있습니다. 엘리사가 아이를 위해 두 번을 기도했더니
35절 아이가 일곱 번을 재채기하고 살아났습니다. 당시에는 긴장된 시간들이지만 세월이 흘러 우리가 현대독자의 입장에서 읽으니 무슨 동화와 같고, 재미가 있습니다.
성경에 재채기에 대해 기록한 곳은 35절 본절과 욥기 41:18 딱 두 번입니다.
“그것이 재채기를 한즉 빛을 발하고 그것의 눈은 새벽의 눈꺼풀 빛 같으며”
아이가 죽은 원인은 19절, 머리가 아파서입니다. 추수하는 아버지를 따라 들에 갔다가 일사병에 걸린 것 같습니다. 일사병은 팔레스틴에서 흔하고(시121:6; 사49:10) 추수 때는 일 년 중 가장 더운 시기여서 일사병에 걸리기 쉬웠을 것입니다. 아니면 들에 있는 것을 잘못 주워 먹어 목구멍에 걸려 채했다가 숨이 끊어진 것 같습니다.
어떻든 엘리사 선지자가 간절히 기도했을 때 아이는 에치~ 재채기를, 그것도 일곱 번을 하고 살아났습니다.
감기, 재채기, 딸국질은 비슷합니다.
기침은, 이물질이 기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 폐와 기관지 내의 유해 물질을 제거하기 위한 기도의 방어반사입니다. 기침이 8주 이상 지속하면 만성기침으로 결핵, 기관지확장증 등의 질환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재채기는 강한 냄새, 먼지 등으로 인해 코점막의 자극으로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생리적으로도 생기나 발작적이고 연속적으로 일어나면 병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침과 재채기의 차이는 기침은 목에서 폐에 이르는 부분에서 나타나는 반응으로 의성어로는 ‘콜록콜록’으로, 재채기는 코 부분에서 나타나는 반응으로 의성어로는 ‘에취’로 표현됩니다.
딸꾹질은, 횡격막 및 호흡작용을 보조하는 근육이 갑자기 수축하며 소리가 나는 현상입니다. 엊그제 브라질 자이르 보우소나루(66) 대통령이 열흘간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수술 직전까지 갔었습니다. 딸꾹질이 그만큼 괴롭고 힘듭니다. 우리 이장로님도 딸꾹질로 엄청 고생했습니다. 전원주택으로 이사해서 지금은 거의 회복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 귀부인의 아들은 재채기를 고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채기를 통해 살아났습니다. 선지자의 안수기도를 받고 일곱 번 재채기 하더니 살아났습니다. ‘동의보감’ 내경편에는, “하품은 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고, 재채기는 기가 통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라고 기록됩니다.(의학강목).
그러니까 아이는 선지자의 기도능력의 기(氣)가 통하면서 재채기를 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재채기를 하지 않았다면, 한두 번이라도 하다 그만 두었다면 아이는 살아나다 다시 죽었을 것입니다. 재채기를 세게 함으로서 아이는 소생한 것입니다. 재채기는 필요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재채기는 세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물질을 내보려는 시도입니다.
-보통 숨으로는 안 되니까 강력하게 폭풍 같은 능력입니다.
-이물질이 나갈 때까지 계속 됩니다.
강문호 목사님은 그의 설교에서 현대인에게는 일곱 가지 이물질이 있다고 했습니다. 일곱 가지 이물질을 강력한 재채기를 통해 내 보내면 맑은 영이 되고 살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알레고리적(우의, 풍유) 성경 적용이지만 우리들의 설교가 이런 경우의 해석들이 많습니다.
목사님의 말씀하시는 이물질은 우선 ‘혈기’입니다.
화병이 혈기입니다. 사람이 혈기를 부리면, ‘호흡이 거칠어지고, 심장이 빨리 뛰고, 혈압이 오르고, 위와 창자로부터 심장 근육 중추신경으로 옮겨 간다. 소화 작용이 멈추고 간에 비축되어 있던 당이 배출된다. 혈기를 내면 육신과 정신이 병들게’ 됩니다.
다음은 우울증입니다. 사는 의미가 없으니 인생에 재미가 없고 매사가 귀찮습니다. 코로나가 장기간 되면서 우울증이 신앙인들의 기쁨까지도 갉아버리고 있습니다.
셋째는 염려 근심입니다. 염려 근심은 사람을 파멸로 몰아가는 악당입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얼굴에 근심이 있으면 위에도 근심이 있습니다. 마음에 근심하면 내장도 근심하게 됩니다. 근심은 근심하는 사람을 파멸시킵니다.
넷째는 열등감입니다. 열등감은 자존심과 연결이 됩니다. 이것 때문에 죽고 삽니다.
다섯째는 스트레스입니다. 너무 피곤하거나 압박을 받으면 몸과 정신이 감당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과부하가 걸려 터져버립니다.
여섯째는 실패로부터 오는 자신감 결여입니다. 실패가 몇 번 반복되면 자칫 트라우마로 자리를 잡아 아예 일을 못합니다. 실패를 두려워해서 시작을 못합니다. 폐인이 되는 것이지요. F. 스콧 핏제랄드는 “한 번의 실패와 영원한 실패를 혼동하지 마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욕심입니다. 누구에게나 다섯 가지 욕심, 오욕(五慾)이 있다는데 재물욕, 명예욕, 식욕, 색욕, 수면욕입니다. 이런 욕심들이 채워지지 않으면 욕구불만에서 병이 생기게 됩니.
오래된 통계이지만, 미국에서는 하루 2,000만개의 알약 수면제가 팔린답니다. 신경안정제를 복용하는 이가 세계에 25억 명이라는 통계도 있습니다.
(이상 일곱 가지에 관한 내용들은 강문호 목사님의 설교를 발췌했음)
수넴 여인의 아이는 속에 꽉 끼어있는 것 때문에 죽었다가 재채기를 일곱 번 하고 살아났습니다. 우리도 재채기로 일곱 요소를 몰아내야 건강한 신체와 감정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죽은 아이가 어떻게 재채기를, 일곱 번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우선 어머니의 믿음입니다. 모두 죽었다고 했을 때, 그래서 장사지낼 준비를 하려 했을 때 여인은 21절, 하나님의 사람의 침상에 눕혔습니다. 씨를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33절, 선지자는 은밀한 가운데 기도하면서 34절, 신체적인 접촉을 했습니다. 스킨십은 접촉입니다. 접촉은 내 것을 상대방에게 주는 것입니다. 코와 코가 접촉하고 눈은 눈으로 접촉하고 손은 손으로 접촉하니 온기가 돌고 따뜻해지기 시작합니다.
이 정도에서 끝났다면 자동차가 시동이 걸리다가 꺼져버리는 것처럼 아이는 살아나다가 꺼져버렸을 거예요. 선지자는 이런 동작을 35절, 반복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가 재채기를 일곱 번이나 하면서 눈을 떴습니다. 기도(氣道)가 막혔던 것이 재채기를 통해 뚫렸던 것 같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고 접촉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생령이 됩니다(창2:7). 생령은 ‘생물’이요 ‘산 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선지자의 눈과 입과 손을 통하여 아이에게로 전이되었고 살리시는 그 능력의 생기가 들어가 아이는 살아났던 것입니다. 재채기를 통하여 기(氣. 생기)가 통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접촉한 사람들은 중풍병자가 일어났고 죽었던 자들이 살아납니다. 어떤 경우에는 흙을 발라서 신체적인 접촉을 하니 눈을 떴습니다.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가에 접촉했더니 혈루 근원이 마르고 고침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영과 접촉할 때 거룩한 영이 우리 안으로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맑은 영과 접촉할 때 맑은 영이 우리 안으로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접촉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면 재채기를 하듯 막혔던 기도가 터지면서 은혜를 받게됩니다.
이런 접촉이 예배를 통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자주 모여 예배해야 합니다. 예배하면서 찬송과 뜨거운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과 접촉하고 대면해야 합니다. 비대면예배라는 예배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이상한 ‘예배 이름’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꽉 막혔던 것들! 한국 교회의 막혔던 것들… 에치~에치~ 일곱 번하면서 다 토해버리고 온정(溫情)이 가득한 대한민국, 한국 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막혔던 것들… 화병 혈기, 우울증, 염려 근심, 열등감, 스트레스, 실패 두려움, 욕심… 이런 꽉 막혔던 것들이 에치~ 에치! 두 번 해서 안 되면 세 번을, 세 번 해서 안 되면 다섯 번을… 다섯 번을 해서 안 되면 일곱 번 재채기로 모두 토해내어 버리기를 기원합니다. 십자가 능력이 만들어 내는 재채기로 모두 토해버리고 새로워지는 기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결론>
미국에서 서로 만나 인사하는 말 중에 “God bless you!”(신의 축복이~)라는 인사가 있습니다. 사실 이 축복의 근원은 누군가 재채기를 하면 주변 사람들이 해주는 말입니다.
영국에서 페스트에 대한 공포가 휩쓸던 대역병(1664~1665) 시대에 생겨났습니다. 당시에는 재채기마저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큰 질병에 걸릴 조짐이라거나 영혼이 빠져나가는 신호라는 등 온갖 억측… 또한 위생적으로 재채기를 하면 침이 튀고 균이 번집니다. 그래서 신의 즉각적인 도움이 필요한 것으로 간주돼, 주변 사람들이 신의 축복을 비는 말을 해주던 관습이 굳어져 오늘은 일상적인 인사말이 된 것입니다.
오늘 나는 무엇을 토해내는 재채기를 해야 합니까?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재채기로 토해야 할 막힌 것은 없습니까? 부부 사이에 재채기로 토해야 할 막힌 것은 없습니까? 나와 너 사이에 재채기로 토해야 할 막힌 것은 없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도 크게 재채기를 합시다! 그러면 살 길이 생깁니다. 기(氣)가 통하면서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알아보고자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갔던 수넴 여인! 하나님의 섭리를 알아보고자 죽은 아이를 붙들고 하나님의 섭리를 찾아갔던 엘리사 선지자에게는 해피엔딩의 열매를 맺습니다.
37절, “여인이 들어가서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아들을 안고 나가니라”
어떤 아들입니까? 죽은 아들이 아니라 산 아들입니다. 몸이 식은 아들이 아니라 온기로 따듯해진 아들입니다. 다시 부모에게 기쁨이 되는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낸 아들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코로나의 터널을 빠져나갔을 때 내 품에 산 것을 안고 나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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