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주일]
당신도 늙는다!
누가복음 10:30~37
서론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오늘 연세가 좀 있으신 성도님들에게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원래는 65세 이상 성도님들에게 드리려 했는데 100명이 됩니다. 그래서 70세 이상되시는 분들, 66명에게만 선물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교회도 40여년의 역사를 눈앞에 바라보게 되니 어느새 고령화는 아니어도 노년화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버이주일마다 “효도하라!”는 설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효도를 받아야 하실 분들이 상당히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분들에게 효도하라! 부모님들도 안 계신 분들에게 효도하라! 고 하면 오히려 죄책감만 들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젊은 성도님들에게 효도하라! 하고 다음 해에는 효도를 받는 어버이자신들을 대상으로 설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어버이주일에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본문으로 택했습니다. 제목도 “당신도 늙는다!” 상당히 도발적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웃 사랑! 차별하지 말고 일을 핑계로 이웃을 외면하지 말라!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이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공경하는 일이다… 이런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는데 그 이웃이 누구일까, 바로 연세 많으신 어르신들 어버이들입니다. 교회 안에 계신 어르신들이 오늘은 '이웃'에 해당됩니다. 그들은 늙었기에, 그만큼 상처자국도 많고 지금도 상처를 받고 있기에 이웃입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늙음에 대해, 장수에 대해 제대로 가르쳐 주지 못했습니다. 살다죽으면 천국 간다, 그것만 가르쳤습니다. 55세까지 열심히 일하며 가족을 먹여 살리다 61세에 환갑을 보내고 몇 년 살다 천국에 가면 되었습니다. 특별한 병에 걸리지 않는 한 자리 보전하지 않고 살다갔기에 애석함과 아쉬움이 컸습니다. 지금은 장수무대,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생-노-병~~~사합니다. 병에서 너무 오랜 세월을 보냅니다. 그러니 본인이나 간병하는 가족들이 너무 지치고 힘들고 미안하고… 세상을 떠나면 그동안 구박한 것이 너무 미안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그런 사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30절,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 ‘몸에 지닌 모든 것을 빼앗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것을 빼앗기고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거의 죽’게(30절) 되었습니다. 개역성경은 ‘거반’ 죽게 되었다, 반죽음을 말합니다. 그냥 두면 죽는데 엄청 아프다 죽습니다.
‘그러면 그 옷을 벗기고….’ 옷은 그 사람의 육체와 명예와 소유… 등을 말합니다. 여기 강도를 만난 사람은 모든 인생이고 특히 노인입니다. 노인은 세월이라는 강도를 만난 것입니다. 노인이 되면 이 모든 것들을 빼앗긴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세월의 강도를 만난 노인들은 어떤 모습입니까? 빼앗깁니다. 건강도 빼앗기고 재물도 빼앗기고 젊음도 빼앗기고 인생을 모두 빼앗긴 것처럼 된 나목(裸木)이 바로 노인입니다.
그러니 30절,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요즘 노인들에 대한 혐오, 노혐(怒嫌)이 지나칩니다. 어떤 이들은 부모를 버리고 이민을 가버립니다. 자녀들에게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노인들은 의미 없는 삶을 30년 40년을 살게 됩니다.
다윗은 동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녀(童女) 아비삭을 신하들이 옆에 눕혔지만 아무 사랑을 나누지 못했습니다. 골리앗을 이겼던 용맹함도 충신의 아내 밧세바를 탐냈던 육체조차 세월은 무기력한 노인으로 쓰러뜨렸던 것입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난을 피해 도망갈 때 바르실래 노인이 크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난이 진압되어 왕궁으로 돌아갈 때 다윗이 그에게 은혜를 갚겠다, 같이 예루살렘으로 가자합니다. 그때 바르실레가 이리 말합니다.
“내 나이가 이제 팔십 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이 종이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아직도 누를 끼치리이까.”(삼하 19:35)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아직도 누를 끼치리이까…. 늙으면 이렇게 본의 아니게 누군가에게는 누를 끼치는 일입니다. 이런 노인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거의 죽은’ 모습처럼 된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무서운 것이 노년과 말년에 이런 모습니다. 은퇴하고도, 인생을 즐기는 나이가 지났음에도 20년 이상을 살아갑니다. 오죽했으면 “재수 없으면 100세까지 산다”는 말이 다 나오겠어요? 생물학적으로는 살아있으나 이성 감정… 인생의 희로애락이 사라져 버리고 아무 생각 없이, 거기다 치매라는 강도, 중풍이라는 강도, 암이라는 강도를 만나고 그것도 장수하게 되면 지옥이 따로 없는 것입니다.
로마의 정치가 마르쿠스 키케로는 ‘늙음에 관하여’에서 노화가 인생을 왜 비참하게 만드는가, 에 대해 말합니다. 노화는 우리에게서 재주를 빼앗아 간다, 우리 몸에서 힘을 빼앗아 간다, 온갖 형태의 즐거움을 빼앗아 간다, 죽음으로부터 멀지 않다(생명을 빼앗아 간다). ….
그러니 늙음이 강도입니다. 나이라는 강도가 찾아와서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면 내 인생이 거덜납니다. 비참하게 되지요. 그래서 이규섭이라는 시인은 이렇게 넋두리를 합니다.
<늙는 것도 서러운데 남편들은 집에서도 설자리가 없다. 집에 혼자 있으면 근심 덩어리, 밖에 나가면 사고 덩어리, 며느리와 함께 있으면 구박 덩어리, 마누라와 있으면 웬수 덩어리… (말년의 남자들은)… 천덕꾸러기 신세다. … 돈 없고 병치레하며 막막한 노후를 보내는 이들에게 장수는 축복이 아니라 고통이다.>
‘수피우화’라는 게(책) 있습니다. 수피는 양털 가죽을 걸치고 사막을 걸었던 '가난한 사람'을 뜻합니다. 주인이 말과 마차, 마부와 함께 여행을 하는데 마부가 늘 술에 취해 있어 말을 굶기를 밥 먹듯 했기에 말라빠져 힘이 없고 마차는 관리가 안 돼 엉망진창이 되고 주인은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수피우화는 마차는 ‘몸’을 상징하고 말은 ‘감정’, 마부는 ‘지력’이며 주인은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본질로서 ‘영혼’에 해당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영성이 맑아도 육신이나 감정이나 지력이 역할을 못하면 노년에 믿음은 빛나지 못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노인의학전문가 마크 윌리엄스는 ‘늙어감의 기술’을 썼습니다. 윌리엄스는 네 가지 요소가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마부가 술에서 깨어나듯이 인간은 자신이 늙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선결과제로 꼽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는 항상 강도가 있다는 걸 감안했어야 합니다. 혼자 가지 말고 어울려 가던지, 대낮에 가고 저녁에나 밤에는 삼가던지… 너무 비싼 것들을 걸치지 말던지… 강도를 만나지 않을 시간에 강도를 만나도 상대할만한 실력을 갖추고 움직여야 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만 믿고 교회에만 다니고 성경박사가 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육체의 건강과 세월을 잘 보내는 지혜는 우리에게 맡겨놓으신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늘 건강검진과 체력관리와 운동을 통해 암이나 중병의 강도를 만나지 않도록 사전에 준비를 해야 합니다. 늘 독서와 생각과 유연한 사고를 통해 치매와 노인 우울증 등에 걸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인간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노년전문가들은 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맞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돈과 건강, 행복이라고 합니다. 3대 행복은 어느 날 갑자기 갖춰지는 게 아니고 30~40대부터 차근차근 준비해야 합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것이 빠졌습니다. 신앙입니다. 신앙은 검소와 절제로 체력을, 항상 하나님을 염두에 두며 살기에 지력을, 늘 천국을 소망하며 살기에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긴 현실에서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그런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6~18).
늙음의 강도를 만나 상처를 받았으면서도 낙심하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믿음 안에서 세월로부터 오는 상처를 스스로 날마다 치유해야 합니다. 노년의 삶이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생각하고 자기 관리를 잘하고 항상 깨어있는 의식으로 세상과 단덜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국내 최고령 현역 여의사로 활동하던 남양주 매그너스요양병원 한원주 과장은 작년 94세 나이로 소천하기 두 주전까지 환자를 진료했습니다. 오전 9시 출근해 하루 20여 명의 환자를 진료했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예쁘게 보이고 싶은 욕구가 살아 있어야 건강하다는 증거”라며 눈썹을 그리고 립스틱을 바르고 출근하던 한권사는 인터뷰에서 “할 수 있는 때까지 일하다 하나님이 부르면 언제든지 ‘네, 갑니다’ 하고 달려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별세 전 가족과 직원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힘내” “가을이다” “사랑해” 세 마디였습니다. 얼마나 멋진 인생입니까?
이제는 효도에 관한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주막을 교회에 비유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는 교회를 주막으로 생각해봅시다. 오늘 교회 주막에는 강도를 만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생의 여러 방면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들… 특히 나이라는 강도에게 급습을 당한 어르신들이 교회에 점점 많아져 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고령화 초고령화 공동체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월이라는 강도를 만난 교회의 부모들을 어찌 공경해야 하며 돌봐야 합니까? 사도행전이나 바울서신에 보면 초대교회가 노인들을 위한 명부를 만들고 공경하며 봉양했다는 사실들이 나옵니다. 요즘처럼 노인복지가 활성화되던 때가 아닙니다. 투자가치로 보면 생산성이 약합니다. 그래도 초대교회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르신들을 공경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서 어려운 교회 재정에도 노인들을 도왔습니다.
당시보다 지금의 어르신들은 더욱 심적으로 어려운 상황입니다. 나이라는 강도에 공격당하고 반죽음입니다. 무력감 소외감, 자존심이 상하고 외로움의 강도를 만났습니다. 제사장도 못 본척, 레위인도 지나쳤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만이 강도를 만난 그 사람을 도왔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바로 효도의 원리들입니다.
우선, 측은지심을 가져야 합니다. 33절,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그 뜻은 ‘그의 처지에 가엾은 마음이 들어서’ 이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 하나님의 마음 측은지심입니다. 왜 혼자 가다 그런 봉변을 당했느냐, 왜 이런 시간에 나다니느냐? 혐오하는 대신에 긍휼히 여겼습니다. 교회는 어르신들을 대할 때 측은지심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세월에 상처를 받은 강도 만난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바로 우리 어버이들이고 미래의 내 모습입니다. 누구나 그리 늙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노인들은 하루하루가 망가져 가는 사람이다.’ ‘나이든 사람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부담스런 존재야,’ ‘나이가 들면 요양시설에 들어가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아야 해.’ ‘노인이란 나이는 아무 즐거움도 없고 늘 죽음에 대한 두려움만 있는 나이야.’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에게 오늘 제목이 경고합니다. 당신도 늙는다!
사람에게 네 명의 부모가 있습니다. 육신의 부모, 교회의 부모, 스승으로서의 부모, 하늘아버지…입니다.
34절,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이는 노인들에 대한 모든 어르신들에게 사랑과 존경의 인사입니다. 무시하는 듯한 언사와 표정은 금물입니다. 그분들이 지난날 교회 안에서의 행적들을 인정하고 기억하고 치하해야 합니다. 재정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그분들이 하던 일들을 승계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 안에서 어른들이 존재하고 그래서 교회가 품격이 있게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34절,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로 그 상처에 붓고 싸매는 응급조치를 취했습니다. 성경은 포도주는 십자가의 보혈을, 기름은 성령을 상징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날마다 치유를 받으며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만져주심을 경험하면서 치유를 해 나가도록 설교와 성경공부와 기도로 도와야 합니다.
다음은 재정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35절, 사마리아인은 주막에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도록 비용을 댔습니다. 돈과 마음까지 지출한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있어 강도를 만난 사람은 살아났고 삶의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와 관계가 없는 사람, 그것도 평소에 멸시하던 사마리아인에게 도움을 받은 그 마음은 강도를 만나 마음이 강퍅해졌던 그 마음을 녹였습니다. 그는 몸과 마음이 모두 회복되었을 것입니다.
결론
“인생은 한 번 뿐이다. 하지만 제대로 산다면 그 한 번으로 족하다”(메이 웨스트)
그러려면 모세처럼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하소서”(시편 90:12) 자기 나이를 알아야 하고 지금 무슨 일을 할 때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내 나이가 지금 몇인지 그 나이에 어떤 일을 행할 것인가를 알아갑니다.
‘나이공부’의 저자 토마스 무어는 ‘몸이라는 물리적 요소가 기능을 잃기 시작하면 인간의 또 다른 구성 요소인 영혼이 한결 충만해진다’고 말합니다. 삶의 즐거움과 지적 수준은 나이가 들수록 한층 강화되고, 젊을 때 느껴보지 못한 자아의 성취감을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이 듦을 가장 효과적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라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외부 가치와 비교하려 말고 내면 가치에 좀 더 치중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나이를 긍정적이고 지혜롭게 받아들이면 또 다른 삶의 기쁨이라는 문이 열립니다.
잘 물든 단풍! 어떻게 하면 잘 물든 단풍처럼 우리의 노년을 그리 만들어 갈 수 있을까요? 그게 또한 교회가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낙엽은 낙엽이로되 아름다운 단풍! 그것이 예수님 앞에서 살다가는 복된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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