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열전9]
욥은 고난을 통하여...
욥기 19장 23~29절
서론
17세기, 음악천재 모차르트와 활동했던 궁중음악가 안토니오 살리에르는 독실한 신자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불후의 명곡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살리에르는 매일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영감과 은사를 주소서… 그 은사로 하나님께 영광 올리겠습니다.”
그러나 음악적 재능이 모자라 모차르트에게 밀립니다. 모차르트는 예의 없이 까불거리고 믿음이 없어요.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천박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에게 천재적 영감과 은사를 부어주심에 분노합니다. 아마데우스는, 라틴어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입니다. 이름그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음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살리에르는 하나님께서 자격 미달의 애송이에게 상을 주시는 까닭을 놓고 고민합니다. 어떻게 악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느냐는 불만입니다. 욥은 어때요? 반대로 하나님께서 지면에서 가장 의로운 사람에게 벌주시는 이유를 몰라 고민합니다. 왜 선한 사람에게 벌을 줄까? 상을 내려야 할 사람에게 왜 벌이냐? 하나님께서는 상을 줄 사람에게는 고난을 주시고 벌을 줄 사람에게는 형통을 주시는가…. 그것이 살리에르의 고민이며 욥의 의문입니다.
이런 물음에 대해 두 사람의 대응법은 전혀 달랐습니다. 살리에르는 독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증오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을 괴롭힙니다. 얼마나 가시노릇을 했는지 모차르트가 장티푸스에 걸려 35세 나이로 일찍 죽었는데 일설에는 살리에르에게 독살을 당했다… 는 말도 있습니다. 정설은 아닙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내고 이를 세상에 드러냅니다. 욥기는 단순히 고통의 의미를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고난을 당할 때 왜 이러세요? 고통의 의미를 따지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를 어떻게 세상에 드러낼까, 그것을 고민해야 합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 자기를 봅니다.
욥의 의(義)는 하나님께서 주신 의-신수성의(神手成義)라는 냄새보다는 종교적 경건에서 나오는 자수성의(神手成義) 의로움입니다. 1장에서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 했지만 그런 경건함은 하나님을 드러나기보다는 욥 자신의 경건과 선함이 드러납니다. 욥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속성이 많지 않기에 욥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했다고 하지만 비(比)선민계열에서 얼마나 여호와 하나님 신앙이 나타나겠습니까?
우리에게도 그런 경우를 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인데 인간성이 좋아요. 인품도 있고 남도 배려하고… 그런데 그 행동이 예수님을 믿어서 나오는 신앙심인지 원래 성격이 좋아서 믿음이 좋게 보이는지… 잘 모릅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개인의 착함만이 드러날 뿐 하나님이 크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면 착한 것만큼 때로는 고집도 셉니다. 완고함이지요!
욥이 그래요. 욥의 경건에는 ‘완고함’이라는 아이가 숨어있습니다. 완고함의 아이는 경건과 종교심, 점잖음 속에 숨어 있기에 타인은 물론 나도 모를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일을 당하기 전에는 겸손하고 경건합니다. 그러다 문제가 생기면 그 완고함이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그 사람을 드러냅니다. 지난 주일에 맥스 데이비스의 말을 인용했잖아요? “시련은 나를 어떻게 하지 않는다. 시련은 내가 누구인지 밝혀준다”. 시련, 고난은 숨겨졌던 나의 내면을 드러냅니다. 진짜냐 가짜냐? 믿음으로 좋은 사람인가? 그냥 성품으로 좋았나?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의 대답이 그치매”(32:1)
욥이 자기 의(義)에 대해 절대적인 확신을 꺾지 않으려 하자 친구들은 말문을 닫아버립니다. 더 이상 해봐야 소용이 없을 만큼 욥의 완고함을 보았던 것입니다. 욥은 말하지요.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13:15)
그 말은, 하나님께서 죽이겠다면 할 수 없지만 나름대로 의로운 자가 되려고 애써왔던 내 행위를 변명하겠다는 말입니다.
경건했던 엘리야도 같은 고집을 보입니다. “내가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제는 죽여주세요!” 자기 완고함입니다. 내가 도망 나온 것에 대해서 비겁하다거니, 기다리라거니 제발 다른 말씀을 마세요. 차라리 죽여주세요!…. 신앙인들의 완고함입니다.
요나에게도 이런 완고함을 봅니다. 요나가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이 풍랑이 나로 인한 연고로다.” 말합니다.
요나는 이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고난의 풍랑에서 먼저 하나님께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먼저 해야 하는데 자기가 희생해서 남을 살리겠다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모습을 보입니다. 도망자 주제에 군자 모양을 취한 것입니다. 남들 보기에는 자기희생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완고함입니다. 죽더라도, 하나님께서 맡기신,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을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완고함입니다. 죽어도 그 일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의 본성에 이런 완고함의 뿌리가 있습니다. 이런 완고함이 있는 동안은 고난의 티끌은 계속 날아오르고 하나님과 다투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거역과 불순종으로, 사람들에 대해서는 교만함으로 나타납니다.
지난날에 남겼던 업적들을 포기해야 합니다. 자기의(義)를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내 주장대로 안 된다고 “알아서 하세요!”라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주장하도록 내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을 고수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욥은 믿음을 꾸준히 계발한 사람입니다.
욥은 처음에 자기 의(義)에 집착했습니다. 친구들과의 논쟁에서 자신을 변호하다보니 본의 아니게 자기 의(義)에 집착하는 완고함이 드러났습니다. 욥과 친구들의 다른 게 바로 이 점입니다. 친구들도 욥만큼 완고했습니다. 자신들이 아는 인과응보의 진리를 욥에게도 적용합니다. 사람마다 다르고 상황마다 다른데 친구들은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는 인과응보를 들이대고 모든 원인에는 결과가 있다는 권선징악의 하나님을 욥에게도 들이댄 것입니다.
고난의 세 유형을 전했었습니다. 야곱의 고난은 내 죄로 왔으니 죄를 회개하면 성화(聖化)의 결과가 옵니다. 요셉의 고난은 남들 죄로 왔으니 죄를 회개하는 일보다 참고 인내하면 영화(榮華)의 결과가 옵니다. 욥의 고난은 욥의 믿음을 세상에 자랑하고자 했던 하나님에게로 왔으니 하나님께 자랑할 정금-순금과 같은 믿음으로 올라서면 됩니다.
그런데 세 친구들은 종교적 완고함에 빠졌습니다. 세 유형의 고난을 야곱의 고난 하나로 본 것입니다. 모든 고난은 자기 죄 때문이다! 그래서 회개를 강조합니다. 이제까지 보았던 욥이라면 인과응보와는 다른 고난이라는 큰 진리를 찾아야 하는데 완고함 때문에 고정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완고함 때문에 ‘재난을 주는 위로자’(16:2)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욥도 완고한 종교인입니다. 특히 자기 믿음과 행동에 완벽하다 자처했기에 절대로 내 의를 버리지 않겠다고 소리칩니다. 그래도 역시 욥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자랑할만한 믿음입니다. 그의 믿음은 완고함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유용성이 있기에 성장합니다. 욥은 논쟁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점점 자신의 억울함을 하나님께 호소하게 됩니다.
욥은 친구들을 상대하면서 하나님께로 올라갔고, 친구들은 욥을 상대하며 사람에게로 내려갑니다. 그러니 사람을 상대하는 친구들 믿음이 계발될까요,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욥의 믿음이 계발될까요? 당연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욥의 믿음의 계발됩니다. 신약에서도 사람을 상대했던 바리새인의 종교적 경건은 외식자들이 되고 오직 하나님께만 향했던 죄인들의 믿음은 성스러움으로 나아갑니다.
욥은 하나님과 대면하면서 거룩성을 보게 됩니다. 그 앞에서 친구들이 말하는, 자식들이 죽은 것, 병을 얻은 것, 재산이 사라진 것, 이런 원인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의인시했던 그 원인을 회개합니다. 자신의 참 모습을 본 것입니다. 친구들은 아직도 거기까지 보지 못했는데 욥은 봅니다. 이것이 욥이 자기 본모습을 보면서 바닥을 치고 하나님께 날아오르기 시작하는 전환점이 됩니다. 욥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16:20)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19절)
‘증인’ ‘중보자’는 ‘통역자’ ‘대사’ ‘대변자’입니다. 욥은 자신을 위해 변호해 주실 분이 하늘에 있음을 확신합니다. 하늘의 변호사입니다. 이 변호사가 누구인가? 25절,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이 변호사는 나의 무죄함을 변호해 줄 뿐만 아니라 “대속자”입니다. 대속자는 구원자이며 그리스도입니다. 욥은 4천년 전에, 비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보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이 멀리서 보았던 그 그리스도에 대한 욥의 눈이 어렴풋이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욥의 고난은 이 진리를 알려주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리는 제물로 하나님의 구속을 깨닫고, 욥은 고난을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욥은 선민이 아니기에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욥을 사랑했기에 이런 고난을 주면서까지 그의 믿음을 중보자의 개념을 깨닫고 그런 믿음을 갖는 최고급의 신앙자를 만들게 되셨을까요? 이런 고난을 통해 비유대인, 비선민, 이방인들에게 구속자 그리스도를 알리는 일을 위해 그는 열 명의 자식들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 하는 슬픔과 희생을 치른 것입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구세주를 주기위해 독생자를 희생제물로 주셨고 선민 아브라함은 이 계시를 알기위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최악의 지경까지 갔지만 살려주셨고 수풀에 걸린 수양의 죽음을 통해서 알려주셨습니다. 욥에게는 아예 열 명 자식이 죽는 고난을 통해 구속자의 개념을 깨닫고 깨달은 후에 열 명의 자식들로 보충을 합니다. 모두가 가슴 아프고 힘든 사역입니다. 세상을 구속하고 구속원리를 세상에 알리는 일은 이처럼 모두 자기희생으로 되는 것입니다. 고통과 희생이 없이 될 일이 세상에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고통을 당하면 왜 우리에게 왔는가? 고통의 원인 파악에 지나치게 몰두하지 마세요! 특히 욥의 고난처럼 잘못이 없음에도 온 고난이라면 원인 파악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대신 믿음을 계발하세요.
바울이 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그 말씀의 선(善)은, “예수님”이자 “하나님”입니다. 모든 것이 섞이고 반죽되면서 하나님처럼 성화되며 예수님을 닮게 된다는 것입니다. 욥의 고난이 주는 교훈입니다. 요나도 믿음이 점차 계발됩니다. “마음대로 하라!”고 목숨까지도 내놓았던 요나였지만 고기뱃속에서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2:7)
요나 자신의 급박한 처지가 아니라 여호와를 먼저 생각합니다. 니느웨를 사랑하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나보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원인보다 결과에 집중하고 나보다 교회를 먼저 생각하는 것! 이것이 고난당하기 전과 당한 이후의 변화입니다. 고난 받기 전에 내가 완고했던 사람이라면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관용이 넘치는 사람이 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의 계발이자 성장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고통이 찾아왔을 때 내가 누구인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지 생각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를 간직해야 합니다. 이게 안 될 때 고통의 의미에 너무 집착하고 결과에 조바심을 내다보면 고난이 우리를 더 황폐하게 만들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욥이 고난을 통해서 얻어낸 축복입니다.
욥은 부활의 신앙까지 올라갑니다.
욥은 세상에서 최고의 부자입니다. 그의 경건은 그로 하여금 최고의 축복과 덕망을 얻게 합니다. 사람들이 그를 존경했습니다. 그는 땅에서 행복하게 살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종교적 인격과 도덕심은 땅에서 끝납니다. 그가 죽을 때 그의 모든 것들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전도서의 솔로몬 왕, 나는 사업을 크게 했노라 집들을 크게 짓고 포도원을 일구었노라… (2:4~10)
“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해보았으랴”(전 2:25)
그러나 모든 것이 손에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헛될 뿐이다, 라는 고백으로 끝나게 됩니다.
욥의 믿음은 그렇게 끝날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믿음을 너무 귀하게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관의 싸움에 내놓으면서까지 그에게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사는 큰진리를 깨닫도록 도와주신 것입니다. 부활신앙까지 얻게 된 것입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25절)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26절)
대속자 신앙에서 부활 신앙으로 올라갑니다. 십자가 고난을 통해 부활을 본 것입니다.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27절)
낯선 사람-개역성경에는 “외인처럼 대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외인(外人)은, “낯선 사람” “이방인”입니다. 천국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이 아니라 선민으로 대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욥은 자기의 종교적 의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신수성득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욥이 고난이 없었다면,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괜찮은 사람은 되지만 이런 큰 진리들은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서 높은 수준의 믿음을 갖게 됩니다. 지금부터 4천 년 전의 인물인데 우리와 같은 믿음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고 놀라운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신 분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결론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은 곡식을 방아에 넣고 찧는 것과 같습니다. 방아를 찧는 목적이 무엇인가요? 곡식을 넣고 맷돌을 가는 까닭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겉껍질을 없애고 알곡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알곡을 파괴하려고 방아를 찧은 농부는 없습니다.
고난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고난은 징계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알곡 신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더욱 성결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속성을 알게 됩니다. 그만큼 믿음이 성장하게 됩니다. 결국 자수성의가 아니라 신수성의의 큰 믿음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욥이 주는 교훈입니다. 욥기처럼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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