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보여 줄 것은 부활의 능력
사도행전 3장 1~10절
서론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날은 성탄일, 성령님께서 오신 날을 성령강림일입니다. 성령강림으로 신약교회가 시작되었으니 오늘은 전세계교회의 창립기념일에 해당됩니다.
한국교회 신자들은 성령님을 참 좋아합니다. 열성파 신자들은 말끝마다 성령 충만! 성령 충만! 성령 충만한 곳이라면 어디에나 쫓아다니며 성령충만 받기 위해 안수 받고 기도 받습니다. 성령 충만이 무엇에 취하고 홀리고 둥둥 뜨고… 이런 걸로 압니다. 이런 성령 충만의 믿음은 한쪽으로 쏠려있는 성령론입니다. 교인들 기복신앙자 만들기에 딱 좋습니다.
기독교의 중심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로 죄의 문제를 처리하시고 부활로 의인의 신분을 얻게하셨습니다(롬4:25). 두 가지가 중심을 잘 잡아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십자가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부활의 능력을 과소평가합니다. 초대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었고 부활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능력의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십자가의 예수는 나를 변화시키고 부활 이후에 성령으로 오신 예수는 세상을 변화시키십니다. 그러기에 교회가 보여 줄 것은, 오늘 제목처럼 ‘부활의 능력’입니다.
본문에 앉은뱅이 걸인이 나옵니다. 돈이 없으면 건강하던지 건장하지 못하면 돈이라도 있던지, 아니면 금수저라도 입에 물고 태어나던지… 그것도 아니라면 분별력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사내는 어느 조건도 갖추지 못한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는 1절,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서 근무했습니다. 3절,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그러기를 40년입니다.
왜 성전에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성전은 돈을 내는 곳이지 버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전 안은 자기에게 이익을 주지 못했습니다. 거룩한 성전조차도 경제적인 개념으로 파악한 것입니다.
-성전 교권주의자들의 행위가 가증했습니다. 온갖 자비와 자상한 얼굴은 다 하고 다녔지만 걸인에게는 돈 한 푼 적선한 적이 없는 무정한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너무 부패했고 타락했습니다. 성전은 이미 영성의 장소가 아닙니다.
-벌이를 하기에는 성전 밖이 훨씬 좋은 장사터입니다.
그래서 40년을 미문 앞에서 살면서도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몸이 그러면 오히려 종교의 힘으로 더욱 희망을 발견해야 하는데 개인적인 이해와 해석 때문에 성전에서 오는 더 좋은 것들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도 이런 앉은뱅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썩었다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부정합니다. 소위 가나안 교인들이요 교회를 다니나 나름대로 상처를 받고 그만 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교회가 썩고 부패하고 오염되어서 제 기능을 잃었다 합니다. 그래서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 모태신앙이거나 세례를 받았으면서도 교회 안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교회 밖의 언저리를 돌면서 한국 교회를 비난하고 공격합니다.
코로나는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을 교회 밖으로 밀어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집단 확진자가 나왔다는 두려움 때문에, 직장에서 가지 말라는 금지명령 때문에, 집단 확진자가 나오도록 부주의한 교회를 비난하면서 교회 문밖에 있습니다.
본인들은 자신들이 옳다하고 정당하다고 하지만 사실은 우리 시대의 앉은뱅이들입니다. 교회는 사람들만 전부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전부였다면 교회는 종교중독집단이요 부패한 곳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수의 큰 물줄기가 있어 샛강에서 흘러들어오는 오염수들이 자정됩니다. 스스로 정결하게 되는 기능을 교회는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들만 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주인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까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1절,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으로 올라가던 중입니다. 성전은 그들에게는 두려운 곳입니다. 성전 기득권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매달아 죽였기에 성전은 끔찍한 곳이고 그들도 체포될지도 모르는 위험한 곳입니다.
성전은 개혁의 대상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장사꾼들의 제단을 엎어버리고 내쫓았습니다. 그만큼 성전은 외식과 부패, 타락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성전을 왜곡시키는 사람들을 쫓아내려고 한 것이지 성전 자체를 없애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2장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성전은 허물고 부정해야 할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더 위해야 하고 더 거룩하게 만들어 가야 하는 성스러운 곳, 그러기에 성령 받은 이후에도 열심히 성전 출입을 했습니다. 성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하루 한 차례 이상 성전을 찾았습니다. 초대교회의 특징입니다.
성령 충만이 뭘까요? 우리 믿음이 교회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더 사랑스럽고 더 가고 싶어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에 잘못된 부분도 있고 말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교회 자체를 부정해 버리고 비난하고 출석을 기피한다면 그 사람은 영적 울타리가 해체되고, 무장 해제된 사람, 사단이 쉽게 공략할 수 있는 신자입니다. 교회에 가까이 할수록 말도 있고 볼 것 안 볼 것도 보지만 그런 가운데서 교회를 통해서 성령으로 충만해갑니다.
왜? 교회는 성령의 공급소이기에! 교회를 멀리하는 신자들, 무교회주의자들치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비판할 것 다 비판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에게는 열정이 없습니다. 성전을 통해서 임하게 되는 성령의 충만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1절, 제9시 기도시간에 기도하기 위해 올라가고 있습니다. 왜 기도하나? 성령 충만을 공급받기 위해. 집에서 기도할 수 있어도 성전으로 갑니다. 성전은 거룩의 영의 임재를 느낄 수 있는 아주 영적인 곳, 세속적인 일을 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성전이 기도하면서 성령에 충만해 지는, 성령공급의 장소로 알았습니다.
성령은 죽은 영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영입니다.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새기도 하고 빠져나가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계속 성령 충만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성령께서 나를 핸들링 합니다. 성령 받기는 해도 충만하지 않으면 내가 운전합니다.
기독교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창조의 사역이 다르듯이 인간을 구원하시고 사용하시는 삼위의 역사들이 다릅니다. 인간은 지정의(知情意)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게 제대로 작동되어야 사람됨됨이가 바로 되고 이것이 균형을 잡아주어야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인간들에 역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을 예를 든다면, 하나님은 지(知)-지식입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인간을 제대로 알고 자신을 제대로 압니다. 예수님은 의(意)-의지에 해당됩니다. 의는 사역이고 행동이고 선행입니다. 천지를 직접 창조하신 일은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지식이 의-행동화가 되려면 정(情)-가슴이 뜨거워야 합니다. 가슴이 뜨겁지 않는 신앙, 열정이 없는 사랑은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성전이 위험하고 부패하고 신약적인 복음을 받아들이기에는 터진 부대였지만 성령 충만으로 가슴이 뜨거우니, 그래도 기도할 곳은 성전이 가장 효율적입니다. 그래서 성전 기도를 통해 성령 충만을 계속 공급받습니다. 그래서 정해진 시간마다 모든 일과를 물리치고 기도하려고 성전으로 들어가다 앉은뱅이를 만나게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걸인이 적선을 구합니다. 두 제자는 앉은뱅이에게 “우리를 보라!”고 합니다. 앉은뱅이는 돈을 요구합니다. 그들은 은과 금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주겠다고 보라고 합니까? 아무 것도 없는데! 그러나 저들은 뭔가 보여줄 게 있습니다. 그들 안에 뭐가 있다고 합니다. 예수! 예수가 있는 것입니다.
두 제자는 십자가의 예수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를 앉은뱅이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나 부활의 능력으로 함께 하시는 예수님은 같은 분이지만 굳이 분리한다면 십자가의 예수님은 구원을 주시는 힘이고 부활능력의 예수님은 삶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들 삶속에 들어오셔서 세상을 이겼다! 선언하시는 예수님! 세상 끝날까지 하게 하시마 약속하시고 그들 가운데 임재하신 부활능력의 예수의 이름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그동안 너무 십자가에 달린 구속자 예수님 방면에만 너무 포커스를 맞추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죄의 문제, 구원의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지금 삶속에서 역사하시는 부활의 예수님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못했습니다. 결과는 교인들의 삶속에 능동적인 힘,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역동성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코로나의 공격 앞에 이리도 쉽게 성전 문턱 앞에 쭈그리고 앉아 이 목사님의 설교 조금, 저 교회 목사님의 설교 조금… 이쪽교회 예배에서 조금 저쪽 교회 예배에서 조금… 말씀 동냥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아브라함의 혈통이기는 하면서도 비렁뱅이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부활하시고 성령으로 우리 인생에게 들어오신 예수님의 능력을 강력하게 소유해야 합니다. 부활 예수의 이름! 부활 예수의 능력의 이름을 한국 교회는 다시 가져야 합니다. 그 능력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의 위기가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
아무개 집사님이 올림픽대로에서 멈추어 섰습니다. 기름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기름이 떨어지면서 ‘사인’이 옵니다. 불이 들어오고 멈칫거립니다. 기름이 떨어지면 자동차는 섭니다. 좋은 차가 문제가 아닙니다. 기름이 있느냐, 없느냐? 그게 중요합니다.
타이어가 펑크 난 자동차를 운전한 적이 있습니까? 너무 힘듭니다. 자동차 운전이 재미가 하나 없습니다. 염려만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에게 창피를 당합니다.
오늘 우리가 그런 형편이 아닙니까? 컬러텔레비전을 사놓고 흑백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 능력으로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지쳐있고 무관심으로 널려있는 세상에 그리스도인들의 성령 충만함들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 속에 거하시는 부활의 능력 예수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 교회 밖에 있는 앉은뱅들이 다시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들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을 놀라케하고 세상을 흥분시키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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